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동호 시인. 고려대 명예교수. (사)시사랑문화인협의회 회장.
수원 출생의 최동호(1948~)는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시집 《황사바람》을 출간하고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사바람》《아침책상》《딱따구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공놀이하는 달마》《불꽃 비단벌레》《얼음 얼굴》, 시론집으로 《현대시의 정신사》《디지털 문화와 생태 시학》등이 있으며, 현대불교문학상, 대산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박두진문학상, 유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3년 고려대 국문과 교수를 정년퇴임하고 현재 사단법인 시사랑문화인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고향 수원에서 시 창작을 지도하고 있다.

1. 자연에 대한 통찰과 묘사

최동호 시의 특징은 감정을 절제하고 섬세한 자연묘사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객관화하거나,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를 추구하는 선시풍의 경향이다. 즉 말이 물질화되는 시대에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천착을 통해 ‘정신주의 미학’이라는 시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말 이전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첫 시집 《황사바람》(1976)에서 젊음의 열정과 내면적 사색의 충돌로 갈등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시적 공간은 고독한 자아가 계절의 순환성이라는 자연의 이법에 자신의 몸을 융합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확장된다. 이는 자연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하고 있는 다음의 시에서 한결 잘 드러난다.

벽지 뒤에서 밤 두시의/풀이 마르는 소리가 들린다./건조한 가을 공기에/벽과 종이 사이 의/좁은 공간을 밀착시키던/풀기 없는 풀이 마르는/소리가 들린다. // 허허로워/밀착되지 않는 벽과 벽지의/공간이 부푸는 밤 두시에/보이지 않는 생활처럼/어둠이 벽지 뒤에서 소리를 내면 // 드높다, 이 가을 벌레소리,/후미진 여름이/빗물진 벽지를 말리고/마당에서 / 풀잎 하나하나를 밟으면/싸늘한 물방울들이/겨울을 향하여 땅으로 떨어진다. ―〈풀이 마르는 소리〉전문

제 11회 ‘유심’ 작품 수상작이다. 계절의 배경은 늦여름과 초가을의 경계 사이에 있다. “풀이 마르는 소리”는 여름의 빗물진 벽지가 ‘건조한 가을 공기’로 인해 풀기가 마르는 과정을 드러내면서 시간의 흐름을 함축하고 있다. 이 과정은 ‘물’ 요소가 무화하는 과정이다. 시인은 이 물기의 없어짐으로 인해 ‘허허로워 밀착되지 않는 벽과 벽지의 공간’처럼 외부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소외감에 젖어있는 듯하다. 그런데 말미에서 시인은 마당의 풀잎을 밟으며 싸늘한 ‘물방울’이 겨울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에는 물기가 무화되는 과정과 그것이 다시 생성되는 순간을 하나의 순환 고리로 연결시키는 주제를 암시되고 있다. 여름에서 가을로의 시간의 흐름을 ‘풀이 마르는 소리’로 표현하고, ‘가을 벌레소리’를 통해 겨울로의 변화를 예감하는 대목에서 무한을 머금고 있는 순간을 포착하는 시인의 능력을 파악할 수 있다. 소리를 통해 소리 없음의 고요함을 표현하는 데에는 시인의 내면 풍경이 내포되어 있다. ‘소리의 공간화’라는 미학적 원리는 시인의 여백을 지닌 동양적 시적 미학, ‘순간의 시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최동호는 황하(黃河) 강변 모래바람 날 흐리게 불어 생겨나는 ‘황사바람’을 빛과 어둠인 동시에 깊은 밤의 갈증과 물의 대위적 구조로 인식한다. 여기에는 자연 현상과 자아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시인 특유의 방식이다. 그래서 만년필로부터 갈증을 달래는 시구가 흘러나온다.

