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속제(俗諦), 그 진리와 망념의 경계

모든 부처님은 이제(二諦)에 의존하여 법을 설하시니, 첫째는 세속제(世俗諦)요, 둘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이제는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로 중관학의 중심개념입니다. 속제는 세속제, 혹은 세제(世諦), 진제는 제일의제, 또는 승의제(勝義諦)라고도 합니다. 나가르주나는 《중론(中論)》에서 “만약 이 두 가지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면 부처님의 심오한 진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속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얻을 수 없고,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에 들 수 없다”라고 합니다. 나가르주나의 단언과도 같이 이제를 분별하여 정확히 아는 것은 대승불교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관건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은 속제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당(唐)나라 때 단하(丹霞) 천연(天然)선사(禪師)가 혜림사(惠林寺)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때는 겨울밤, 추위를 참지 못한 스님 눈에 마침 목불이 띄었습니다. 그래서 도끼로 목불을 뽀개 불을 피웠지요. 이를 안 주지스님이 노발대발합니다. 그러자 천연스님은 아주 천연스럽게, “부처님을 태워 사리를 얻으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지스님이 다시,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다는 거요?”라고 하자, 천연스님, “그렇다면 저 두 목불도 태웁시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전등록(傳燈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대승불교의 공(空)을 직접 가르쳐주는 유명한 화두이지요. 주지의 어리석음과 천연스님의 초탈적 경지가 대비되며 통쾌함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볼까 합니다. 만약 단하 천연의 행위가 맞고, 주지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면, 불자들은 불상 앞에 경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해서도 안 되지요. 왜냐하면 불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목불은 뽀개 장작으로 쓰고, 금동불은 녹여 놋그릇을 만드는 게 옳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금 전국의 사찰에는 수능수험생을 둔 어머니들의 백일기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어머니들의 기도가 한갓 허망한 어리석음일까요?

속제와 진제 모두 부처님이 설하신 진리입니다. 당연히 속제는 비록 그 말에 세속성이 있다고 해도, 결코 허망이나 망념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다만 대상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법을 베푸신 것입니다. 속제는 세속인을, 진제는 보살이나 수행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대상에 따라 설법이 달라진 것일 뿐, 전혀 다른 두 개의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진리는 하나입니다. 바로 진속불이(眞俗不二), 중도의(中道義)이지요.

하지만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가르주나는 그 차이를 분별할 줄 알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과학적 지식, 혹은 과학적 진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과학적 진리란 과학적 탐구과정을 거쳐 검증된 진리를 말합니다. 과학적 탐구란 관찰과 실험을 말합니다. 대나무와 소나무를 관찰하고, 그 성분을 실험실로 가져와 분석하여, 각각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실체는 불교로 말하면 자성(自性)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은 대나무의 자성, 소나무의 자성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일체 존재는 자성이 없습니다. 무아론은 대승불교에서 연기성공(緣起性空)으로 전개되지요. 보살은 연기성공을 밝게 깨달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보살의 눈으로 보면 과학적 진리는 모두 허망이고 망령입니다.

하지만 세속의 관점에서 보면 다릅니다. 중세의 미신적 폭압과 몽매로부터 유럽인을 구한 것은 과학이었습니다. 근대과학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억압으로부터 인류를 구해주었습니다. 또한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질병과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과학은 시비선악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과학을 기능주의적 측면에서 보려는 게 아니라, 과학의 진리성이 결코 작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과학이 인류를 무지몽매와 미신적 독단으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 자신이 무지몽매한 독단을 휘두르던 사례도 많습니다. 예컨대 다윈의 진화론은 천지창조설이라는 기독교의 독단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켜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론 인종차별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악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19세기 후반에 등장해서 유럽 인종차별정책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던 우생학(優生學, eugenics)은 진화론의 직접적인 영향아래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생학은 인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할 것을 목적으로 창시되어, 실제로는 열악한 유전소질을 가진 인구의 멸절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반유대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던 히틀러에게 우생학은 날개를 달아준 꼴이었습니다. 아니 우생학적 사고와 관념이 널리 퍼져있는 분위기에서 히틀러같은 괴물이 탄생하였다고 해야겠지요. 바로 진보와 미개, 문명과 야만이란 차별이 횡행하고, 이러한 차별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진화론이 악용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차별주의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세계 곳곳에선 여전히 정신적, 신체적 장애자들에 대한 강제불임수술이 진행되고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적 장벽도 여전합니다. 그렇다면 과학은 어디까지가 진리이고 어디부터는 독단인가요? 불교로 말하면 어디까지가 속제이고, 어디부터는 허망인가요?

