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법사 대웅전은 삼각산 구진봉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앞 양옆 5층 석탑이 도량을 번듯하게 장엄하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삼각산(三角山)에 내린 햇살이 구슬 모습을 띠게 되면 구진봉(舊陣峰)을 타고 내려온다. 사람의 발길은 삼선교에서 성북동 길로 접어들어 길상사를 지나 구진봉 쪽으로 걸음을 한 발 한 발 옮기다 보면 숨이 턱을 차고 오를 때 이마 위로 햇빛 구슬을 머금은 정법사가 자태를 드러낸다.

‘삼각진산정법사’팻말이 붙어있는 입구부터 가파른 언덕이다. 당차게 힘을 모아 올라서면 가쁜 숨이 몰아치지만 이내 시야에 들어오는 서울 전경으로 탄성이 쏟아진다. 넓은 도량은 아니지만 설법전과 종무소 요사채 대웅전 극락전 범종루 산신각 등 당우가 정갈하고도 번듯하게 자리한 채 품격있는 사세(寺勢)를 웅변한다.

실제로 정법사는 조선시대 창건된 고찰로 전통사찰이다. 조선후기 유명한 학승이자 대선사로 이름을 날린 호암체정(虎巖體淨 1687~1784)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호암선사가 창건한 당시엔 복천암(福泉庵)이었다고 한다. 삼각산 산세를 빌어 국운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 원찰(願刹)이었다.

지금은 길상사로 바뀐 대원각의 옛 이름은 청암장. 이곳에 맑은 정기가 담긴 약수가 세 곳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이를 ‘삼형제 약수’라 불렀다. 특히 조선시대 후궁과 상궁들이 삼형제 약숫물을 떠 복천암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국운융성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예로부터 길상사에서 정법사로 이어지는 길은 색다른 아늑함을 던져주는 산책로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길상사 스님들은 정법사로 아침 산책을 즐긴다고 한다. 비록 큰 높이 차는 아니지만 서울 시내에서 길상사와 정법사의 공기가 다르다는 것이 길상사 스님들의 전언이다. 1960년 이전 정법사에서 길상사로 가는 길에는 개울물이 흘렀다. 삼선교에서 도보로 올라오자면 30분 이상이 소요되는 산길이었다.

▲ 범종루.
복천암이 현재의 정법사로 새로이 태어난 것은 1960년의 일이다. 정법사 조실 석산스님은 올해 세납이 96세다. 스님은 17살 때 건봉사로 입산 출가했다. 건봉사 강원에서 경을 배우고 어장스님에게 염불을 익혔다. 스님의 염불실력은 탁월했다. 건봉사가 어떤 곳인가? 만일염불회로 유명한 건봉사에서 염불을 제일 잘하는 스님으로 꼽혔다. 스님의 어산(魚山)실력은 국보급으로 평가된다. 스님은 이후 망월사 해인사 범어사 등에서 수행 정진했다. 그러던 중 1944년 은사 보광스님(1899~1960)이 서울 가회동 포교당으로 불렀다. 이곳에서 스님은 노전을 살며 은사스님을 시봉했다. 은사 보광스님은 일본 대정대학을 나와 혜화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엘리트 출가자다. 1939년 가회동에 건봉사 서울 포교당을 개설하고 상좌 석산스님을 부른 것이다. 그러나 도봉스님은 해방 이후 동국대 교수로 재직하다 1960년 입적했다. 석산스님은 은사 스님이 입적하자 가회동 포교당을 정리하고 삼형제 약수와 인연이 깊은 복천암 자리에 절을 세웠다. 그리곤 정법사라 이름했다.

▲ 설법전 1층에 만들어진 도서관 내부 전경.

