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탄스님을 신년특집 지면에 모시기란 쉽지 않았다. 어렵게 연결된 전화에서 스님은 “다른 훌륭한 스님 모셔. 난 얘기해 줄 사람이 못돼.” 한사코 거절하셨다. ‘구도정진’ ‘종비생 1기’ ‘정화 6비구’. 모두 월탄스님을 상징하는 수식어다. 과거 승가의 변절과 타락을 정화의 물줄기로 극복해 온 한국불교 현대사. 특히 정화의 깃발을 앞세우고 대법원장 앞에서 할복을 기도한 6비구 중 생존해 계신 단 한 분으로서 월탄스님을 빼놓곤 얘기할 수 없다. 기자의 간곡한 청탁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던지 스님은 19일 계단위원회 회의가 있어 총무원에 올라간다고 했다.

이날 오후 2시 30분 총무원 4층 대회의실을 나서는 스님을 안국동 선학원으로 모셨다. 스님은 선학원 전경을 보고 “감개가 무량하다”는 말씀을 연발했다. 전국비구승대표자 대회가 열리던 1954년 8월 24일을 전후로 역사적인 한국불교 정화운동이 전개됐고 그 역사의 한 페이지에 스님의 이름이 자리한다. 당시 스님의 열정과 의지가 선학원에서 농익었다. 중앙선원 3층 법당에서 스님은 불전에 삼배를 마친 뒤 선학원 설립 조사들의 진영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잠시 눈 주위가 붉게 물들기도 했다.

중앙선원 2층 접견실에서 스님의 말씀이 본격 이어졌다.

▲ 월탄스님은 정화정신을 되살려 승가위의를 회복해야 한다며 과거 정화와 관련된 일화들을 소개했다.

“이곳을 와보니 옛날 생각이 막 떠올라. 정화불교운동이 거세게 전개되던 1955년 불문에 귀의한 이후 선학원에서 큰스님들을 모두 친견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지.”

스님은 선학원이 한국불교에서 다시금 위상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학원은 말 그대로 민족불교의 성지이자 정화불교의 산실이야. 언론에서 한국불교의 정화사를 집중 조명했으면 해. 선학원이 따지고 보면 조계종을 태동시킨 어머닌데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근본정화이념을 새로 살려내야 해.”

정화의 역사에 대해선 젊은 학인들도 관심이 깊다고 스님은 증언한다.

“현 교육원장 현응스님이 해인사 주지할 때 학인들을 위해 강의해 달라는 청탁이 들어왔어요. 그래 학인들을 상대로 정화에 대해서 말해줬더니 반응이 아주 좋아. 이후에 동국대 불교대, 중앙승가대에서도 정화사를 주제로 4시간 동안 풀타임 강의했어. 학생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 내친 김에 동국대 경주캠퍼스에서도 자리를 펴봤고. 특히 운문사 청암사 동학사 등 비구니 학인 6~700명이 모인 자리에서 정화를 말하는데, 그야말로 피나는 정화의 역사와 현장을 말하니까 울어. 비구니 학인들이 강의를 들으면서 울더라니까.”

역대 선배스님들이 이뤄놓은 정화의 역사.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후배들에 의해 흐트러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동안거 결제 들어갔잖아요. 법주사 선방에 앉아 있는데 이번에 24~5명 수좌들이 결제에 들었어. 그런데 한결 같이 24~5명 모두가 차를 가지고 오는 거야. 과거 우리는 걸망 메고 걸어 다녔거든. 전혀 다른 수행관념이고 수행문화지. 그렇지만 아무리 현대적 수행관념이라고 해도 물질에 집착하지 말라는 비구정신에 비추어 봤을 때 바람직한 것은 아니야. 세속적 물질에 의탁하게 되면 작년 백양사 도박 사건처럼 세상의 지탄을 받게 돼 있어. 부끄러운 일을 자초하게 된다는 말이지. 한 마디로 정화이념이 소멸되므로 그 옛날 순수하고 소박했던 계율정신과 가풍이 물질주의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있는 거지. 따라서 선학원이 오늘날 이 부끄러운 승가의 자화상을 지우는데 역할을 해야 돼. 이러한 내 뜻은 과거 선학원 이사장을 지낸 범행스님에게도 전했었고 정일스님에게도 밝혔어. 정일스님은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은데 출가는 늦게 했지. 대처불교를 척결한 선학원의 저력이 또 필요한 때야.”

