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업적 기회주의를 노리는 얄팍한 작품들이 곳곳에서 ‘대박’을 터뜨리고 있지만, 예술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보다는 시대의 화두를 포착해 자신의 융화하고, 그 추상적 개념을 끄집어낸 작가와 작품에 주목하기 마련이다. 이는 한인현(78) 화백이 이 시대의 가치를 더해주는 충분한 이유이다.
우리 화단에서 그림을 안파는 작가로 유명한 한인현 화백. 작품에 담겨 있는 감성과 한의 응축에 저절로 눈물이 흐르게 만드는 노년의 화가를 만나기 위해, 그의 작업실이자 집으로 가면서 미술잡지 『Marquis』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는 사후에 발견하는 많은 대가들의 그림에서 그들이 이룩한 창조적 능력과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시대에 안타까움을 넘어서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좁은 집단이 그어놓은 선을 지나면 분명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 감동은 감동으로, 전체성은 찬사로 돌려주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자식과 같은 분신이기에 그림을 절대 팔지 않았고, 생계를 위해 밤샘 삽화를 그리며 ‘폐쇄적인 화단’에서 ‘무명(無名) 아닌 무명(珷名)’으로 활동해온 한 화백은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먼저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파리시립미술관장은 그의 작품을 보고 “작음 갤러리가 아닌 큰 미술관에서 전시해야 할 작품”이라고 평했으며, 우즈베키스탄미술대학 쿠지예브총장은 “심장으로만 느낄 수 있는 작품”아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
그리고 1996년 국회의원 이계진이 『이계진이 쓴 바보화가 한인현 이야기』(디자인하우스)를 펴내고서야 그의 순수한 인간미와 함께 엄격한 예술혼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의원은 자비를 들여 그와 두 번이나 유럽 여행을 했을 정도로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렇다고 한 화백은 무명(珷名) 화가의 삶을 버리지 않았다. 아니, 더욱 자부심과 자긍심을 지키며 약삭빠른 세상에 백기 들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1931년 함남 흥상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월남하기 전까지,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예술가로서의 고집[도전]이 여실히 보인다. “열두 살 때 시장 통에서 우연히 ‘고흐 화집’을 보고 반해, 집에서 돈을 훔쳐 그것을 산 이후 줄곧 고흐 못지않은 화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그림 그리는 데만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9월 흥남시립문화학원에서 회화의 기초인 데생을 정식으로 배웠죠.”
그는 흥남시립문화학원을 졸업하고 해주예술학교(지금의 ‘대
학’)에 진학할 때도, “해주예술학교에 가기 위해 흥남시립문화학원 원장 방에서 직인을 훔쳐 여행증명서에 도장을 찍었죠.”라고 기억을 더듬으며, ‘예술가로서 고집[도전]’에 방점을 찍었다. 흥남시립문화학원과 해주예술학교는 남북한을 통틀어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생긴 예술학교이다.
월남 이후 그의 화가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전쟁 때는 적진 코앞까지 잠입해 포격 타깃 설정용 그림을 그린 ‘종군 화가’로 위태로운 삶을, 휴전 때는 8백여 점의 장정화[책 표지 그림]와 삽화를 그리며 어려운 삶을 살았다. 그이 나이 50이 넘어서야 첫 전시회를 열고, 독특한 질감과 고유한 선의 화풍으로 세간의 눈길을 끌었는데, 기성 화단의 폐쇄성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화가들 중에는 저를 ‘야당 당수’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또한 스스로를 ‘비미술협 회원’이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라는 한 화백은 “더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나는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은 구속’으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더 좋은 그림을 그리는 방편일 뿐입니다.”
그의 데생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해주예술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할 당시 ‘스파르타식’ 공부를 했고, 또 전(全) 학년 내내 데생과 크로키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데생 기초가 안 된 그림은 그림이 아니다’라는 신조로, 매일 데생으로 스스로의 화가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데생은 그림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셈이고, 새끼손가락만한 몽당연필 수백 자루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도 그에 대한 애정의 발로인 셈이다.
그의 그림은 “시간이 갈수록 고향과 부모형제가 잊히는 커녕 더욱 더 그립기만 합니다. 학교를 마친 뒤 그림을 그리다가 국군을 따라 월남할 때는 곧 다시 볼 줄 알았지요. 이렇게 오래도록 만나지 못할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그려놓고 보면 고향의 마을과 사람들, 어머니의 모습이 화면 위에 지리 잡습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세간에서는‘향수적 언어’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외로움과 그리움은 ‘산과 들 마을을 배경으로 아들을 업은 황소 옆에 쭈그리고 앉은 어린소년이 자리한 그림’이나 ‘깡마르고 이마와 뒤통수가 툭 튀어나온 사람의 그림’처럼 대담한 화법으로 담백하게 드러난다. 또한 그는 물감을 많이 안 쓰는 편이다. 약간의 물감에 담뱃가루를 섞기도 하고, 이쑤시개나 성냥 등을 동원해 원하는 색과 선을 살려내 펼쳐 보인다.
“나이 70이 돼서야 이계진 선생(17,8대 국회의원)의 후원으로 첫 스승인 고흐를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나는 당당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지켜낸 외길 화가의 삶에 스스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고흐의 무덤에 소주 한잔을 따르고 절하면서, 드디어 고흐를 만났구나 하는 울림이 자자들지 않았습니다.”
한평생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다 채우지 못해서 아직도 밤에 잠을 설치는 구석구석 가득 차 있는 아이디어와 스케치를 다 실현시켜보기 못하고 죽을까봐 노심초사하며 치열한 예술혼을 보여준 한 화백이지만, 인간으로선 그지없이 소박하고 따스하다. “내가 세파에 무너지지 않도록 늘 힘이 되어주었던 가족들, 식구보다 먼저 안부를 챙겨주었던 강아지들, 스케치하느라 다 닳아버린 몽당연필. 나는 그들 모두에게 감사와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에 맞추지 않고, 어떤 고통과 유혹에도 절대로 짓밟히지 않겠다는 자기 삶의 원칙대로 살아온 한인현 화백. “내가 죽거든 스케치북과 4B 연필을 관 속에 많이 넣어 달라.”라는 그는 분명 멀고 험한 길을 가는 사람이지만, 시선을 먼 하늘에 고정시킨 채 큰 희망 작은 희망 가리지 않고 조금씩 희망 곁으로 다가가는 이 시대의 대가(大家)이다.

오종욱/본지 편집실장

한인현 화백은
△흥남시립문화학원, 해주 예술학교 졸업 △서울 제일미술관전 초대 △초대 개인전 (미도파화랑) △한일 정예작가전 초대(서울, 동경) △함남도전 초대 (數回) △일본 국제미술전 초대(일본 동경도립미술관) △미국 SF 및 LA 국제미술전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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