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행복하고 싶어 합니다. 돈을 많이 벌려는 것이나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얼굴을 예쁘게 만들려는 것이나,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 마음을 평화롭게 하려는 것이나 모두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을 얻으면 혹시 행복해지지 않을까 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 정말 행복한 소녀가 있습니다. 위에서 열거했던 행복의 수단인 돈을 갖고 있지도 않고, 권력도 없고, 배움도 짧은데 행복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불행의 조건을 많이 갖고 있는데 이상하게 행복했습니다. 소녀를 통해 행복의 조건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트란 안 훙 감독의 <그린 파파야 향기>(베트남·프랑스)는 1993년 칸느영화제에서 황금 카메라 상을 받은 영화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감각적인 영화로 대사보다는 화면에 치중하는 편입니다. 주인공 무이 역을 맡은 소녀의 표정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데 호기심과 행복함이 가득한 얼굴은 오랫동안 잔영이 남을 정도로 예뻤고, 파파야 나무와 같은 식물과 또 거기 기대 사는 곤충을 보여주는데, 자연화면도 전체적으로 맑고 신선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세련되고 아름다운 화면은 느리게 흐르고, 마치 자연 다큐를 보는 것처럼 섬세했습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숲속을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영화였습니다.

<그린 파파야 향기>는 무이라는 소녀가 포목점을 하는 집에 보조 가정부로 취직하면서 시작됩니다. 베트남 사이공에 있는 주인집에서 일하기 위해 10살 먹은 무이는 하루 종일을 걸어서 왔지만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호기심으로 눈빛이 반짝였습니다. 3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여동생과 같이 살다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식모살이를 하러 멀리 타향에 왔지만 어두운 구석은 조금도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주인집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창밖으로 보이는 그린 파파야 향기를 맡기 위해 고개를 내밀고 흠흠거리는 무이의 표정에는 호기심과 행복함이 가득했습니다. 엄마를 떠나온 외로움이나 슬픔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가 않고, 고된 노동에 대한 불만이나 두려움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소풍을 나온 아이처럼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마음속에 행복이 충만한 소녀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나이든 가정부를 도와 채소를 볶는 일도 그린 파파야를 잘라 샐러드를 만드는 일도 무이에게는 재미있는 일상이었습니다. 거기다 친구도 많았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땅바닥을 기어가고 있는 개미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직접 키우는 귀뚜라미도 좋은 친구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개구리를 구경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친구도 있습니다. 주인집 2층에서 불공만 드리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 노마님을 사랑하는 어떤 할아버지인데, 할아버지의 사랑 얘기를 들어주고, 또 할머니를 만날 수 있도록 2층까지 안내하면서 낯선 할아버지의 따뜻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무이는 주인집 식구들이나 나이든 가정부보다도 이렇게 긴 사랑에 빠진 할아버지나 곤충과 동물들과 교감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곤충과 할아버지는 훨씬 사랑에 충만한 세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며 언제나 현재 진행형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과 교감을 나눈다는 건 무이가 사랑과 행복에 충만할 뿐만 아니라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이 이외의 사람들은 불행하며,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를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집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안주인은 따뜻한 사람으로 무이에게도 다정하게 대하고, 사람들한테 친절하지만 행복한 편은 아닙니다. 남편은 평생을 한량으로 사는 사람으로 집에 있을 때는 하루 종일 잠옷 바람으로 악기나 두드리는데, 그렇지 않으면 돈을 갖고 집을 나가서는 몇 년씩 돌아오지 않는 삶을 반복했습니다. 그 또한 삶에 불만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집 할머니는 2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결코 나오지를 않습니다. 죽은 남편과 사랑하는 손녀의 영정이 모셔진 불당에서 하루 종일 불공드리는 게 할머니가 하는 일인데 할머니 또한 과거에 얽매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이집에는 아들이 셋 있는데 큰 아들은 이미 장성해서 자기 세계가 있으므로 집안의 분위기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지만 작은 아들과 막내는 좀 애들이 삐뚤어져 있습니다. 막내는 그 불만을 가정부인 무이를 괴롭히는 것으로 풀려고 했습니다. 무이가 청소하고 있는 마룻바닥에 오줌을 싼다거나 물을 쏟는다거나 화병에 개구리를 몰래 숨겨두었다가 무이를 놀라게 해서 화병을 깨뜨리게 해서 곤란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식으로 사사건건 무이를 괴롭히는 역할을 했습니다.

