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한 추위가 있을 것이라는 예보를 보기 좋게 빗나가게 하고 대신 엄청난 양의 눈을 뿌린 겨울이 물러서고 여기저기서 봄의 소리들이 수런거리며 들려오고 있다. 연구동 장식하는 목련나무 꽃망울들이 그러하고, 눈을 뒤집어쓴 채 장엄한 부처상을 짓던 소나무가 푸르름의 색채를 바꾸며 환하게 고개 내미는 것도 그런 소리들로 들려오고 있다. 바야흐로 봄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봄이 어느 구비에선가 제대로 우리 한반도에 정착하지 못한 채 당혹스러워하는 모습 또한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내려앉는 미세먼지 투성이의 스모그를 마스크도 없이 들여 마시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러다가 모두 질식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과 만나기도 하고, 조금 더 있으면 본격적인 중국발 황사가 시야를 가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라는 걱정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도 한다.

한반도의 봄을 방해하는 것은 이런 미세먼지와 황사에 그치지 않는다. 잊을 만하면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잔해물들이 바다로 쏟아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그 원자핵발전소의 공포는 다시 공기와 땅으로 환산되면서 인구 밀도 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있다는 우리 핵발전소를 전율 속에서 떠올리게 한다. 그 뿐인가? 북한 핵문제를 중심으로 중국과 미국, 러시아 등의 핵무기가 한반도 주변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이 지구의 거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는 20세기 중반 이후 우리 한반도도 늦은 출발이라는 불리한 여건을 잘 극복해내면서 세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시공간이 되는데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내세우는 남한을 중심으로 경제력에서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면서도 군사력에서는 남한과 필적할 만한 북한으로 나뉘어져 있는 한반도는 이른바 주변 강대국들은 물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여러 문젯거리들을 지닌 국제정치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

우리 마음의 내면은 어떤가? 봄소식보다도 먼저 절망적인 경제상황을 견디지 못한 가장과 어린 자녀들이 동반 자살했다는 소식과 꽃 같은 대학 신입생들의 목숨을 어이없이 앗아간 대기업 소유 리조트 붕괴 사고 소식이 도착해 있다. 외로움과 추위를 견디지 못한 노인들의 고립사나 자살 소식 또한 쉽게 그 끝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지속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과연 봄은 언제나 우리 마음에까지 꽃망울을 드리우며 다가올 것인가?

지난 며칠 심한 몸살감기를 앓으며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나는 몸의 한계와 함께 소중함을 절절하게 느껴야만 했다. 몸과 마음은 결코 둘일 수 없음을 자각하면서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의 숭고함을 선연한 핏물 같은 선명함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 맨 처음 마주한 것은 터 잡고 사는 수리산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연한 붉은 빛 진달래의 환영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그 환영은 미세먼지와 안개가 얽혀 빚어내는 죽음의 세레나데로 바뀌어 압박해왔다.

이 모든 것들의 뿌리는 우리 자신의 탐욕에 기반한 편의성 추구라는 삶의 방식이다. 편리함이 곧 행복함이라는 자본주의적 행복 공식을 내걸고 화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배우들의 미소와 목소리를 빌어 들려주는 악마의 속삭임으로부터 한 발짝씩이라도 물러설 수 없다면, 한반도의 봄은 영영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말 수밖에 없다. 그 운명은 단지 우리들의 것만이 아니고 그토록 아끼는 자식들의 것이 된다는 점에서 더 절망스럽고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나뭇가지를 붙들고 가만히 귀를 대보면 그 안에서 흐르는 청정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절이 오고 있다. 그 소리가 우리 마음 깊은 곳에까지 전해져 무명(無明)의 짙은 그림자를 걷어내는 지혜의 눈길과 손길로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박병기/논설위원,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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