스님은 자신이 어떻게 정화불사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출가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회상했다.

“내 출가 전 고향이 전북 장수야. 옛말에 10년 공부하면 도통한다고 했는데 중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1학년을 다니는데도 진척이 없어. 그러니 도서기 군서기 하기도 힘들었지. 이래 가지곤 안 되겠다 싶어 1955년 여름 어느 날 책을 트럭에 싣고 화엄사로 갔어. 화엄사는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서 알게 됐지. 거기에서 사형이 되는 월국스님을 봤어. 황해도에서 피난 와 승려가 되었고 화엄사에선 지객(知客 절에 찾아오는 손님 안내 담당)일을 맡고 있었지. 키가 훌쩍 크고 걸음걸이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의젓해. 스님을 처음 보는데 마치 거룩한 신선 보는 것 같아. 방을 얻어 공부하는데 사명대사 서산대사 책을 갖다 주는 거야. 이 책들이 나의 발심을 크게 자극했어. 그러다 하안거 해젯날 금오스님이 법문을 육두문자로 하는데 기가 막혀. ‘이 세상 놈들은 모두 산 송장들이다. 왜 그런가? 자기가 자기를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자기를 만드는 것이 마음인데 마음을 모르고 육체를 자기로 알고 살아가니 송장이다. 일체유심조를 알라. 마음이 우주를 만들고 우주의 섭리를 주재한다.’ 이 법문에 감명을 받고 감격했어.”

출가하겠다는 뜻을 금오스님에게 밝히자 늦은 가을 추위로 국방색 잠바를 입고 몸을 잔뜩 움츠린 모습에 금오스님은 “병자는 출가대장부가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에 스님은 속가에 있을 때 태권도 사범을 지냈다며 호기를 부렸고 이 기개에 금오스님이 “그래, 그럼 중노릇 해봐라”고 출가를 허락했다.    

이후부터 스님의 구도정진이 시작됐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 도량석 돌고, 예불하고, 다섯 시에 밥 짓고, 여섯 시에 공양하고, 설거지 끝나면 산에 올라 가 나무 두 짐해 부려 놓고, 사시공양 올리고, 오후엔 또 나무 뽀개고,  이러길 1년을 넘겼어. 그러면서도 은사스님이 내려 준 화두 공부를 챙겼지. 나에게 준 화두는 이랬어. 오유일물(吾有一物)하니 무두무미(無頭無尾)하고 무명무자(無名無字)하며 상주천하주지(上柱天下柱地)하고 명여일흑사칠(明如日黑似漆)이라.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수불득자(收不得者) 시심마(是甚?)오.”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이름도 없고 글도 없으며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지탱한다. 밝기가 대낮같고 어둡기도 칠통이라. 항상 움직이는 가운데 얻고자 하나 얻지 못하는 이것이 무엇인고란 뜻이다. 스님은 몸만 힘들 뿐 공부에 진척이 없자 화엄사에서 실상사로 도망쳤다. 실상사엔 당시 호암 큰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제가 수좌기질로 살기 위해 도망왔습니다 하니 ‘너에게 꼭 맞을 것’이라며 상무주암을 소개하데. 금오스님을 따르고 존경하던 월인(月印)스님이 추천을 했어. 걸어 올라가 보니 기가 막히게 좋아. 방 한 칸 부엌 한 칸에 조그만 부처님이 봉안돼 있는 띠집이었어. 1천6백 고지에 자리해 노고산 반야봉 천왕봉이 병풍처럼 펼쳐져 시야에 들어오는 곳이지. 천하의 절경이 아닐 수가 없어. 여기에서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깨쳤다는 거야. 마침 암자가 또 비어 있어. 당시 절집에서 최고 미남으로 꼽히던 수진스님이 살고 있었대. 수진스님은 인곡스님 상좌로 선학원에도 자주 찾았던 스님이야. 이 스님만 오면 먹을 것이 풍성해. 신도들이 스님만 나타났다는 소리를 들으면 이것 저것 싸서 갖다 준다는 거야. 하여튼 암자 바위 밑에 물이 졸졸 흘러 나오고, 상추는 심어져 있는데 부엌엔 간장 된장 딱 두 개뿐이야. 그런데 쌀이 없어. 속가로 내려가 부유하게 살고 있던 먼 친척을 만나 쌀 3가마니를 얻어 지고 올라갔어. 이 쌀 다 먹을 때까지 도를 얻지 못하면 죽겠다는 각오로 정진에 들어갔어.”