깊은 갈증의 밤을
만년필에
맑은 물처럼 담으면
사그럭 거리는 모래 소리에

이 한 낮
황사바람이 창문을 때리니,
해말간 살결을
잔잔한 햇빛 속에 잠그면
거대한 강물이 소리없이 흐른다
-〈황사바람〉부분

그러면 ‘깊은 갈증의 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자아 성찰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와 외부와 융합에 이르지 못한 상황을 의미할 수 있다. 시인은 그 갈증의 밤을 만년필에 맑은 물처럼 담는다. 가령, ‘물’의 이미지가 생명, 혹은 욕망의 정화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만년필’이란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 글쓰기와 책 읽기로 형성되는 것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이는 곧 불순물의 정화를 통한 근원적 생명의 회복과 세계와 자아의 합일을 사색과 명상을 통해 추구하는 시인의 자세를 말해준다. ‘깊은 밤’이 ‘한 낮’으로 바뀌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갈증의 밤을 맑은 물처럼 만년필에 담는 명상과 집중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때 ‘잔잔한 햇빛’은 갈증의 밤을 견디고 이겨낸 어떤 맑고 고요한 정신적 경지를 나타내는 동시에, 그것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동인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소리 없이 흐르는 거대한 강물은 ‘갈증의 밤’을 ‘맑은 물’로 정화하여 얻게 되는 조화와 합일의 상태를 말해준다 할 것이다.

2. 자아 찾기 : 딱따구리와 벌레

젊은 시절의 열정과 내면적 사색의 충돌로 갈등하고 방황하는 최동호는 스스로에게 눈길을 돌린다. 결국 자아 찾기를 모색하는 것이다. 만물이 불성의 현현함인데 그 자신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멀리서 자아를 찾고자만 하였던 것이다. 숨 막히는 밀도의 고뇌와 폐칩 속에서 시인은 자신이 빠져 들어와 있는 적막한 고독의 두께를 벗어나고자 한다.〈딱따구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라는 시는 그의 모습을 일깨우는 좋은 시이다. 시인은 구정 연휴 첫날부터 함박눈을 헤치고 학교 연구실에 들어가 앉아 부동의 벌레처럼 웅크린 채 침묵하고 있다. 고요한 정적 속에 창 밖에 눈이 내리고 시인은 고목나무 안에 겨우살이 하는 벌레와 같음을 자각한다. 동쪽으로 간다고 무엇이 있고 또 무엇이 다를 것인가. 정녕 가야할 길은 바로 지금 처해있는 곳 바로 그 곳에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이런 깨달음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딱딱한 부리로 웅크린 가슴을 깨우쳤다’고 노래한 시인은 모든 것에 불성이 들어 있음을, 만물이 불성임을 깨우친다. 시인은 과거의 노래가 약간은 번거로웠음을 인식한다. 이러한 그의 깨달음과 시어로의 표현은 〈벌레〉에서 정점에 이른다.

빈 숲의 딱따구리 소리여
움직일 곳 바이 없구나
오막살이 집
구부린
벌레 한 마리
-〈벌레〉전문

짤막하고 명료한 시편이다. 딱따구리는 구도자이고 오막살이 집 구부린 벌레 한 마리는 딱따구리가 물어 먹어야 할 대상이다. 먹고 먹히는 먹이의 연쇄 사슬이다. 하지만 여기서 벌레와 딱따구리는 공존을 한다. 뿐만 아니라 벌레 한 마리와 딱따구리가 동일화된다. 대상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통찰한다. 그러니 이런 깨달음을 길게 노래할 필요도 없다. 깨달음을 찾기 위해 부처님이 어디 있나 찾아보지만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딱따구리는 이제 ‘움직일 바이도 없’으니 멀리 갈 이유도 없다. 비록 ‘빈 숲’이지만, 멀리 가지 않아도 보잘 것 없는 ‘오막살이 집’에 웅크리고 ‘구부린 벌레 한 마리’, 그 중생이 바로 시인인 딱따구리가 찾아 헤매던 것이다. 또한 그 벌레는 중생이요, 바로 시인 자신이다. 딱따구리가 바로 벌레 한 마리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딱따구리가 벌레요 벌레가 딱따구리다. 빈 숲의 딱따구리와 오막살이 집 구부린 벌레는 동일한 대상이 된다. 서로 다른 개체임이 틀림없지만 시인은 이미 대상의 구분이나 어떤 대립 그리고 갈등도 넘어서고 있다. 생략과 암시를 통해 구법의 과정 자체를 노래함으로써 시인의 동양적 사유와 교외별전의 문자 형상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3. 왜 달마는 동쪽으로 왔는가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는 불법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선종의 유명한 화두이다.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게 된다 한다. 동양 정신주의 미학을 깊이 있게 탐구해온 최동호는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를 화두로 삼아 일상 속에서의 깨달음의 경지와 고요에 이르는 길을 찾고 있다. 그의 이러한 시적 탐구의 결실이 시집 《공놀이하는 달마》(2002)이다.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한 9편의 연작시로 이루어진 달마시편은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이는 시인 스스로 시간 속에 ‘던져져 있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달마’라는 화두를 던져 두두물물에 내재한 본모습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생명이라는 진부한 진리 앞에 달마는 세상의 온갖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 대표적인 시가 공굴리는 달마의 모습이다.

