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충남의 한 사찰에서 개산대재가 열리던 날, 한 노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고 계셨다. 몇몇 스님들이 다급히 뛰어가더니 행사장 정 중앙의 자리에 스님을 모셨다. 당시 스님 얼굴을 몰랐던 필자는 시자도 없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행색의 스님인데 왜 이리 부산을 떠는지 궁금했다. 지인에게 물었다. “누구세요?” “석주 큰스님이셔요.”

2002년 1월. 불교신문에 ‘건강’ 지면이 신설되자, “연세 많은 스님의 건강법을 한번 취재해 보자”고 제안해 석주 스님의 건강비법을 살펴보기로 했다. 당시 스님은 94세였지만 백두산을 오르고, 10시간 남짓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서도 법문할 정도로 정정하셨다.
취재방식은 하루 동안 스님을 시봉하면서 옆에서 생활을 지켜보는 것. “스님, 하루 동안 스님 옆에 있으면서 스님의 건강법에 대해 알아보고 싶습니다.” 어렵게 전화를 드렸는데 수화기 너머 답은 간단했다. “오세요.”
새벽 3시, 집을 나섰다. 절에 들어서니 예불시간이 10여분 남아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니 범종소리가 울린다. 2층에 있는 스님의 방에 불이 켜졌다. 법당에 들어서자 가사, 장삼을 정갈하게 입은 석주 스님이 중앙에 자리를 하고 있었다.
겨울날 새벽예불은 곤혹이 아닐 수 없다. 밤의 기온을 머금은 마룻바닥에 서 있자면 발이 시리도록 차갑고, 예불을 올릴 때마다 입에서는 김이 한 사발씩 쏟아진다. 웬만한 사찰에선 예불과 반야심경을 하고 아침예불을 마치건만, 천수경에 정근까지 한다. ‘왜 이 취재를 하자고 했을까’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질 때쯤에서야 스님은 법당을 나섰다.
“스님, 안직수 기자입니다.” 천천히 필자를 바라보는 스님의 눈길이 기억에서 잊혔던 오래전 할아버지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올라오세요.” 스님의 방사는 아늑했다. 스님이 벽장을 열더니 상자를 하나 꺼내 내미신다. “아직 공양시간이 남았느니, 좀 드세요.” 그 속엔 엿이 들어 있었다.
스님은 아침뉴스를 듣고, 조간신문을 보셨다. 6시30분이 되자 아침상이 올라왔다. 언제 사중에 필자 이야기를 해놨는지, 밥공기가 두 개다. 김치 3쪽, 물김치, 콩자반, 김, 양배추, 그리고 사과 1/4쪽. 죽 한 그릇으로 아침을 드셨다.
아침에 종단의 어른 스님 두 분이 스님을 찾아왔다. “저 나가 있을까요?” 스님께 물으니 “그냥 있어요.” 말씀하셨다. 스님들께는 “신도 아들인데 며칠 내 시자 좀 하라고 데리고 왔다”고 필자를 소개했다. 찻물 심부름을 하고, 화분에 분무기로 물도 뿌려주고. 그렇게 오전 시간이 지났다.
“저기 벽장에 이것저것 있으니 먹고 싶으면 꺼내 먹어.” 스님은 새벽에 ‘엿상자’를 꺼내줬던 벽장을 가리켰다. 벽장 속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던 차에 문을 열어보니 선물로 들어온 양말에서 과자, 사탕, 수삼 등이 가득했다.
“스님, 뭐가 이리 많아요?” “내가 충청도에 절하나 지어서 노인 분들을 좀 모셨어. 가끔 내려갈 때 갖다 주느냐고 모아둔 거야. 먹어도 돼.” 당시 필자는 20대 후반의 나이였다. 노스님의 눈에는 필자가 한없이 어린 손자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꽃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꽃도 생명이 있어, 좋은 마음으로 물을 줄때와 그냥 물을 줄때 꽃이 자라는 것이 달라진다.”
언젠가 석주 스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종단의 스님들에게 계율을 주는 전계대화상으로 계셨는데, 건강이 안 좋아 제주도에 요양하러 내려갔다가 한 신도가 “건강에 좋다”며 준 전복죽을 드신 일이 있었단다. 이후 스님은 “계를 어겼으니 전계할 수 없다”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계대화상을 그만 두셨다는 이야기였다.
“스님, 저 글씨 하나 써 주세요.” “내가 요즘 기운이 좀 딸려. 왜 필요한데?” “실은 불교단체가 창립되는데 현판에 스님 글씨 새겨 넣으면 어떨까 생각이 들어서 한번 여쭌 거예요.”
그 말을 듣더니 스님은 대뜸 컵을 주면서 물을 받아 오란다. “먹 좀 갈아.” 먹을 가는 동안 스님은 붓에 물을 묻혀가며 글씨 연습을 하신다. 한편에 쌓아 둔 신문지에 물로 글씨를 쓰기를 한참. 먹이 다 갈아지자 화선지를 꺼냈다.
“현판은 한글로 써야 한명이라도 더 읽을 수 있어.” 글씨를 다 쓰고 나서 보더니 마음에 안 드는지 다른 화선지를 꺼냈다. “스님 나중에 쓰시고 공양하십시오.” 비구니 스님이 저녁공양을 차려놓고 “국과 밥이 식는다”며 필자를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거기 둬.” 날카로운 한마디가 돌아왔다.
흔히 말하는 ‘매몰찬 말’이란 것이 저런 말일까? 스님은 남에게는 인자하지만, 자신에게는 철저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글을 다 쓰고 나서 스님은 둘을 비교하더니 한 글자 한 글자 짚어 주셨다. “현판이라 그랬지? 그럼 별 상관없으니 이 글자랑 이 글자는 이쪽 걸로 . 잘 오려서 쓰면 될 거야.”
포교하는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시는 스님이다. 불교단체를 만든다는 말에 모든 것을 제쳐놓고 붓을 든 스님의 모습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저녁 예불을 마치고 9시 마감뉴스를 보시는 동안 이불을 정리했다. 뉴스가 끝나면 스님도 잠자리에 드신다. “다음에 오고 싶으면 또 와.” 하루시봉을 마치고 일주문을 나서는 필자에게 던진 스님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2년 뒤, 2004년 11월. 또 오시라더니 스님이 먼 길을 떠나셨다. 원적 소식을 듣던 날, 필자는 밤새 울었다.

안직수/불교신문 기자

이 글은 불교신문 안직수 기자의 2002년 1월 어느 하루 동안의 석주 큰스님 시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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