스님은 정진하기 위해선 마장을 물리쳐야 한다는 주위의 조언에 따라 기도정진을 먼저 했다.

“기도를 3X7일 하는데 천수경 독송 마치면 석가모니불 정근을 두 시간 했어. 지혜를 증득해야 한다고 해서 문수보살 정근을 두 시간 하고 또 실천이 중요하니 보현보살 정근을 두 시간 하고, 자비심을 유지해야지 관세음 보살 정근도 두 시간 하고 지장보살 정근도 두 시간하고, 그러니 잠을 겨우 두 시간 밖에 못 잤어.”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큰 깨침을 경험하게 된다.  

“초봄 산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 서로 울어대는 거야. 물줄기를 따라서 개구리들이 울어대는데 어찌나 시끄러운지 막대기로 휘저어 다니며 개구리 울음을 막으려 했어. 그렇지만 막대기 휘두를 때만 잠시 울고 울고 또 울어대고. 그 순간 깨달음이 있었어. ‘개구리가 우는 게 아니라 내가 울고 있구나.’ 내가 마음을 잡고 놓는데 따라 번뇌가 되기도 하고 순일함이 되기도 하는구나를 알게 됐지. 이렇게 마음을 먹게 되니까 개구리 소리가 안들려. 비로소 원효성사 오도송의 뜻을 간파했어.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이요 심멸즉 감분불이(心滅則 龕墳不二)라. 마음이 일어나니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닫집과 무덤이 다르지 않네란 뜻인데 옛날 애가 죽으면 버려진 두개골의 물을 먹고 크게 깨친 원효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접었잖아요? 이 얘기는 ≪금광명경≫에도 나오는 말씀인데 ‘모든 만물의 실체인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우주조화의 주체로 활약할 수 있다’는 의미와 상통해. 이 일을 겪은 직후 쌀 세 가마니를 도로 지고 내려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줬어.”

마음공부에서 큰 진척을 이룬 스님은 교학에도 목말라했다.

“이후 해인사 강원에 들어갔어. 내전을 익히며 하루하루 청강하는 재미에 푹 빠져 살기도 했지.”

이러던 중 불교계는 비구와 대처승간 수행공간 확보 문제로 갈등을 빚게 되었고 때 마침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가 비구승들에겐 정화운동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대처측이 점령하고 있던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 맞서 안국동 선학원이 정화의 횃불을 태우는 비구승 거점이 되었다. 월탄스님은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가 왜 나오는지 그 배경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승만씨는 어머니가 삼각산 문수사에서 기도해서 낳았대. 젊은 시절 독립운동 하다가 문수사로 도망갔는데 당시 주지가 꼭꼭 숨겨주었고, 나중에 대통령이 되어 문수사를 찾았는데 빨래줄에 애기 기저귀에 여자 속옷들까지 널려 있는 걸 보고 실망했다는 거야. 또 인연이 있는 돈암동 신흥사는 기생들 놀이터로 변해 있었고…, 당시 비구 보경스님이 주지로 있던 경국사는 안정된 도량배치하며 자연 경관이 그대로 조화를 이뤄 누가 봐도 이런 게 딱 수행공간이구나 할 정도로 잘 다듬어져 있었고. 왜색화된 불교의 현실을 그래서 알게 된거다 이거야.”

스님은 금오스님이 포함된 비구측 5대표와 이승만 대통령과의 만남을 이렇게 전했다.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비구측 5인 대표인 우리 은사스님과 효봉스님, 청담스님, 월하스님, 원허스님을 경무대로 불러 말했대. ‘내가 도와줄테니 원래대로 한국 정통불교로 돌아가시라’ 이 말에 힘을 얻은 비구측이 태고사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갔던 거지.”