저물녘까지 공을 가지고 놀이하던 아이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고, 공터가 자기만의
공터가 되었을 때
버려져 있던 공을 물고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와 놀고 있다

처음에는 두리번거리는 듯하더니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공터의 주인처럼 공놀이하고 있다
전생에 공을 가지고 놀아본 아이처럼

(중략)

공놀이하던 개는 푸른빛 유령이 된다 길게 내뻗은 이빨에
달빛 한 귀퉁이 찢겨 나가고
귀신 붙은 꼬리가 일으킨 회오리 바람을
타고 공은 하늘로 솟구쳤다 떨어지기도 한다
어둠이 빠져나간 새벽녘
이슬에 젖은 소가죽 공은 함께 놀아줄
달마를 기다리며 버려진 아이처럼 잠든다
―〈공놀이하는 달마 -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부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공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 심판이 휘슬을 불거나 저물녘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놀던 공을 그 자리에 두고 원래 왔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삶은 일종의 유희의 현장이다. 그 순간을 ‘깨달음’이라 하고, 어떤 이는 ‘정신적 탈속과 참다운 자기 찾기’라고 말한다. 세상은 원래부터 비어있는 ‘공터’이며 이 공터에서 인간은 버려져 있는 ‘공’(空)을 가지고 멈출 수 없는 놀이를 계속하는 것이다. ‘달마’라는 한 축에 의해 형상화되는 이 신비로운 세계는 공을 가지고 놀이하던 아이들과 아이들이 사라진 공터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개와 마침내 그 개도 '푸른빛 유령'으로 사라져버린 적막의 시간 속에서 ‘소가죽 공’이 ‘달마를 기다리며’ ‘버려진 아이처럼 잠드는’ 고요한 세계이다. 삶이 ‘허공의 어두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덧없는 ‘공허’(空虛)를 좇아 ‘땀에 젖은 먼지를 일으키며 놀고 있’는 ‘전생의 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주적 생명은 이렇게 영원하게 끝없이 회전, 회귀하는 그 영겁의 시간을 되풀이한다. 생명의 존재자들은 우주의 시간 주기에 조응하여 이승에 머물고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결국 우리라는 존재는 한 몸을 빌려 이승에 머무는, 끊임없이 공명하고 상호 교류하는 우주 리듬의 작은 통로이다. 그런 점에서 공놀이의 공은 공(球)이면서 공(空)이다.
최동호의 시에서 풍경은 글쓰기의 또 다른 터전이다. 설악산 백담사 무금선원(無今禪院)의 마당은 탈속의 경지를 지시하는 곳이다. 마당은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닌 곳(무금), 큰 적멸을 지척에 둔 곳이면서 적멸의 이편인 곳(대적)인데, 거기에 더하여 글쓰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시인은 ‘설악의 시인’으로 불렸던 오랜 시우 이성선을 졸지에 잃고(2001년 작고) 선방 정적처럼 단정했던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황금사자의 환영을 보았다는 백담사 무금선원의 밤을 되짚고 있다.