토마스 쿤에 의하면 과학은 발전하는 게 아닙니다. 패러다임의 변화에 맞춰 진리여부도 변합니다. 중세의 패러다임에서는 천동설이 과학이고 진리이었지만, 근대적 패러다임에서는 지동설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패러다임이란 사물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틀, 또는 인식체계입니다. 파란 안경을 끼면 파랗게 보이고, 검은 안경을 쓰면 검게 보이는 것처럼, 어떤 패러다임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세계는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우주를 천동설로 바라보면 하늘이 돌고, 지동설로 보면 땅이 돕니다. 과학의 진리성은 객관적인 사실에서가 아니라, 사실을 바라보는 과학자의 주관적인 시선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가 무엇인지 묻기 전에, 먼저, 세계를 바라보는 당신의 의식이 어떤 것인지를 물어야합니다. 인도에선 일찍이 유식학자(唯識學者)들에 의해 이 과업이 수행되었던 것입니다.

2. 왜 이제(二諦)가 아니고 삼성(三性)인가

삼성(三性)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말합니다. 이 용어는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裝)이 번역한 것입니다. 인도의 승려인 진제(眞諦, Paramārtha)는 분별성(分別性), 의타성(依他性), 진실성(眞實性)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저는 진제의 번역이 더 좋지만, 대개 현장의 번역어를 사용하므로 이를 따릅니다.

의타기성은 남에게 의지하여 생한다는 의미로, 바로 연기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원성실성은 원만·성취·진실이라는 뜻으로, 진여를 가리킵니다. 진여는 여실(如實), 즉 있는 그대로란 의미입니다. 진여는 연기를 연기 자체로만 보는 것입니다. 연기로만 보고 어떤 것도 더하거나 덜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입니다. 연기성공(緣起性空)이지요.

중관학

유식학

 

 

 

변계소집성(분별성)

허망성(망념)

속제

세속제, 세제

현상계, 생멸, 연기

의타기성(의타성)

진리성(제성)

진제

제일의제, 승의제

진리계, 불생불멸, 공

원성실성(진실성)

진리성(제성)


연기법은 현실세계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이 세계는 모든 존재가 다 인연에 따라 생멸하며, 독립불변의 자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타기성은 현실세계를, 원성실성은 현실에 대한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며, 각각 속제와 진제를 가리킵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각각 속제와 진제에 연결되며 제성, 즉 진리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변계소집성은 허망한 망념으로 제성이 없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이지요. 따라서 유식학이 비록 삼성을 동치시키지만, 변계소집성은 의타기성과 원성실성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유식학자들은 왜 변계소집성을 애써 구분해 내었는가?”라고 말이지요.

변계소집이란 주변을 계산하고 구분하여 집착하는 것입니다. 돌과 금을 계산하여 금에 집착하고, 미인과 추녀를 나누어 차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空)과 유(有)를 나누어 공에 집착한다면, 이 또한 변계소집입니다. 이런 변계소집성은 세속의 속인들에게 거의 필연과도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돌과 금을 구분할 줄 모르고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화 속엔 가끔 이런 바보들의 행복한 삶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소설일 뿐입니다. 어쩌면 변계소집에 빠져야만 하는 게 속인의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세속적 삶을 긍정해야하는 대승불교 입장에서는 세속의 진리성과 허망성을 엄격히 구분해야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중관학이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끝없는 부정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분별은 더 절실해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유식학자들이 진리[諦]라 말하지 않고, 성질[性]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속제는 의타기성을 가지는 동안만 진리입니다. 변계소집이 끼어드는 순간 망념과 집착이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세속에서 살아야하는 보살들에게는 그 행위가 의타기성인지, 아니면 변계소집성인지를 분별할 줄 아는 게 수행의 첫걸음이었던 것입니다.

3. 꿈꾸는 동안은 꿈이 꿈인 줄 모른다

▲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의 한 장면.
의사로부터 남편 루디에게 남은 인생이 얼마 없다는 말을 들은 아내 트루디는, 이런 사실을 숨기고 루디를 졸라 자식들이 있는 베를린으로 갑니다. 하지만 이미 성가한 자식들에게 늙은 부모의 갑작스런 방문은 오히려 성가신 일입니다. 노부부는 다시 바닷가로 가고, 발틱해가 보이는 한 호텔에서 트루디가 먼저 죽습니다. 아내가 죽은 후, 아내가 있던 자리가 너무 커져버린 루디는 아내의 꿈을 좇아 동경에까지 갑니다. 정해진 시간에 기차를 타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는 일상을 벗어나 본적이 없던 루디에게 이 여행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발틱해에서 트루디가 “만약 우리한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무얼 제일 하고 싶어?”라고 물을 때도, “새삼스럽게 뭘 하겠어. 늘 하던 대로 아침엔 출근하고 저녁엔 당신에게 돌아가야지”라고 대답했던 루디입니다.