당시 비구측이 내세운 비구승 8대 원칙은 이랬다. 첫째, 독신일 것. 둘째, 삭발염의할 것. 셋째, 비불구자. 넷째, 백치가 아닌 자. 다섯째, 살도음망을 하지 않는 자.(4바라이를 범하지 않은 자)  여섯째, 불주육초.(술과 담배와 고기를 먹지 않는 자) 일곱째, 승려 3인 이상과 단체생활을 하는 자. 여덟째, 25세 이상인 자.(비구계를 받고 3년을 넘긴 자) 이 8대원칙은 대처승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결국 법정투쟁을 부르는 결과를 낳는다. 소송과 함께 태고사 등 전국의 주요사찰이 다시금 뺏고 뺏기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졌다. 비구측은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비구 대처 각 5인씩 참여해 문교부 중재로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내용을 무효라고 주장하는 소송이 1심에서 대처측이 이겼고 2심에서는 비구측이 승소했어. 그런데 대처승 가족들이 정관계 요로에 있다 보니 대법원 판결에서 불리할 거라는 정보가 입수된거지. 1960년 11월 24일 재판을 앞두고 17일 19일 잇따라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됐어. 난 그때 해인사에서 감평(소작인들의 한 해 절 땅 농사 평가작업)을 마치고 ‘도지를 얼마 내라’ 하고 있는데 총무로 있던 영암스님이 오라고 하대. ‘서울에서 난리가 났다. 다녀오너라’ 하는거야. 상경해 보니 젊은 수좌들이 단식 투쟁중이고 그 와중에 수덕사 방장을 지내신 원담스님이 젊은이를 모아놓고 연설을 하신거야. 고려 대각국사가 이차돈 성사 묘소 참배시 읊은 시를 들려 주는거야. 천리만래문사인(千里萬來問舍人) 청산적적기경춘(靑山寂寂幾經春) 약봉말세난행법(若逢末世難行法) 아역여군불석신(我亦如君不惜身)이라. 남쪽 천 리길을 걸어와 성사께 문안드리네. 청산 적적한데 세월 몇 해나 지났습니까? 말세에 난법을 만나게 되면 나 또한 성사를 따라 신명을 아끼지 않겠나니. 이어서 청담스님께서 할을 토해내셔. ‘금생에 승단을 바로잡아 놓지 않으면 어찌 부처님을 뵐 것인가?’ 그리곤 순교단을 모집하는데 생각했어. ‘생사해탈 했다면서 주저할 일이 무엇인가?’ 정법불교를 지키지 못하면 천추만대에 지옥을 면치 못한다는 생각으로 기념회관 지대방에 모였지.”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는 당시 12명의 순교지원자 명단을 싣고 있다. 장정월(張精月) 김효림(金曉林) 문성각(文性覺) 김도헌(金道憲) 김지족(金知足) 정성우(鄭性愚) 유월탄(柳月誕) 이마가(李摩訶) 춘추 박효성(春秋 朴孝性) 권진정(權眞靜) 이도명(李道明) 신정래(申正來). 이들은 대법원이 대처측의 손을 들어줄 경우 순교하겠다고 결의했다.

▲ 선학원 건물 앞에 선 월탄스님.

“대법원에 가서 죽자는 각오로 판결있기 전 날 화신백화점에 가서 길이 30센티미터 크기의 일본도를 샀지. 또 새까만 작업복과 털모자도 사고 거사를 위한 준비를 마쳤어.”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던 시대적 상황에서 대법원 판결은 우려했던 대로였다. 대법원은 고법의 판결을 파기환송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대법원이 그땐 덕수궁 뒤에 있었어. 기마병이 순찰을 돌며 위압감을 주었고 경비 또한 삼엄했어. 우린 승복대신 일본도를 안주머니에 숨긴 새까만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대법원으로 향했어. 그런데 이상하게 누구도 우릴 검문을 안해. 대법원장실로 뛰어들어 갔어. 털모자를 벗고 신분을 밝히며 말했지. ‘우린 비구승입니다. 우리 불법에 대처승은 없습니다. 어찌 사회법으로 불법을 판단하려 합니까? 이에 죽음으로 호소하러 왔습니다.’ 그리곤 안에서 칼을 꺼내 배를 그었지. 살짝 스쳐만 가대.(웃음) 2차로 또 그었어. 한 10센티미터나 됐나. (생사해탈 했다는 놈이 비겁하게스리) 오기가 생기대. 3차로 그었어. 45센티미터가 나가고 배에서 창자가 쏟아지는 걸 봤지. 그 순간 검은 옷의 제복 순경이 달려와 곤봉으로 머리를 가격했고 정신을 잃었어.”

