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출가를 해서 행자생활을 마치고 조계종을 대표하는 율사 해인사 일타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한 건 1979년이다. 1982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대영스님을 은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 평생 불법만 갈구하며 용맹정진한 인욕보살 대영스님.
이 말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내가 대영스님은 모신 시간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출가 후 1년여를 모셨을 뿐, 연세가 많으셨던 은사스님은 사바세계에 오래 머물지 않으시고 훌쩍 내 곁을 떠나셨다.

내가 스님을 마음으로 기억하는 것은 스님의 당부를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영스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내 손을 꼭 붙잡고 “정덕 자네에게 문중을 부탁하네”하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권속들을 부탁하신다며 손을 다독였던 그 순간을 가슴에 담고 나는 평생 스님의 유지를 실천하며 살아왔다.

감자를 좋아하셨던 스님은 공양도 삶은 감자를 잘 드시곤 했다. 스님을 모시던 1년여 동안 정말 열심히 시봉했다. 마치 내 부모를 모시는 것처럼 그렇게 효도를 했다. 스님을 더 오래 모시지 못해 마음이 아프지만 그 또한 부처님 인연인 것을 어찌하랴.

능인선원 지광스님은 사형과 함께 대영스님의 마지막을 모신 스님이다. 마치 당신 은사에 비할 바 없이 대영스님을 살뜰하게 챙겼다. 지금도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북한산 국녕사를 대영스님에게 물려받은 지광스님은 쇄락했던 국녕사를 번듯하게 일으키도록 불사를 다 해냈다. 그 또한 은사스님의 복이 아니었을까.

스님과 함께한 시간이 짧았던 만큼 은사스님의 행적을 더듬어 보는 것으로 다시 한 번 대영스님을 기려볼까 한다.

대영스님은 일제강점기 격동의 세월을 사신 분이다. 1903년 수원성 근처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스님은 1921년 열 아홉의 나이로 설악산 신흥사의 한 말사에서 출가를 했다. 은사 태주스님과 함께 마곡사로 수행처를 옮긴 대영스님은 본격적인 구도의 도정에 올랐다.

당시 불교계는 ‘북 오대산에 방한암이 있고, 남 덕숭산에 송만공이 있다’고 회자 되던 때다. 당시 강원교육은 비구를 중심대상으로 시행되던 시대였다. 비구니들은 비구강원이나 비구강사를 찾아가 개별적인 교육을 받는 정도였다고 스님은 말씀해주곤 하셨다.

선학원 설립조사이기도 한 만공스님께서는 1916년 수덕사 견성암에 최초의 비구니 선원을 세우셨다. 구도 열정에 가득 차 있던 대영스님 역시 1922년 수행처를 견성암으로 옮기셨다. 만공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니 그 때가 스무 살이 되던 해였다.

견성암에서 수행하면서 스님은 자진해서 후원소임을 보셨다. 또한 예불 참회 수행에 한 치의 게으름도 없었다. 만공스님께서는 모범적으로 사셨던 우리 은사스님을 눈 여겨 보셨던 것 같다. 소임을 성실하게 마친 공로로 논 6마지기를 주신 것을 보면. 하지만 대영스님은 이 또한 선방대중의 공양을 위해 선뜻 내놓으셨다.

대영스님이 견성암에서 수행하신 건 15년. 인욕수행을 마친 대영스님은 1937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을 시작으로 묘향산 오대산 설악산 태백산 지리산 등 명산대천의 수행처를 찾아 운수행각을 시작했다.

스님은 금강산 비로봉에서 대중을 외호하는 공양주가 되겠다는 원력을 세웠노라고 종종 말씀해주셨다. 그 때문이었을까? 견성암에서 공양주 3년, 채공 4년을 사시면서 대중공양이 제대로 제공되지 못하면 당신의 밥을 받아두었다가 모시던 두 노스님께 드리고 당신은 물로 배를 채우셨다고 한다.

만공스님이 열반하시기 바로 전인 1946년, 스님의 부름으로 견성암으로 돌아와 3년간 원주소임을 맡으신 적이 있다. 당시는 지금처럼 교통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스님은 수행 정진하는 대중을 외호하고자 홍성 장까지 걸어서 장을 봐 왔다고 후학들이 전한다. 어찌 이런 스님의 모습을 전해 들으며 스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스님께서 대중 외호만 하신 것은 아니다. 각종 소임을 살면서도 스님은 늘 치열하게 수행했다. 수선안거와 3년 결사로 뼈를 깎는 용맹정진을 해온 대영스님. 평생을 행주좌와 어묵동정으로 화두를 놓지 않으셨다.