大寂의 달빛 저편 어둑한 개울가의 돌무더기는
솜눈옷 갈아입고 묵상하는 아기 눈부처가 되었는데
無今의 마당에는 뒤꿈치에서 꼬리 달린 소소리 바람이

달빛은 놓아두고 귀신붙은 나뭇잎만 쓸어간다
해묵은 육신에 생의 불꽃을 피우려는 선방에선
황금사자가 넘나드는 칸 너머 문풍지 바르르 몸을 떤다.
-<달빛 선원의 황금사자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부분

이성선이 유명을 달리하기 석 달 전, 무금선원 절 방에서 그와 하룻밤 같이 머물렀던 시인은 새벽녘에 깨어 문밖의 달빛이 나뭇잎을 쓸어 가는 소리와 선방의 깊은 정적을 느끼며 느낀 소회를 이렇게 담아내고 있다. 밤에 잠이 깨어 ‘문밖의 달빛이 나뭇잎을 쓸어가는 소리’와 이성선 시인의 숨소리를 ‘갓 지은 선방의 깊은 정적처럼 느끼며 황금사자의 환영’을 보았다. ‘대적’ ‘무금’과 같은 시어가 만들어내는 적막과 비현실은 아름답고 고요하다. 대적의 달빛 저편, 즉 비로자나 부처의 광영을 받은 곳에서는 ‘어둑한 개울가’의 ‘돌무더기’마저 ‘아기 눈부처’가 된다. 한편 달빛 환한 ‘무금의 마당’에서는 여우를 닮은 바람이 ‘귀신 붙은 나뭇잎만 쓸어간다’. 그러니 ‘무금’은 글자 그대로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니다. 이곳은 귀신 붙은 것들을 제거하는 성소이며, 여기에 지금은 고인이 된 이성선 시인의 숨소리가 정적과 겹쳐진다.
화엄종의 4대 조사인 청량 국사가 설법할 때 구름 속에서 황금빛 털을 가진 사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니 황금사자는 지극한 법열의 상태에서 모습을 보이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시인은 섬광처럼 ‘해묵은 육신에 생의 불꽃을 피우려는 선방’에서 문득 문풍지에 어른거리는 ‘황금사자’를 본다. 이 돌연한 ‘황금사자’의 환영은 불현듯 방문하는 현상학적 경이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칸 너머 문풍지’의 떨림을 절묘하게 이미지화한 이 환영을 통해, 시인은 이성선에 대한 추모의 생각을 ‘대적’과 ‘무금’의 풍경 속에 담아냈던 것이다.
시 읽기의 즐거움은 대개 발견과 깨달음에서 온다. 시인은 매미 소리 가득하고 초록이 짙푸른 여름 숲의 아침산책길에서 거미줄을 발견한다. 거미 없는 그 거미줄에서 나비의 날개를 발견한다. 그리고 나비 날개 한쪽이 부서진 것을 보고도 시인은 마치 자기의 어깨가 떨어져 나간 듯 아픔을 느낀다.

아침 산보길
매미 소리 하얀빛을 뿌리며
짙푸른 여름 나무둥치 속으로 파들어가는데
거미는 없고 거미줄에서
퍼덕이다 부서진 나비 날개를
우연히 발견한다

어젯밤 꿈속에서
몸부림치던
어깻쭉지가 아니었을까
공연히 나의 팔을
허공에 휘저어보는
아침 산보길의 뭉클한 흙 냄새
- 〈거미줄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전문

지난밤 나비는 살기 위해 날개를 퍼덕이며 몸부림쳤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거미줄은 더 옥죄어오고 온몸에 감겨 마침내 부서진 날개만 남은 죽음이다. 문득 시인의 생각은 부서진 그 날개가 지난 밤 꿈속에서 몸부림치던 자신의 어깻죽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데 미치게 되고 공연히 팔을 허공에 휘저어본다. 몸부림치다 거미줄에 옥죄어 부서진 ‘나비의 날개’와 허공 속에 휘저어본 온전한 ‘나의 팔’이 같은 존재일 수 있다는 윤회의 불가적 상상력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깨달음이 동전의 양면 같은 삶과 죽음을 깊이 성찰하게 해준다. 거미줄 속에 부서진 죽음이 아닌 공연히 허공에 팔을 저어보는 살아 있는 아침 산보길은 몸의 산책일 뿐 아니라 가슴의 산책이기도 하다.

