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 구도의 길을 가면서 보살행을 실천한 금하광덕(金河光德, 1927∼1999)스님은 현대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전법보살이다. 스님은 불교가 인간해방의 원리를 가르친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스님은 1974년 11월 1일 󰡔불광󰡕 창간호 권두언에서 <순수불교선언문>을 온 천하에 공포하면서 그의 이러한 생각을 피력한다.

부처님이 보신 바에는, 인간은 어느 누구의 피조물이거나 상관적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참 모습은 절대의 자존자며 무한자며 창조자다. 일체 신성과 존엄과 가치의 권위는 그로부터 유인(由因)한다. 그것은 인간이란, 구극의 진리인 불성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스님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모든 덕성과 능력이 본래로 구족하다. 왜냐하면 구극의 진리인 불성의 실현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은 본래의 것으로서 빼앗길 수도 변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혹에서 벗어나 인간실상을 바로 보고 인간 복지를 회복해야만 한다.

스님은 한편으로는 ‘인간 절대 권능의 자각 추구’를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님에 대한 다함없는 찬탄과 공경’을 보이기도 한다. 스님은 부처님은 오직 부처님일 뿐이며, 그 이름은 석가모니불이시고, 법신이자 보신이고 화신이라고 설파한다. 더 나아가서 시방삼세 일체의 제불이 석가모니불의 화신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영원한 현재성이며, 나의 생명의 원형이라고 한다.

결국 ‘인간에 대한 무한 긍정’과 ‘부처님에 대한 끊임없는 찬탄과 공경’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인 축은 이후 스님의 사상과 실천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제공하는 원천이 된다.

스님은 부처님이 중생들을 성숙시키고자 하시는 대비원력(大悲願力)에 의해 관자재보살이 이룬 대자재해탈의 경지를 살피시게 되고 그리고는 대삼매의 위신력으로 사리불 존자로 하여금 대자재를 성취하는 방법을 관자재보살에게 묻게 하신 데에서 비롯된 것이 ≪반야심경≫이라고 본다. 따라서 ≪반야심경≫은 ‘바라밀’을 성취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의거할 결정적 요전이라고 설파하신다. ≪반야심경≫을 불교 경전 가운데, 부처님의 의중을 가장 제대로 담고 있는 경전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스님은 ≪반야심경≫의 요체로, 사물의 참 도리를 사무쳐 보는 깊은 지혜인 ‘반야’를 지목한다. 반야의 지혜를 밝히게 되면 거기에 정견(正見)이 서는데,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생활을 진리로 방향 짓고, 연결시키는 관건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를 구하는 이는 육바라밀 가운데 ‘반야바라밀’을 제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견에 의해 굳건한 믿음과 명확한 이해로써 현실적 행동의 구체적 지표가 제시되기 때문이다. 즉 정견에 의해 반야는 진리의 행동화라는 구체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반야는 대행(大行)의 전개를 의미한다.

스님은 설파한다. 반야는 행하는 것이다. 반야의 대행은 일체의 논의, 논리, 관념, 인식을 파기하고 오로지 정견을 통한 대행으로만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반야에서 공(空)을 관(觀)하면 관념화되고 만다. 만약 깨달음이 관념화되고 명상이나 반야삼매 속에서 파악되거나 또한 파악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될 때 거기에서 불교는 명상이나 삼매를 거쳐 파악되는 종교가 되고 말고 동시에 그것은 중생과는 거리가 있는 하나의 ‘수도하는 종교’로만 그칠 수밖에 없으며, 거기에는 진리를 구체적으로 전개하는 행(行)도 없게 된다.

스님은 불교가 만일 대사회적실천을 담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반야의 참 뜻에 반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반야심경≫과 ‘반야바라밀’은 명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천의 원리이며 실천행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스님은 ≪반야심경≫을 주석하시고 해설하시는 형식을 통하여 자기의 철학을 토로한다. 그것은 첫째, 불교적 모든 사유체계는 궁극적으로 행동, 즉 대사회적 실천인 보살행을 통하여서만이 의미를 가진다. 둘째, 가정, 직장, 국가, 세계에서 인간가치의 절대적 실현이 최우선적 가치로 추구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보살의 성품과 공덕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스님은 불자들의 근본목표는 성불에 있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가하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라고 ≪반야심경≫을 빌어 설명한다. 그런 다음 어떻게 하여야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다는 어쩔 수 없이 아직까지는 말이며, 관념이며, 이론이며 논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론이 그런 것으로 이해한 것이며, 논리를 수긍한 것이고, 생각과 관념으로 표상(表象)하고 의식한 것 밖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그 자체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돌파구가 필요한 것이다. 다음을 보자.

여기에서 우리는 다행이 보현을 만났다. 우리는 보현보살을 배워서 자신을 회복하고 인간복권을 성취하여야겠다. 그리하여 역사와 운명에 인간의 길을 부여하고 인간 진실을 개현하여, 인간 권위를 회복하고 무한 창조의 평원을 열어가야겠다. 필자는 불법이 인간을 그의 실존 차원에서 확립시키고 무한한 긍정의 평원으로 해방시키는 지혜이며 힘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무상법의 현전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결론이다. 그리고 ‘보현’이야말로 마하반야바라밀의 개현자이며 실천자인 것이다.

스님은‘보현’이야말로 마하반야바라밀의 개현자이며 실천자라고 한다. 즉 불법을 지식으로 알려하거나 이론으로 알려하는 사람은 또 모르겠지만, 행동으로 실천해 불법의 무상공덕을 자신의 생활과 환경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불가불 보현행원을 배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 하여야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것인가? 라는 난문제에 대하여 스님은 보현행자의 10가지 서원을 읽고 배우고 행함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고 본다. 스님은 보현보살께서 말씀하신 10종행원은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우리의 현실위에 밝히는 최상의 지혜행이라고 본다. 따라서 10종행원은, 스님의 견처에 의하면, 부처님의 무량공덕 세계를 여는 열쇠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현행원을 통하여 반야바라밀을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실현하여 청정한 본성을 확인하고 실현하는 것, 즉 무상보리를 이루는 것이 바라밀․보현행자들의 나아갈 유일한 출구인 것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반야바라밀이 보현과 만나고 반야바라밀이 보현행이 된다.

결국 스님의 사상은 ‘인간에 대한 무한 긍정’과 ‘부처님에 대한 찬탄과 공경’ 그리고 ‘보살행’이라는 세 축으로 결과되어진다. 이때 어떤 면에서 인간과 보살 그리고 부처님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사유와 행동의 근거는 ≪반야심경≫과 ≪보원행원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 한평생의 가장 중요한 업적인 ‘불교의례 개혁’과 ‘의례의 한글화’는 그 모두가 전법보살인 스님의 발자취이자 대행(大行)의 드러남이 된다.

이덕진/창원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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