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미래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의 무상함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말은 그저 임의적인 구분을 위한 개념들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자꾸만 그 개념들에 집착하여 서성거리게 된다.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현재의 고통을 견디기도 하고 이미 지나가버린 화려한 과거의 한 자락을 붙들고 허망한 위로를 받기도 한다.

미래가 현재와의 연속성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 독자적인 존재성을 지닐 수는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내는 일이 미래에 대비하는 유일한 길임을 숭산스님 같은 우리 시대의 스승들이 그렇게 강조했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현재와는 다른 차원의 미래를 그리는 간절한 눈빛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생멸(生滅)의 차원에서는 그런 꿈꾸기가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원로의원들의 자격을 문제 삼거나 이른바 ‘종단 지도자들’의 상습적인 도박을 폭로하는 소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구체적인 사실 여부는 좀 더 따져봐야 알 수 있을 듯하지만, 한국의 불교도들 대다수는 그것이 사실과 전혀 무관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작년에 있었던 승려들의 도박 현장을 담은 비디오 유포도 그런 믿음에 힘을 실어주었을 것이다. 일반인들의 확신과 비난은 상상을 초월하여 이런 때는 친구들 만나기가 겁나기도 한다.

‘땅에서 넘어진 자 바로 그 땅을 딛고서 일어서야 한다.’는 지눌스님의 결사문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남겨진 대안은 바로 이 곤혹스러운 상황과 정면으로 맞서는 일밖에는 없는 듯하다. 조만간 드러날 진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뻔뻔한 얼굴로 나와 강변하는 일부 정치인들의 모습이 스님들에게도 겹칠 때 우리는 더욱 큰 절망감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스님들은 한 때라도 수행의 길에 헌신하겠다는 맹세를 자신과 타인을 향해 한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절망감과 분노는 다른 한편으로 사부대중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재가자인 나 자신을 동시에 향하고 있기도 하다.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한국불교의 구성원은 당연히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라는 사부대중이고, 이들은 서로 뗄 수 없는 동체(同體)의 고리로 묶여 있기 때문에 일부 비구스님들의 허물은 곧 나 자신의 허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했던 것일까? 이제 한국불교에서 승가공동체에 기대할 것은 더 이상 없다고 재가자인 우리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스님들과 만나는 일이 잦아지면서, 이 물음은 그럼 당장 어떤 일을 어떻게 해가야 하는가 하는 확장된 물음으로 전환되어 가슴 속으로 비수처럼 파고들곤 한다.

언뜻 보면 우리불교에 더 이상의 미래는 없는 것 같다. 불교정화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총무원장과 본사 주지를 뽑는 선거제도를 도입하고 종회라는 사부대중의 대의기관을 설립하여 총무원장의 권력을 견제하도록 했던 20여년의 역사가 종언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금권 선거와 파계 행위가 일반화되어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마저도 느끼지 않는 듯한 승가에게 기대할 것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성과 쇄신’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나름 노력해왔던 스님들의 눈빛에서도 오히려 더 큰 절망감을 발견할 때가 더 많다.

미래가 현재와 이어져 있어 분리가 가능하지 않다는 우리의 기본 전제 속에서, 이제 우리에게 남은 대안은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면서 그것을 말 그대로 사부대중공동체가 공업(共業)으로 떠안는 것뿐이다. 더 이상 비구스님들에게만 맡겨두어서는 한국불교에 미래가 없음이 이미 검증되었다면, 초심을 잃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는 스님들의 수행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일부 권승(權僧)들의 전횡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비구도 다른 세 바퀴의 대중과 함께할 때에만 가능한 사부대중공동체의 한 축이라는 대승불교적 인식과 실천이 절실한 시점이다.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수행과 자비의 대열에 보다 적극적으로 합류해야만 한다. 우리 불교의 미래는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의 자각과 실천에 달려있을 뿐이다.

-박병기/한국교원대 교수, 동양윤리교육학회장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