4. 해골바가지 두드리면 세상이 화창하다

왜 달마는 동쪽으로 왔는가? 그는 결국 자기를 위해 온 것이다. 오고 감이란 것, 장자가 말하는 자연의 이치에 역행하지 않고 자연의 변화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달마가 되는 것이며 바로 도로 향하는 것이다. 젊은 날부터 찾아왔던 구도의 길이 하나의 모습과 깨달음으로 마침내 다가선다. 그것은 혼자만의 질문과 깨달음이 아니라 생명에의 기쁨과 따스한 사랑 그리고 정이다. 바로 대승의 길이다. 최동호는 달마의 화두를 일상적 삶의 차원으로 끌어와 따뜻한 죽 한 그릇의 봉사, 불꽃 비단벌레의 영롱한 날개 빛, 기러기 아빠 등 평범한 인간들이 숨 쉬는 삶의 세계로 환속시킨다. 그것은 고즈넉한 절 마당에서 목탁소리로 열리는 아침을 보는데서 잘 드러난다. 목탁소리가 여는 한 정경을 깨달음의 선적 시선과 사유로써 감지하며, 고요한 심연의 세계를 마치 수묵 담채화처럼 눈앞에 선연히 펼쳐 보인다.

아침 딱따구리 계곡의 나무를 둥치 큰 나무를 흔드는데
졸면서 마당 쓰는 동자승 바라보고
빙그레 미소 짓는 부처님 살풋한 눈빛

법당의 큰스님 자기 해골 두드리는 소리
산과 계곡으로 퍼져나가
세상의 햇살이 아기 걸음마처럼 화창하다
-〈해골바가지 두드리면 세상이 화창하다〉전문

허공을 깨고 하루를 여는 시작의 소리가 신선하고 청아하다. 졸면서 마당을 쓰는 동자승의 등장도 재미있지만, ‘법당의 큰스님 자기 해골 두드리는 소리’에 이 시의 묘미가 있다. 목탁을 스님의 해골로 상상한 것도 흥미롭고, 그 소리가 산과 계곡으로 퍼져나가자 ‘세상의 햇살이 아기 걸음마처럼 화창하다’는 표현은 세상은 도량의 골짜기로 번져간다. 해골에서 나는 소리가 산과 계곡으로 퍼져나가 햇살을 화창하게 한다는 것은 청각적 이미지의 시각적 이미지로의 변환이며, 한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을 낳는다는 인식의 일대 전환이다. 시인은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는 동안에도 시간이 가고 있음을 말해주려 한 것일까, 아니면 늙음과 죽음이 비극이 아님을 들려주려 한 것일까. 도(道)를 수신하는 큰스님의 목탁소리가 아침과 함께 삶을 깨우면서 부처의 자비심이 두루 편재한다. 스님이 두드리는 목탁소리야말로 자기 자신의 해골바가지를 두드리는 것이라 비유한다. 그 목탁소리가 세속의 골짜기로 널리 펴져나감으로서 화창해지는 평정을 이 시는 묘사한다. 결국 최동호 시의 한 특징을 이루는 것은 번잡한 현실과 세속적 욕망으로 오염된 자아를 정화하여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게 하는, 그래서 생명의 순환성이라는 자연의 이법과 하나로 통합되려는 시도로도 볼 수 있다.
일상의 풍경 속에서 타자를 향한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가야할 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히말라야 산정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사랑의 봉헌’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며,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인식했던 그는 파 뿌리처럼 쓰러져 잠든 할머니, 갑각류 다리보다 더 굳세고 강한 갈쿠리 손가락을 가진 생선가게 아주머니, 통통 부은 고등어 몇 마리를 버스 정거장 앞 좌판에 널어놓는 아주머니의 고단한 삶 등, 시인의 발걸음은 부러진 검은 날개 지상에 드리우고 서 있는 것들을 향한다. 시인은 그들의 삶 속에서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삶의 진실을 배우는 것들을 향한다. 그 전형적인 시가 돈암동시장 어귀 길모퉁이에 앉아 파를 파는 돈암동 파 할머니를 보며, 그 위에서 돌보다 강인한 우리 어머니의 얼굴을 찾는〈돈암동 파 할머니〉이다.