대법원장엔 인솔자 숭산스님도 들어가지 못했다. 최종 결행자는 6명. 월탄스님과 성각스님, 진정스님, 도명스님, 도헌스님, 성우스님이었다.

“우리가 순교했다는 소문이 조계사 일대에 쫙 퍼졌어. 이 소문이 단식중이던 수좌들한테도 전해지고 수 백명이 대법원으로 몰려와 접전이 벌어졌어. 이 일로 할복 6비구를 비롯한 24명의 수좌들이 수감돼 7~8개월 살다 나왔어. 그 증언을 해 준이가 대법원장실에 앉아있던 대법관이었어. 당시 고재호 대법원장은 자리를 피해 있었고 대신 다른 이가 있었는데 그 이가 증언하길 ‘(대법원장실에 뛰어 든 스님들이)위협하거나 소리 지르거나 하는 소동이 없었다. 자신들의 주장을 조리있게 전개했다. (할복한 행동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는 요지였는데 법원 판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스님은 이처럼 목숨을 내걸고 만들어 낸 정통종단이 더 이상 타락하지 않기를 바랬다.

“종헌종법 몇 개 고친다고 종단과 승단이 정화되지 않아. 정화 60년, 우린 어디에 서 있느냐 반문했을 때 시대 탓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반성없이 구호로만 나아가선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해. 조계종 승려라면 최소한 한 달 이상 두문불출하고 냉정하게 참회하는 기간을 가져야 해. 대신에 누구의 잘 잘못이냐 따지지 말고 과거를 묻지 말고 새로이 태어나자는 거지. 최근 승가의 범계는 열심히 수행정진하는 제방 스님들에게 누를 끼친 일이야. 우리의 개혁은 종헌과 제도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수행으로 바꾸어야 해. 그렇기 때문에 새로이 태어나기 위한 점검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선 안 돼.”

계율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도 스님은 간과하지 않는다. 반면 시대의 정신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승려는 비구야. 비구는 거지라는 뜻이고. 걸사로서 5계를 지키고 십선계를 지키며 보살계를 실천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 과거엔 수행하는 일을 으뜸으로 쳤다면 오늘날엔 하화중생의 회향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 과거 불교가 수행에 역점을 두고 있을 때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교육 복지 등 베푸는 사업을 벌였단 말이야. 이게 국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배경이지. 그런데도 아직 이런 시대정신을 못 읽는 비구들이 많아. 내가 통도사에서 결제를 나고 있을 때야. 주지를 정우스님(현 군종교구단장)이 하고 있었어. 그때 서해에 유조선이 난파돼 기름띠로 주민들이 엄청 고생을 하고 있었어. 주지 정우스님이 ‘정진기간이지만 우리가 가서 기름띠를 없애는데 힘을 합칩시다’고 제안을 했어. 아, 근데 수좌들이 반대를 하는거야. ‘결제기간에는 부모가 죽어도 안 나가는 법’이라면서. 내가 호통을 치며 나섰지. ‘네가 밥먹고 옷입고 이렇게 수행하고 만행할 수 있게 해 주는게 누구냐? 국민이다. 국민이 지금 고통받고 있는데 그 고통을 몰라라 하고 정진하자고. 이놈이 제대로 된 정신인가?’ 하니 대중들이 박수를 치더라고.”

스님은 갑오년 새해를 맞아 불자들에게 건네는 덕담도 잊지 않았다.

“모든 불자들이여! 행복은 오욕락에 있지 않다. 행복은 그대들 맘 속에 들어 있다. 어떠한 사태와 역경을 마주 하더라도 마음을 자재로이 쓴다면 관세음 보살의 자비와 지장보살의 원력을 모두 얻을 수 있다. 모든 고통과 역경은 내가 내 마음 안에 만드는 것이다. 내 마음, 어떻게 생겼는가? 관찰하라.”

정리=김종만 기자

월탄스님 이력

1937년 전북 장수군 오수면에서 태어난 스님은 1955년 금오스님을 은사로 화엄사에서 사미계를, 1960년 해인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68년 동국대 불교대를 졸업하고 1973년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조계종 4~6대, 8~10대 종회의원을 지냈으며 8대 종회의장을 역임했다. 조계사 전등사 법주사 주지, 동국대 승가총동문회장, 불교발전연구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총무원 총무부장과 불교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상무주암 수도암 무명암 상원사 등에서 30안거 이상을 성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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