정법사의 가풍은 깊은 학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호암체정 선사가 조선시대 뛰어난 학승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환성지안(1664~1729) 선사의 법맥을 이은 해남 대흥사 13대 대강백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강설에는 늘 수 백명의 학인들이 몰렸다고 한다. 한국불교 근현대사에서 정법사 주지를 지낸 대련당 덕문(大蓮堂 德文 1887~1949)대선사도 건봉사 만일염불회 회주를 지낸 대학자다. 덕문 대선사의 법을 이은 보광스님 역시 동국대 교수를 지낼 정도로 깊은 학문을 자랑한다. 석산스님 또한 경학에 있어서 경지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다. 선학원 이사장이자 현 주지 법진스님도 동국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원광대에서 <조선중기 선사상사 연구>로 철학박사를 취득한 학승이다. ≪원시불교 경제윤리에 대한 연구≫ ≪경허의 선정관에 대한 연구≫ ≪편양언기의 선교관 연구≫ ≪선불장≫ 등 저서도 여러 권 냈다. 스님의 상좌들 또한 동국대를 나와 군법사로 재직하고 있거나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 미륵불 입상은 1975년 봉안됐다.
석산스님이 현재의 이곳에 정법사를 세울 당시엔 칠성각 한 채만 덜렁 놓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삭막했을 도량에 석산스님은 서대문 신학대학에 있던 황태자궁을 이전해 대웅전을 건립함으로써 도량의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또 지금은 조실채로 불리는 요사를 1969년 건립하게 된다. 조실채는 시멘트로 만든 낡은 슬래브 지붕에 함석 처마가 스님의 나이보다 훌쩍 뛰어넘었을 한 그루 소나무와 어울려 도량의 한 측면을 장식하고 있다. 수행자의 검소함과 단정함이 배어있는 조실채는 남루하지만 그래서 더 위엄을 뿜는다.
대웅전과 산신각을 양 옆 배경으로 삼각산 위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자리하고 있는 ‘나무용화미륵존여래불입상’은 1975년 독실한 한 신도의 시주로 봉안됐다. 입상의 높이는 약 5미터. 도심 속 사찰이라고 하지만 미륵불을 휘감고 도는 산나무와 산새들은 속진을 벗은 천연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범종루도 세워졌다. 산 속에서 만들어내는 종성(鐘聲)은 말 그대로 사람들의 공명(共鳴)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대웅전 중창불사는 2002년 시작된다. 뜻있는 신도들의 수희동참이 이루어졌고 법진스님의 원력이 어우러져 마침내 3년 공사끝 2004년 4월 회향의 기쁨을 나눴다. 또 2005년엔 대웅전 아래에 극락전을 짓고 신도들의 신행활동을 도왔다.

▲ 2011년 새로이 중수 낙성한 산신각.

산신각 중수와 설법전 건립도 동시에 추진됐다. 한 차례 중수된 바 있는 산신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당우가 쇠락돼 2011년 4월 다시금 중수 낙성식을 갖게 된다. 아래쪽으론 설법전을 지탱할 목재가 골격을 이루어 갔다. 지금은 단청만 남겨놓은 채 완공된 모습으로 신도들을 맞고 있다. 1층엔 종무소와 도서관, 그리고 대중공양간이 들어섰다. 도서관은 3면 벽면이 각종 불교도서로 꽉 채워져 있다. 평소 주지 법진스님이 소장하고 있던 불서들이 대부분이다. 2층은 설법전으로 평소엔 템플스테이 연수공간과 차담(茶談) 휴게소로 이용되고 있다. 선학원 부설 한국불교선리연구원이 상 하반기로 나누어 개최하는 학술발표회가 재작년부터 이곳 설법전에서 치러지고 있다. 참석자들은 도심 속 사찰이면서도 깊은 계곡 고찰이란 착각이 들 정도로 친숙함을 느낀다고 설법전에 대한 느낌을 전한다.

▲ 설법전.

설법전과 대웅전 사이에 놓인 양쪽의 5층 석탑이 눈길을 끈다. 쌍둥이는 아니지만 둘 다 일명 ‘정법사5층석탑’으로 불린다. 조선시대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정법사 주위로 독일 대사관 등 각국 대사관저가 밀집돼 있다. 정법사는 이러한 환경적 요인을 살려 주한 외국인 가족을 상대로 한 템플스테이 및 음악회 등 문화행사를 정례적으로 실시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필요시설을 더 확충해 나가는 한편 다양한 프로그램 만들기에 골몰하고 있다. 여건이 마련되면 가급적 빠른 시일내 정착시킬 복안이다.

건봉사 염불만일회의 법맥을 잇고 있는 정법사는 선과 교 그리고 염불 등 삼문(三門)수행의 요람으로 역할하고 있다. 여기에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문화행사가 정착될 경우 정법사는 삼문수행요람에 더해 출 재가의 수행과 도심포교사찰로서의 기능을 갖추는 정혜쌍수(定慧雙修)종합도량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종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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