병장기는 주인이 따로 없고
소리는 스스로 스러지나니
칼도 현도 산 자의 것일 뿐

왕이 꿈꾸는 불국토를 만들기 위해
‘칼의 나라’를 일으킨 이사부

우륵은 경계를 짓는 순간 경계를 지우는
‘현의 나라’에서 머문 우륵


▲ 작가 김훈.
김훈의 《현의 노래(생각의나무)》는 우륵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여느 김훈의 역사소설과는 정조가 다르다. 김훈은 《현의 노래(2004년)》 이전에 《칼의 노래(생각의나무, 2001년)》를 발표했고, 《현의 노래》 이후에 《남한산성(학고재, 2007년)》을 발표했다. 《칼의 노래》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이순신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고,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여러 인물군상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의 시대적 배경은 전쟁 시기라는 공통점이 있고, 이 전쟁 시기의 국가를 책임져야 할 왕은 매우 무력한 모습으로 일관하고, 왕을 따르는 신하들은 아비규환의 시절에도 졸렬한 계파 싸움에 여념이 없다.

김훈이 쓴 역사소설은 30~40대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 (2000년대 대부분의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는 20대 여성을 독자로 하고 있다.) 무한경쟁 사회를 사느라 매일같이 전쟁터로 향해야 하는 직장 남성들에게는 소설이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현의 노래》도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다른 김훈의 장편소설과 동일하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왕이나 신하들의 캐릭터도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무기력한 말[言]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전쟁터에서는 맨주먹보다도 무용한 글[文]로써 국가를 지키려는 신하와 칼[武]로써 적장들과 맞서는 무사 말고도 《현의 노래》에는 악기 하나만을 들고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殺戮)의 전쟁터를 가로질러 적국에 투항한 악사가 등장한다.

《현의 노래》는 우륵이 주인공인 까닭에 가야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지고 합병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가야의 상황은 아래와 같은 묘사에 잘 나타난다.

나라들이 언저리를 마주 댄 강가나 들판에서 쇠에 날을 세운 병장기들이 날마다 부딪쳤다. 말 탄 적을 말 위에서 찌를 때는 창이 나아갔고, 말 탄 적을 말 아래서 끌어내릴 때는 화극(畵戟)이 나아갔다. 창이 들어올 때 방패가 나아갔고 방패 위로 철퇴가 날아들었고 철퇴를 든 자의 뒤통수로 쇠도끼가 덤벼들었고 쇠도끼를 든 자의 등에 화살이 박혔다. 쇳조각으로 엮은 갑옷이 화살을 막았는데, 화살촉은 날마다 단단해졌고 갑옷은 날마다 두꺼워졌다.

이 대목에서 철기문화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찌르고 막기 위해 날마다 무기도, 방패도, 갑옷도 두꺼워졌던 것이다. 그러니 철(鐵)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 바로 승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전쟁도 그 근본은 철이라는 물(物)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소리 또한 물을 넘어서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니문의 “금의 소리는 줄의 것입니까?”라는 물음에 우륵이 “북은 가죽의 소리이고 피리는 바람의 소리이다. 징은 쇠의 소리이고 목탁은 나무의 소리이다. 소리의 근본은 물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답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若言琴上有琴聲 放在匣中何不鳴
若言聲在指頭上 何不於君指上聽

만약 금(琴)에 금 소리가 있다면 상자 속에 있을 때는 왜 울리지 않는가?
만약 손가락에서 소리가 난다면 그대 손가락에서는 왜 들리지 않는가?

소설 시작에 인용한 소동파 <금시(琴詩)>의 전문이다. 김훈은 소동파의 질문에 “소리의 근본은 물(物)에 있다”고 너무도 명쾌하게 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니문의 질문에 대한 우륵의 대답은 사실일 리 없다. 작가가 우륵의 입을 빌었을 뿐. 작가가 소리의 근본은 물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소리는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신라에 귀부할 것을 청하는 우륵을 이사부가 심사하는 대목을 살펴보자.

“가야의 악사는 무슨 일을 하느냐?”
“왕들이 죽으면, 무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금을 뜯으며, 소리를 베풀었소.”
“왕의 장례에 소리를 베풀며 녹을 받던 자가 적국으로 귀부함이 온당하냐?”
“귀국의 도끼에 맞아 죽는 것 또한 온당치 못할 것이오.”
이사부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사부는 온몸을 흔들며 웃었다.
“그렇겠구나. 세상에. 온당하기란 쉽지가 않구나. 내, 풍편에 들었다. 너의 소리가 그리도 절묘하냐?”
“나의 소리가 아니라 본래 스스로 흘러가는 소리요.”
“소리는 주인이 없는 것이냐?”
“소리는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고 울리는 동안만의 소리니 아마도 그러할 것이오.”
“너희 나라 대장장이 야로를 아느냐?”
“가야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소.”
“그 늙은 대장장이가 말하기를, 병장기는 주인이 따로 없어서 쥐는 자마다 주인이라 하였다. 소리는 병장기와 같은 것이냐?”
“소리는 없는 세상을 열어내는 것인데, 그 세상은 본래 있는 세상인 것이오. 병장기가 어떠한 것인지는 병부령께서 더 잘 아시리이다.”

