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곡스님 진영.

이 세상에 나서 죽을 때까지 오로지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을 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살다보면 굴곡이 있기 마련이어서 희망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인곡(仁谷, 1895~1961)스님이 살다간 시기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혼란과 격동기에 해당한다. 불교계에서는 일본불교에 대항하여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한 시기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정화운동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험난한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시종일관 본분사에 노심초사했고 수행에만 전념하였다. 이 자체만으로도 복 받은 사람이 아닌가.

스님은 1895년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속명 그대로 창수[暢(昌)洙], 법호는 인곡[麟(仁)谷]이다. 13세에 고창 문수사의 금성(錦城)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후 19세 때 팔공산에서 100일 용맹정근 전까지는 염불과 교학에 전념한 듯하다. 그러나 성불하겠다는 대서원을 세운 스님은 교학이 세상을 제도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지만, 부처님의 골수(骨髓)를 얻는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 인곡스님 탑비.(해인사)
이후 스님은 예산 보덕선원의 보월스님 문하에서 안거를 시작으로 만공 · 수월 · 혜월 · 한암스님과 같은 당대의 선지식을 친견하여 수행의 결과를 점검받기도 하였다. 만공스님 회상에서 수행할 때는 만공스님이 대중들에게 법문을 시작할 순간 “잘못되었다[錯]”고 외쳐 만공스님을 법상에서 내려오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즉 법은 입을 떼는 순간 이미 그르쳤다[開口卽錯]는 의미다.

이러한 일은 용성스님의 인가를 받아 직접 대중에게 법문할 때도 있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스님에게서 설법을 듣고자 한 대중들에게 법상에 올라 내려 올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다. 이에 대해 스승인 용성스님은 “이것이야말로 참된 설법이며, 부처님의 근본 진리이며, 법계의 모든 영혼이 안심입명(安心立命)할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스님의 이러한 침묵의 설법은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여러 보살과 차별을 떠난 절대평등의 경지에 들어가는 문답 속에서 침묵으로 일관한 것과 같은 도리라고 할 만하다. 문수보살은 유마거사에게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문자나 말 한 마디 없는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절대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우레와 같은 침묵인 것이다.

스님은 32세에 백양사 운문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었는데, 후학들에게 조주선사의 무자(無字)화두를 유난히 강조하셨다고 한다. 해인사에서 대중을 향한 설법에서는 찬 한 잔을 손에 들고 “이 차 한 잔이 옛날 조주스님의 차와 같은가 다른가?” 대중이 답을 못하자 스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여기 한 잔의 조주차여
불조를 죽이고 살림이 자유롭도다
푸른 하늘 밝은 날에 전광이 번쩍이니
산하대지가 무너져 티끌이 되도다
於此趙州一盞茶
殺佛活祖總自在
靑天白日閃電光
山河大地磨爲塵

한편 스님이 제자들에게 유산으로 넘겨 준 ‘무자답(無字沓)’은 그 어떤 유산보다도 값진 것이었다. 쉽게 팔수도 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풍성한 수확이 보장된 기름진 농토인 셈이다. 즉 스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돈이 많아야 잘 입고 잘 먹고 살듯이 너희도 재산 많은 스승을 찾아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못내 서운해 하는 제자들에게 유산으로 ‘무자답’을 남겨주었다고 한다.

즉, 세상 사람들이 주고받는 재산은 아침의 티끌과 같아서 영원히 가질 수 없으며, 죽을 때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미가 없는 가운데 맛보는 재미가 최고의 훌륭한 맛이니 모름지기 ‘무자’의 맛으로 비길 데 없는 선열(禪悅)을 맛보라는 것이다. 제자들을 위한 참스승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스님의 일생은 수행정진과 겸양(謙讓)으로 표현할 만하다. 본분사 외에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고 하지 않았다. 당대의 선지식 효봉(曉峰)스님과는 친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그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 역시 그의 조용한 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해인사에서 효봉스님이 방장으로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는 헌식(獻食)이라는 소임을 맡기도 하였다.

▲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에 자리한 인곡스님.

 

스님이 해인사 장경각(藏經閣)에서 천일기도를 하고 있을 때다. 기도가 끝나면 헌식처에 올라가 헌식을 했는데, 근처의 까마귀들이 스님의 염불이 끝나면 먹기 시작했다고 해서 “까마귀도인”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뒷날 한암스님이 이를 칭송하자 스님은 “까마귀가 오는 것이 아니고 까마귀가 있기에 그저 밥을 주었을 뿐 이었다”고 말하였다.

스님은 비록 혼란과 격동의 세월을 살다 갔지만, 끊임없이 정진하며 후학을 일깨우는 삶으로 일관하였다. 평생동안 일관된 이러한 삶은 출가와 속가를 가릴 것 없이 흔치 않은 일이다. 스님은 아마도 진정한 복인(福人)이다.

오경후/한국불교선리연구원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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