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런 물음을 자꾸 갖는다. “나는 과연 남 앞에서 ‘불자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전에는 가끔 생각나곤 하던 것이었는데 요즘 들어 잦아졌다. 왜 그런가 따져 보니 그 동안은 내가 제법 불교를 아는 축에 든다고 여겼던 것이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는데 그 연유가 있었다. 또 하나는 게으름을 피우고 정진에 힘쓰지 않은 데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해답은 간단하지 않은가. 부지런히 정진하면 되지 뭐 불자라 할 수 있느니 없는가를 따지고 있을 게 뭐냐”는 핀잔을 들어 싸다. 그렇다. 제 갈 길 바쁜 사람은 이런 저런 잡생각 않고 그 길에 매진할 뿐이지 않던가. 이미 목표를 분명히 세웠고 이정(里程)을 확연히 했으면 발을 부지런히 내디뎌 앞으로 가기만 할 뿐, 군소리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부지런히 제 갈 길 가지 않는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잡념을 피운다는 말이 한 치도 틀리지 않음을 요즘 내가 하고 있는 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며칠 전 아는 스님 한 분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나는 신심을 다잡을 수 있는 말씀을 부탁드렸다. 그 스님은 “목표를 분명히 하라.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라. 시간이 무서운 걸 알고 성심을 다해 살아라”고 했다. 수행에만 오랫동안 전념하신 스님이라 예삿말이 아닌 별난 말씀을 해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하시는 말씀은 유별한 게 아니었다. 단지 별나게 느낀 점이라면 그 스님의 말씀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는 불자로서 분명한 목표를 세웠고 그 목표에 이르는 게 내가 할 일임을 분명히 했다. 단지 그 길을 가는데 게으름을 피웠을 뿐이다. 그 분의 말씀에 마음이 아픈 것은 아직까지도 시간의 무서움을 절감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라 여겼다. “금생에 못다 하면 내 생에 하면 되지”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생사가 호흡지간이요 무상이 찰나”라는 문자는 곧잘 쓰면서도 속마음은 “내생이 있지 않느냐”에 머물고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내생(來生)이란 게 어디 생을 바꾸어서야 내생이던가. 그러니 말을 아는 것과 그 말을 체화(體化)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지 않은가. 부처님 말씀을 나는 믿는다.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데도 왜 “나는 불자인가?”라는 자문에는 머무적거리게 되는가. 공부가 덜 돼서 그러함을 잘 안다. 열심히 정진하지 않고 한 눈 팔았기에 그러함을 너무 잘 안다. 제 갈 길 바쁜 놈이 남이 하는 걸 두고 옳으니 그르니 주절거리느라 시간 보냈기 때문이다.
주변 탓도 많이 하고 있다. 공부에 전념 하려는데 이것 해라 저것 해라하니 그걸 들어주어야 하고 하나 끝내고 나면 또 다른 것 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전념할 시간은 뺏기고 마음도 약해지고. 생각나는 것은 공부시간 적게 가진데 대한 핑계거리고 긴 말하면 잔소리다. 공부에 회의감이 드는 것은 목표가 명확치 못함이요 성취에 자신감이 없음이다. 자신감이 없는 것은 용기가 없음이다.
내 정진이 잘 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자기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점검하면 어디쯤 왔는지 얼마나 익었는지 가늠할 수 있지 않는가. 나는 간다. 당당한 불자를 향하여.

이상돈/고려대장경연구소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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