돈암동 시장 어귀
매일 아침 파를 다듬는
할머니가 길모퉁이에 있었다 일 년 내내
고개를 들지도 않고
파를 다듬는 할머니는
오직 파를 다듬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매일 아침
채소 가게 어귀에 나와 앉아
머리가 하얀
파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한번도 고개를 들어 행인을 보지 않고
언제나 구부린 자세로
파를 다듬기만 하던 할머니가
어느 날,
꽃샘바람 지나가는
시장 어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다듬은 파처럼 단정하게 머리칼을
흙 묻은 손으로 쓸어올리는
파 할머니 얼굴에서 흘낏
돌보다 강인한
우리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돈암동 파 할머니〉전문

늙은 할머니가 시장어귀에 채소가게 곁 난전에 앉아 파를 한 옴큼씩 팔고 있다. 눈칫밥도 눈칫밥이겠지만, 벌어들이는 것 역시 보잘 것 없다. 계절은 오고 가지만 할머니는 등을 구부려 박힌 돌처럼 앉아 파를 다듬어 팔고 있다. 바람이 불어 흰 머리카락이 실처럼 흩어질 때마다 ‘흙 묻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뒤로 쓸어 넘기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에는 푸른 파의 매운 냄새가 가득 배어들어 있을 것이다. 그는 달마의 화두를 일상적 삶의 차원으로 끌어와 세속인들의 삶 속에서 평범한 인간들이 숨 쉬는 삶의 세계를 생동감 있게 묘파하였다. 불법에 성속이 없듯, 달마의 모습은 생명 있는 모든 것에 깃들어 있고 그것에 귀 기울이는 것이 어쩌면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라는 참선의 끝일지도 모른다. 거미줄에 걸려 부서진 나비날개를 보며 공연히 허공에 팔을 휘저어보는 자신이나, 가르침을 얻고자 팔을 자른 혜가나 졸음을 이기려고 눈썹을 뜯은 시인이나 가지 짤린 차나무, 전생에 공을 가지고 놀아본 아이처럼 어둠 속에서 공놀이하는 ‘개’, 아버지 손잡고 등산하는 어린아이, 생선 굽는 골목의 사람들, 개미 등 모두 달마일 것이다.
하나로 포괄하는, 무한한 공간을 하나의 점으로 응축시키는 정신의 집중과 통합은 그의 시의 미학적 원리를 이룬다. 살아있음이 깨달음이다. 시인이 살아있는 것처럼 그와 동일하게 무수한 중생도 같은 삶을 영위한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하는 시인의 물음과 답은 시인만의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를 읽는 모든 중생들이 공유하게 된다.

5. 간결한 시행에 담아내는 깊은 사유

최동호는 극도로 축약해 행간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것이 트위터 시대, 디지털 시대코드와도 맞는 방향임을 강조한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스마트폰 속에 있다. 그래서 시는 짧고 간결하고 압축되고 명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극(極)서정시’의 시학이다. 장황하게 나열하지 않고 단 몇 줄만으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게 목표다. 모든 형식이나 격식을 벗어나 궁극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시와 비슷하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극소의 언어로 빚은 ‘여백과 서정’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최대한 말을 아끼고 시의 전면에 드러나기 보다는 뒤로 물러나서 자신보다는 타자의 삶을 응시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타자의 삶은 결국 자신의 내면을 향한 삶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묵언 속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상 구경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주변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가 타자와 ‘나’를 돌보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 만날 수 있다.

