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총선에서 교회가 투표소로 사용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3동 제7투표구. 교회 측은 투표를 마친 주민들을 위해 차와 사타을 마련했다(사진은 기사내용과 특정관련이 없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중앙선관위’)가 종교시설 내 투표소 설치를 금지하라는 국가인권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지난 18대 총선에서 여전히 상당수의 종교시설을 투표소로 지정, 종교자유정책연구원 등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4월 9일 18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 날. 6년 넘게 살던 의정부를 떠나 3주전에 일산의 오피스단지로 이사 온 김 모(某) 씨. 남들에게는 공짜 휴일 일 뿐이지만 김 씨에게 이날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날이 됐다.
선거를 수없이 했지만 교회에서 투표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단지에는 주민공동시설이나 실내 놀이터처럼 투표소로 활용할만한 공간이 없지 않은데도 왜 교회에서 투표를 해야 하는 건지 못마땅했다. 상가 복도를 지나 교회 교육관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교회 집기들이 어수선 하게 치워져 있고 기표소 위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문구가 거슬린다.
딱히 종교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는 김 씨로서는 하필 교회에 투표소를 배정한 선관위 직원들의 무성의가 불쾌하기만 했다. 못마땅하지만 투표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70년대 중반 유신의 칼날이 시퍼렇던 시절 대학을 다녔고 젊은 시절부터 한 번도 투표를 빠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투표를 하고 나오는데 젊은 아가씨가 입구에서 무슨 티켓 같은 것을 나눠줬지만 김 씨는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김 씨가 투표를 한 일산동구선관위는 전체 투표소 50곳 가운데 종교시설은 2곳. 2곳 모두 교회였다. 투표소 설치를 담당하는 중앙선관위는 “선관위 차원에서도 종교시설 투표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척 신경 쓰고 있지만 한 번에 완전히 없애기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인권위 권고와 헌법소원 등의 영향으로 이전처럼 교회 투표소 안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커피나 차를 타주며 교회출석을 권유하는 노골적인 전도행위는 엄격히 막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까지 투표소 선정은 자치단체(주로 동단위 관변단체)의 지원을 받았다. 때문에 지역 사정에 밝은 교회관계자들이 수십 년 동안 관행적으로 투표소를 자신의 교회로 유치했다. 18대 선거를 앞두고서 이러한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선관위가 자체직원들을 통해 투표소 선정을 지시했지만 수십 년 동안 지속해온 교회투표소를 일시에 없애기는 역부족이었다.
실제로 투표소관리 직원 2명에 불과한 지역 선관위에서 투표소 50곳 모두를 선정하고 관리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18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지난 4월 9일 전국적으로 교회 같은 종교시설 투표소는 700여 곳. 이전에 비해 그 수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심각한 수준이다.
한편, 지난해 말 실시된 17대 대선에서는 전체 투표소 13,178곳 중 1,172(8.9%)곳이 종교시설이었다. 종교별로 보면, 교회가 1,048곳(89.4%)으로 가장 많았고 성당 100곳(8.5%), 불교 19곳(1.6%), 기타 종교 5곳(0.4%)이었다.
종교시설 중 교회가 전체 투표소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 7.1%, 2006년 제4대 동시 지방선거에서 7.9%, 그리고 얼마 전 제17대 대선에서 8.2%로 증가세다. 교회시설의 투표소 활용은 학교(46∼47%), 동사무소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최근 17대 대선에서는 종교시설 투표소 비율이 성당 투표소(0.5~0.6%)를 합하면 8.8%로 동사무소와 같은 비율이다. 한마디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가적 선거에서 어림잡아 투표소 열 곳 중 하나는 종교시설이고 그 대부분은 교회라는 것이다.
이전에도 종교시설 투표소 문제는 수없이 제기돼 왔지만 지금처럼 공론화 되지는 못했다. 그러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광주불교사암련소속 스님들이 수십 년간 선관위가 관행으로 선정했던 종교시설 투표소 설치가 특정후보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정보공개를 통해 종교시설 투표소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한 스님들이 지역선관위를 항의방문하면서 불교계 내부에서도 여론의 반향을 일으켰다.
때마침 종교자유정책연구원(공동대표 박광서ㆍ이하 ‘종자연’)은 지난 2월 종교시설에 투표소를 설치하는 것이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 중 자신이 신봉하지 않는 종교적 상징물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 혹은 그러한 종교적 상징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투표소 설치가 인권침해에 해당하는지 밝혀달라며 진정을 냈다.
이에 인권위는 3월 19일 ‘ 종교시설에 투표소를 설치하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권고안을 발표했다. 국가인권위는 공직선거 시 종교시설에 투표소를 설치하는 것은 헌법 제20조가 보장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국민 중 일부라도 종교상의 이유로 투표를 위해 종교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심리적 부담으로 느끼거나 나아가 투표행위 자체를 꺼리게 된다면 이는 국민의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인권위는 “국가가 종교시설에 투표소를 설치할 경우 다른 종교를 가지거나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유권자는 투표를 위해 반드시 특정 종교시설에 출입할 수밖에 없다”며 “특정 종교시설이 아닌 인근 투표소에서 투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이상 자신이 원하지 아니한 특정 종교시설에 출입을 강제 당하게 되며, 이는 헌법이 보호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고 밝혔다.
앞서 종자연은 2월 27일 종교시설 투표소 설치가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청구한 상황. 17대 대통령선거 때 교회에서 투표한 김 某(부천 역곡)·정 某(서울 화곡) 씨 등 3명의 청구인으로 나섰다. 심판청구서에서 “헌법 20조 1항 종교의 자유, 24조 선거권, 10조 행복추구권 중 일반적 행동자유권과 평등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수십여 년 동안 관행적으로 이뤄져온 종교시설 내 투표소 설치가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하고 행복추구권과 선거권을 침해한다.”며 청구 사유를 밝혔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에는 심각한 종교적 차별과 종교적 자유의 억압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이러한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지 못하거나 외면하게 되면 스스로 무기력하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해방을 맞고 제헌의회 선거 이후 수없이 많은 선거를 치르는 동안에도 불교는 차별적 대우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그래서 최근 종자연의 헌법소원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종자연은 종교시설 투표소 2차 위헌 청구인을 모집하고 있다.(www.kirf.or.kr)

조용수/불교TV 보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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