둘째는 죄 없는 개미에게 촛농을 떨어뜨려 몰살시킨다거나 그것도 직성에 안 풀리는지 손톱으로 마구 짓눌러 죽이거나 새총으로 새나 개구리를 잡는다거나 하면서 마음속의 울분을 해소하려했습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든 둘째는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에 대한 연민과 집 나간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출을 엄마 탓으로 돌리는 할머니에 대한 원망을 이런 식으로 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행복한 집은 아니었습니다. 주인마님이 좋은 분이긴 하지만 가정부로서 일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닌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힘들기에 쌀을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니까 가정부는 더욱 먹을 게 귀하고, 자기를 괴롭히는 개구쟁이가 있고, 다들 불행하고, 이런 집에서 엄마와 동생과 헤어진 어린 가정부가 행복할 수 있다는 건 무이가 평범한 애가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무이는 자기 내면의 평화와 행복의 힘이 견고하기에 주변에서 어떤 풍파가 닥쳐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무이가 주변 상황과 별개로 행복한 아이라는 걸 알려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집 아저씨가 집 안에 있는 돈을 모두 가지고 집을 나가 버렸을 때 나이 든 가정부와 무이가 대화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때 무이는 채소에 물을 주고 있었습니다. 나이 든 가정부가 “면 두 필밖에 없는데 쌀도 다 떨어져 가고 걱정이구나”하면서 주인집의 이런저런 어려움을 들려주면서 주인집을 걱정했습니다. 주인집에 대한 걱정은 또한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기도 했습니다. 주인집 형편이 어려워지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것이고, 쌀이 떨어지면 굶을 수도 있는 상황이기에 결국은 자기 미래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이 걱정으로부터 무이 또한 자유로울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이는 이 걱정에 결코 끼어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이는 늙은 가정부의 넋두리에 전혀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무이는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여전히 행복한 표정으로 채소에 물을 뿌리고 귀뚜라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두꺼비를 바라봤습니다. 경제적 궁핍이나 우울한 집안 분위기나 이런 것에 동화되지 않고 고유의 행복을 만끽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무이가 아이기 때문에 이렇다고는 볼 수 없는 게, 이 집의 어린 아들들은 집안 분위기에 휩쓸려 울거나 화를 내는 식으로 나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봐도 무이의 이런 초연한 태도는 특별한 모습이었습니다.

무이는 이 집에서 독자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다들 생명력을 잃고 불행한데 오직 충만한 생명력을 갖고 있으면서 유난히 빛나는 무이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주인집 할머니와 가장 비교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밖에 한 발짝도 나오지 않으면서 오직 불공만 드리는 할머니는 현재를 사는 인물이 아닙니다. 과거에 얽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죽은 남편과 손녀에게 얽매여 있습니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관념의 세계에 머무는데 결코 행복한 모습은 아닙니다. 반면에 무이는 언제나 현재를 사는 사람입니다. 그린파파야 향기를 맡고, 발가락으로 개구리 등의 감촉을 느끼고, 프라이팬에 채소를 볶고, 마룻 바닥을 닦고, 이 모든 것들은 현재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무이의 관점서 봤을 때 오직 현재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불행은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는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의식이 머무는 한 불행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쌀이 떨어질 걸 걱정하는 건 미래에 의식이 가 있는 것이고, 죽은 남편과 손녀를 생각하는 것은 과거에 의식이 가 있는 것이고, 무엇이든 걱정을 한다는 건 의식이 지금 이 순간에 있지 않다는 뜻인데, 불행은 이렇게 의식이 현재를 벗어났을 때만 침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이는 언제나 현재에 존재했으므로 행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이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불행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무척 행복한 영화로 보이는데 이유는, 무이가 행복한 사람이고, 영화는 무이의 시선에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이가 행복한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고, 언제나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쳐준 영화였습니다. 보고나면 누구나 행복 한아름 안게 될 것 같기에 적극 추천합니다.

김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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