호랑나비 등에 작은 낚시 의자 하나 얹어놓고
난만하게 피어 있는 꽃밭 사잇길 건들건들 날아다니며
낚시 대롱 길에 내려 꽃잎 속 부끄러운 속살 이리저리 뒤지다가
꽃가루 묻은 얼굴로
세상 나들이, 햇빛 낚시 다 마치면
미련 없이 시든 꽃잎 속에 들어가 까만 씨가 되고 싶다
-<세상 구경> 전문

시적 화자는 호랑나비와 동일시한 상태에서 꽃잎의 속살을 뒤지다가 ‘꽃가루 묻은 얼굴’을 하고, ‘세상 나들이, 햇빛 낚시’ 모두 끝내고 나면 ‘꽃잎 속에 들어가 까만 씨가 되고 싶다’고 말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명상적 관찰이 바로 시인의 욕망 없는 삶에 대한 깨달음의 의식과 이어져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세속주의를 거부하고 정신주의의 가치를 주장한 바 있는 시인은 자기를 비운 무욕의 경지를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화자와 호랑나비를 동일시하여 ‘세상 구경’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이미지가 선명한 시다. ‘난만하게 피어 있는 꽃밭 사잇길’을 날아다니며, ‘꽃잎 속 부끄러운 속살’을 뒤지다가 ‘세상 나들이, 햇빛 낚시 다 마치면’ ‘미련 없이 시든 꽃잎 속에 들어가 까만 씨가 되고 싶다’는 마무리를 통해 마음을 다 비우고 욕망을 내려놓은 자의 깨달음, 명검의 사유를 읽게 한다.
‘정신주의의 구극을 가고 싶었다’고 서문에 밝힌 시인의 말처럼, 시인은 시를 통해 역사성에 대한 탐구, 철학적 모색뿐 아니라 일상의 진실을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리얼리즘적 세계까지 다채롭게 보여준다.

히말라야 설산에 사는 전설의 독수리들은
먹이를 찢는 부리가 약해지면
설산의 절벽에 머리를 부딪쳐
조각난 부리를 떨쳐버리고 다시 솟구쳐 오르는
강한 힘을 얻는다고 한다.
백지의 눈보라를 뚫고 나가지 못하는 언어가
펜 끝에 머물러, 눈 감고 있을 때
설산에 머리를 부딪쳐 피에 물든 독수리의 두개골이 떠오른다.
-〈히말라야의 독수리들〉전문

2013년 유심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거룩하다는 히말라야 설산에 사는 독수리들의 생태를 시인의 운명과 고뇌에 연결시키고 있다. 명징하고 견고한 시이다. 독수리도 시인도 혹독한 고통의 순간을 과단 있는 결의로써 돌파한다. 높고 신성하게 내면을 비약하고 솟구쳐 날아올라 백척간두의 끝에서부터 대자유의 창공이 열리는 이치를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수리와 시인은 용맹스럽게 정진하는 수행자의 기품을 닮았다. 마음을 단단히 다잡아 늦추지 아니하는 불굴의 의지가 엿보인다. 이 시를 일러 ‘피어린 정신의 고투’ 속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극서정시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의 시 쓰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새삼 일깨워주는 시이다.
요컨대 물신숭배자들의 드높은 외침이 가득 찬 우리 시대에 최동호는 불교적 직관과 통찰을 바탕으로 섬세한 균형 감각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작과 비평을 한다. 서정시 본연의 미학과 이론을 창출하기 위해 시 전문지 〈서정시학〉을 1990년 창간했고, 선시문학과 서정시의 영역을 확대ㆍ심화시킨 그는 20세기 후반 서구의 시학을 넘어서서 한국의 주체적 시학을 확립하는 토대를 만들었으며, 그의 시는 물신주의를 넘어서는 선적 직관과 통찰로 순수 서정시 지평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한 점에 그 의미가 있다.

-백원기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