우륵과 이사부가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대장장이였던 야로와 악사였던 우륵의 차이점을 읽을 수 있다. 우륵은 소리가 주인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소리는 없는 세상을 열어내는 것인데 그 세상은 본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야로도 병장기는 주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쥐는 자마다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우륵과 야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륵은 소리를 존재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야로는 병장기를 소유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데 있지 않을까? 우륵이 보기에 소리는 본래 스스로 흘러가는 것이므로 내 것이랄 것도 네 것이랄 것도 없다. 설령 없는 세상을 열었다 해도 그것은 본래 있는 세상의 소리인 것이다. 야로가 보기에 병장기는 주인이 있기는 하나 시시때때로 그 소유자가 바뀌므로 영구적인 주인이 없는 것이다.

우륵에 앞서 이사부에게 신라로 귀부할 것을 청한 것은 야로이다. 이사부를 만나는 두 사람의 태도는 칼과 현만큼이나 대비를 이룬다.

“신라의 천하에서 신라의 병장기를 만들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야로에게 이사부는 “야장의 병장기는 본래 주인이 없는 것 아니오? 이번 싸움에 백제도 반달도끼를 들고 나왔더구려.”라고 답하고 이튿날 새벽 야로의 목을 친다.

반면 “신라가 가야를 멸하더라도, 신라의 땅에서 가야의 금을 뜯을 수 있게 해주시오. 주인 있는 나라에서 주인 없는 소리를 펴게 해주시오.”라고 청하는 우륵에게 이사부는 옮겨갈 거처도 마련해준다.

칼도 소리도 본래 주인이 따로 없다는 점에서 같지만 그 이유 때문에 야로는 죽고 우륵은 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야로의 ‘칼의 빛’은 몇 해도 가지 않아 녹이 슬어 퇴색돼버렸지만, 우륵의 ‘현의 노래’는 서라벌의 영화와 함께 1천년 동안 신라를 지배했다.

대비를 이루는 것은 우륵과 이사부도 마찬가지다.

심문 과정 중 이사부는 우륵의 악기 줄을 튕기다가, 서라벌 흥륜사의 종소리가 일몰의 산맥 너머로 흘러가는 환영을 본다. 흥륜사는 이사부가 가야의 고을들을 피로 물들일 때 신라의 왕이 세운 가람이다. 흥륜사의 환영을 보면서 이사부는 우륵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한다.

‘이 자는 나와 같은 자인가. 나의 적인가. 양쪽 다 인가.’

둘은 닮았으면서 다르다. 이사부가 가야 포로와 병장기를 묻으면서 말발굽을 내달려올 때 우륵은 스러진 가야 고을의 소리를 현에 담았다. 패망한 주민들이 산맥을 건너왔다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 하지만, 이사부는 왕이 꿈꾸는 불국토를 만들기 위해 ‘칼의 나라’를 일으켰고, 우륵은 경계를 짓는 순간 경계를 지우는 중도의 ‘현의 나라’에서 머물렀다.

공교롭게도 각기 다른 길을 걸어온 우륵, 야로, 이사부 세 사람의 나이는 모두 일흔 살이다.

작가인 김훈 씨가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소리도 철도 살아 있을 때의 일이라는 것이 아닐까?

‘음악은 산 자의 것이지, 죽은 자의 것이 아니다.’

작가의 말은 어렵지만 아름답다.

그렇다면 국가는 어떠한가? 이는 가야 왕의 계통 없는 마음이 일으키는 망상에 잘 나타난다.


고을들은 왜 젊은 시녀들의 젖봉우리 두 개처럼 스스로 자족(自足)하며 살아가지 못하며, 백성들은 왜 새 떼처럼 아늑한 숲을 찾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살지 못하는가. 어째서 나라는 쇠붙이로 막아내야 하며 나라마다 대장간을 짓고 쇠붙이를 두드려 날을 세우는가. 저 위태로운 고을들을 쇠붙이의 세상에 남겨두고 어찌 죽을 것이며, 저 고을들을 다 죽여서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아마도, 빼앗긴 고을이 무너진 것이 아니리라. 고을들은 왕의 것도 아니고 나라의 것도 아니어서 뉘 땅이 된들 고을은 살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고을은 무너지지 않는다.

실로 가야 왕의 망상은 옳다. 국가가 사라진다한들 고을이 사라지겠는가? 사람이 있는 한 고을이 있을 것이고, 그 고을에는 소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석관이 닫힐 때 흘러나오는 순장자의 흐느낌이 그러하듯 소리는 분명 산 자의 것이다. 가야 왕의 시신과 함께 왕국의 모든 영화가 순장된 가야산 기슭에는 해인사가 있다. 해인사의 아득히 먼 풍경소리가 ‘소리는 스로로 스러진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유응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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