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적에 들기 전, “부처님 열반경이 임종게이거늘 어찌 임종게를 남기겠는가. 사리도 수습하지 마라”라고 하셨던 석주 큰스님. 4월 9일로 스님의 탄신 100년을 맞아,『크신 원력 수미산을 넘어』(석주 큰스님 문집간행위원회)의 글을 인용해 큰스님의 ‘숨겨진’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한글대장경 마쳐야 세상 하직하겠다”
“스님이 동국역경원 부원장직에 계셨을 때 10년 동안 지각이나 결근 한 번 안하고 출근했습니다. 스님 생신이라고 신도들이 보시한 돈을 전부 역경원 후원금으로 주시기도 했습니다.”(최철환 동국역경원 편집부장)
스님의 역경에 대한 원력은 남달랐다. 한글대장경이 완간될 수 있었던 것도 “한글대장경을 마쳐야 세상을 하직하겠다”는 스님의 원력 덕분이었다. 석주 스님은 사재를 털어 1961년 5월 현 동국역경원의 전신인 법보원을 설립했다. 『열반경』『법화경』『유마경』『육조단경』『현우경』『선가귀감』 등을 번역 출판했고, 『부모은중경』『목련경』『우란분경』은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스님의 역경불사 원력은 주석하던 칠보사 대웅전 현판을 손수 ‘큰법당’이라고 바꾼 데에서 엿볼 수 있다.

수행자다움에서 한치 벗어남 없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중 생활 잘하는 것이냐고 여쭈면 ‘아침 예불에 빠지지 않는 것과 아침 공양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침 예불에 빠지는 것은 그 전날 늦게 절에 들어오거나 딴 짓을 한 것이고, 아침 공양에 불참하는 것은 그 전날 저녁에 밖에 나가서 딴 것을 먹은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미국 미조리주 세인트루이스 불국사 주지 연암 스님)
석주 스님은 아흔이 넘은 최근까지도 조석 예불을 철저히 하고, 예불 끝에는 으레 좌선 정진을 하거나 108참회를 꼭 했다. 이후 스님은 빗자루를 들고 나와 도량을 쓸었다. 이러한 엄격함은 前 전국비구니회장 광우 스님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언젠가 진관사 주지 진관 스님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1975년에서 1976년 사이 비구, 비구니 이부승 계단이 구성될 때 일입니다. 그 때 계단에서 석주 스님을 존증아사리(證師)로 모시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말씀을 드리자 뜻밖에 단호히 거절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증사를 할 수 없소. 전복을 넣고 끓인 죽을 먹은 적이 있는데 내 어찌 증사를 할 수 있겠소.’ 언젠가 스님께서 제주도에 가신 적이 있는데 누가 전복죽을 끓여 공양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그 단 한 번의, 그것도 자신도 모르고 계율을 지키지 못한 일로 증사의 권유를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석주 스님은 특히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지만, 수행자가 그것을 버리지 못하면 수행에 곤궁해진다”며 식탐을 제일 무겁게 경계했었다.

일평생 ‘오유지족’의 삶 견지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있던 시절 어느 마을에 당도했을 때 해가 저물어 그 마을에서 묵게 됐습니다. 그래서 근처 절을 찾아 하루 묵기를 청했는데, 주지가 객실이 없다고 거절해서 마을에 가서 주무시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야 그 객승이 총무원장이라는 걸 알고는 그 주지가 찾아와서 참회를 하고 간 적도 있었습니다.”(서울 칠보사 주지 선근 스님)
일평생 ‘오유지족(吾唯知足, 오직 만족함을 안다)’의 삶을 견지한 석주 스님. 스님은 종종 화장실에 들어가면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속옷과 양말 빨래를 손수 했던 것이다. 또 석주 스님은 양말이나 속옷에 구멍이 나 새 것으로 바꾸려고 하면 불호령이 내렸다. 그리고 손수 구멍난 양말을 기웠다. 그렇게 해서 모은 옷이나 양말은 수해로 고통 받는 이재민들을 위해 내놓았다. 이불이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중앙승가대학에서 후진양성에 힘쓰는 사람들에게나 중앙승가대학 기숙사로 보내졌다.

시대와 더불어 호흡
석주 스님은 ‘산 속의 스승’만은 아니었다. 시대와 함께 숨쉬고 아파했다.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진관 스님은 “언젠가 만해 스님 후손이 있는 심우장에서 추모재를 올릴 때 조국을 위해 나투는 열사들의 정신을 우리 불교가 이어나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기억이 생생합니다”라고 회고했다.
또한 “1980년 광주 민중들의 죽임을 목격하면서 인권이 마비됐을 때 조국의 민주화에 나서는 정치인들에게 힘을 주셨다”며 “당시 종교인으로 불교에서는 석주 스님이, 개신교의 문익환 목사,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더불어 사회 민주화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스님의 이러한 생각은 노년에 접어들자 자연스럽게 노후복지 쪽으로 집중됐다. 아산 보문사에 ‘안양원’을 설립, 어려운 노인들과 스님들의 노후복지에 진력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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