루디는 아내의 옷을 입고 동경 곳곳을 보여주다가 부토[舞蹈] 춤을 추는 ‘유’라는 한 일본 소녀를 알게 됩니다. 유의 도움으로 아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후지산에 갔지만, 산은 연무에 갇혀 형태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여관에서 하루하루 산이 보이기만을 기다리던 중 루디는 결국 쓰러집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잠시 찾아온 평화. 그 밤에 후지산은 황홀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루디는 부토댄서처럼 얼굴을 하얗게 칠한 다음, 아내가 즐겨 입던 옷을 입고 후지산이 비치는 호숫가에서 춤을 추다가 쓰러집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이승과의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그 찰나의 시간이 되어서야 후지산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 후지산은 삶의 본질을 상징합니다. 흔히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 합니다. 삶이 허망한 꿈인줄 어떻게 알까요? 꿈을 꾸고 있는 동안은 꿈인줄 모릅니다. 만약 인생이 꿈이라면 긴 꿈에서 깨어나는 건 죽어서야 가능한 것 아닐까요? 장자(莊子)는 죽음이야말로 큰 깨달음[大覺]이라고 역설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삶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삶을 모르는데 죽음인들 알 수가 없지요. 마치 후지산이 연무에 가려 있듯이 그렇게 삶의 진실한 모습은 가려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나 자신도 죽음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삶은 그 실상을 드러냅니다.

영화에는 부토라는 일본 춤이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합니다. 이 춤은 ‘죽음의 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히쓰카다 다쓰미라는 일본인 무용수가 죽은 시체의 얼굴에서 영감을 얻어 창시했다고 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허무주의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에 삽입된 부토[舞蹈] 장면.
부토는 춤을 통해 삶의 본질을 묻습니다. 무용수들이 얼굴을 하얗게 칠하는 것은 개성(個性)을 없애는 것입니다, 불교로 말하면 자성(自性)을 지우는 것이지요. 무용은 느리게 진행되다가 갑작스럽게 변하는데, 평범한 일상이 예기치 못한 죽음에 직면하는 우리들의 삶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또한 혐오스럽고 괴기스런 춤사위는 미와 추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부토는 마치 하루살이가 영원히 살 것처럼 시비선악을 가르고, 미추호오를 구분하는 세속적 삶의 허무를 나타냅니다.

삶의 실상은 죽음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드러납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의 가능성에 먼저 다가갈 때, 실존의 전체성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이 말은 트루디처럼 오늘밤 잠자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생의 참 모습이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영화의 원제인 ‘Kirschbluten’는 벚꽃, 혹은 벛꽃이 한창인 때란 뜻입니다. 일본어 Hanami(花見), 영어의 ‘Cherry Blossoms’, 모두 벛꽃이 활짝 피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벚꽃처럼 허망하게 지는 꽃도 없습니다. 활짝 피었다가는 단 며칠 만에 꽃바람이 날리듯 그렇게 집니다. 우리들의 생인들 크게 다를 것도 없습니다. 가족을 위해, 하고 싶은 모든 걸 은퇴이후로 미루면서 열심히 살다보면 어느새 죽음이 다가와 있습니다. 어어 하며 살다가 보니 북망산이 코앞이지요.

일상에는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속인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변계소집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일상에서 변계소집성을 제거하면 온전히 의타기성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럴 때 삶은 그대로 원성실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진속불이, 중도의입니다. 진제의 용어로 말하면 분별성이 사라지는 순간 진실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후지산이 연무에 가려 있는 동안 사람들은 후지산을 상상하며 이 산은 어떻게 생겼고, 알프스와는 무엇이 다른지를 분별합니다. 모두가 허망이고 환상이지요. 그러다가 후지산이 드러나는 순간, 모든 분별이 사라집니다. 가슴으로 느끼고 손끝으로 전해집니다. 온몸으로 하나가 됩니다. 이게 비분별입니다. 세계의 실상은 의식으로 분별해 아는 게 아닙니다. 산과 호수에, 그리고 너에게 나를 온전히 맡길 때, 나와 너, 몸과 마음의 구분이 사라지며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 유식학자들은 요가수행을 통해서 이런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말이 필요없는, 하지만 너무도 분명하고 여실히 세계가 드러나는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현대인이 천 년 전 요가수행자들이 했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상이 깨달음이 되게 살 수는 있습니다. 나를 지배하던 관념을 버리기만 하여도, 마치 후지산의 연무가 걷히듯 모든 게 환해집니다. 어느 집안의 남자가 가부장적인 생각을 버리자, 아내의 감정이 느껴지고, 자식들의 말이 들리더라는 이야기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루디는 유로부터 부토를 배웁니다. 하루는 청소하다가 문득 춤동작을 취하지요. 청소가 춤이 되고, 일상이 예술이 되는 순간입니다. 하기 싫은 노동이, 하고 싶은 예술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상이지만 그 경계는 천지차이입니다.

과학이 진리와 독단을 오고가듯이, 우리들의 세속적 삶도 의타기와 변계집을 넘나듭니다. 과학이 진리로 남으려면 독단을 경계해야 하듯이, 일상이 속제가 되려면 변계집을 버려야 합니다. 유식학자들은 진리와 독단의 경계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따를 것인가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김문갑/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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