스님의 구도행은 전국 납자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당신의 수행이 익어가면서 대영스님은 후학양성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견성암과 서울 청룡사에서 각각 10년씩 입승 소임을 보며 후학들에게 따끔한 경책을 주셨다. “근기에 따라 참선하라, 기도하고 참회하라” 등 스님은 늘 공부의 진면목을 일깨워주시고는 했다.
방한암스님은 어느 날 대영스님을 불러 “불이란 깨달음이니 마음을 보고 마음인 줄 깨달은 것이 불이며, 그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미한 것은 중생이다. 모든 유위법은 몽환과 같음이요, 깨닫는 법은 무위에 있다”고 칭찬하시며 당호를 ‘무위(無爲)’라 지어주셨다. 당호와 함께 한암스님은 전법게도 전해주셨다는데 아쉽게도 이 전법게는 소실되었다.

▲ 1984년 범어사에서 찍은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이 대영스님.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덕스님.

평생을 수선안거와 결사정진 하며 후학들을 지도했던 대영스님이 한평생 참구했던 화두는 바로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가 돌아가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다.

한암스님과 더불어 당대 한국불교계를 대표하던 선지식 만공스님도 대영스님의 공부 깊이를 인정하셨다. 열반 직전에 전법게와 혜일이라는 법호를 내리시면서 전법의 징표로 주장자와 발우를 함께 전하셨다. 평소 사용하시던 그 발우는 둘째 상좌 쾌성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대구 염화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주장자는 맏 손상좌인 경산스님이 주지로 있는 부산 덕운사에 있다. 한암스님의 전법게처럼 만공스님의 전법게 또한 소실되어서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스님은 일생동안 어떤 어려움과 불편함에도 화를 내신 적이 없다. 묵묵하게 불법만을 갈구하며 살아오신 정진보살이요, 인욕보살이시다.

맏상좌 정원스님(양산 관음정사 주지)과 쾌성스님에 따르면 은사스님은 그 효성이 하늘을 뚫을 정도로 지극하셨던 분이다. 노스님 세 분을 모시고 살았는데 세 분의 간병을 한 것만도 10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태산준령을 넘어 탁발을 하며 시봉했는데도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으셨다고 한다. 인욕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가능하기나 했을까.

그렇게 일생을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본분 가풍을 안고 용맹정진하며 당신이 받은 당호처럼 무위의 삶을 사셨던 대영스님. 1985년 음력 정월 27일. 몸을 정갈하게 씻은 은사스님은 저년공양을 마치고서 대중을 모이게 했다.

평상시처럼 스님은 대중에게 “분별심을 내지 말라”는 요지의 법문을 내리신 후 “나 오늘 일찍 잘란다” 하시며 방에 드셨다. 그 길이 적정열반의 길이었음을 대중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밤, 나와 손상좌 경산스님의 손을 붙잡고 스님께서 다독이셨던 말씀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더 오래 모시지 못한 회한은 아직도 남아있다.

▲ 인과선원 주지 정덕스님.
스님은 입적하시던 그 전날까지도 단 하루도 새벽 예불을 거른 적이 없던 분이다. 한 방에서 대영스님을 모시던 손상좌 헤어스님 보다 늘 일찍 일어나 정진하고 계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스님께서 기침하지 않아, 피곤하신 거라 여긴 헤어스님은 스님의 이불을 다독여 드리고는 불도 켜지 않고 방을 나와 새벽 예불을 올렸다.

새벽 예불을 올리고 내려오니 대영스님의 방에서 빛이 환하게 나오고 있었다. 평소 불빛과는 달라 신기해하며 방으로 들어가니 그 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미 스님은 입적하신 후였던 것이다. 맏상좌 정원스님은 그 빛을 ‘방광’이라고 알려주셨다. 스님이 가는 듯 오는 듯 소리 없이 세속의 인연을 마감하시면서 마지막으로 깨달음의 빛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가신 것이다. 이렇듯 나를 밝히고 세상을 밝히며 정진해 깨달으라고.

늘 검소하셨던 자비보살 대영스님. 은사스님을 닮았다는 말이 지금도 내게는 가장 큰 칭찬이다. 불교상담개발원에서 중책을 맡아 불교상담대학원대학 건립을 추진하면서 은사스님을 떠올린다. 스님처럼 자비롭게 인욕정진하며 아직 못 다 이룬 원력을 다 이루고 가기를 부처님 전에 빈다.

정덕스님-인과선원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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