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불교 영화에서 주로 많이 다루는 주제는 '승려의 길 찾기'입니다. 수행을 꼭 산중에서 해야 하는가, 세속에서 욕망과 부딪치면서 얻어가는 것들이 있지 않는가, 이런 양 극단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수행자들을 그리고 있으며, 또한 다른 방식의 수행을 통해 얻어진 결과를 비교하는 형태로 영화가 구성된다고 봅니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나 <아제아제 바라아제> 속 주인공들은 세속의 길과 수행자의 길 사이에서 방황하지만 결국은 선택을 하는데, <만다라>에서는 승가 쪽에,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는 세속에서의 수행에 후한 점수를 주는 편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잘 만든 불교영화라고 생각하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서는 한 사람은 절에 남고 또 한 사람은 세속을 향해서 떠났는데, 결국은 세속이든 산중이든 불성이 있는 곳이 수행처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번에 다루는 영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한국, 1991)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스님들의 길 찾기가 주 골격입니다. 수행자로서 여법하게 살아갈 것인가, 세속으로 가서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그 가운데서 깨달음을 구할 것인가, 두 가지 길 위에서 방황하던 수행자들은 마침내 길을 정하고 각자의 길로 떠나는 모습이 그려지는 게 대략적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의 장점은, 세속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세속을 승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로 인식한다는 게 기존 불교영화와의 차이점입니다. <만다라>나 <꿈>과 같은 영화에서 보이는 세속은 승려에게는 마구니와 같은 것으로 그려졌습니다. 청정비구라면 꿈에서라도 한 발을 빠뜨려서는 안 되는 그야말로 오탁악세인데 반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세속은 나름 긍정적인 편입니다.

영화<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에서 무불스님은 파계승입니다. 비승비속의 인물로 머리는 길렀고, 술병을 끼고 살고, 음담패설도 거침없이 하고, 승려들의 필수항목인 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인물입니다. 삶의 공간 또한 절 보다는 저잣거리고요.

저잣거리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묘사는 없으나 오랜만에 절에 나타난 그는 결코 막 사는 ‘땡초’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경지에 대해서는 조실스님이 인정해주었습니다. 무불스님은 조실스님과의 문답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았으며, 조실스님이 큰 절에서 마지막 법문을 할 때 조실스님의 질문에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오직 나서서 거침없는 대답을 쏟아놓습니다.

“내가 갈 곳을 아시는 분은 일러 주십시오?”라고 조실스님이 대중에게 물었을 때,

무불 스님은, “내 갈 곳도 모르는 데 스님 갈 곳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면서 뭔가 아는 것 같은 답을 내놓습니다. 그러자 조실스님은 아무 말씀도 못 하셨는데, 이 장면만 보면 감독은 조실스님보다 무불스님을 한 수 위로 표현하고자 한 것처럼 보입니다.

무불스님은 땡초의 모습으로 살아왔지만 나름의 경지를 획득했습니다. 절에서 쫓겨나 동굴에서 살 때 그는 죽은 까마귀 고기를 야만스럽게 뜯어먹습니다. 이 모습에서 분별과 경계를 초월한 경지가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낭떠러지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죽습니다. 속되게 표현하면 ‘자살’이지만 이렇게만 표현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조실스님이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불 스님 또한 자신이 가야 할 때를 알고 있으며, 그 마지막 순간에 그만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했다는 게 더 옳은 해석일 것 같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한 이의 마지막 퍼포먼스와 같은 인상을 주는 죽음이었지, 결코 삶에 절망한 이의 저항은 아니었습니다.

무불스님이 세속의 삶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면, 조실스님은 수행자로서의 삶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무불스님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로 그는 평생을 산중에서 욕망을 절제하면서 계를 지키면서 청정비구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조실스님은 입적에 들면서 방황하는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산내 암자에 사는 묘혼이라는 비구니의 나신(裸身)을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스님은 ‘평생 비구로 살아오면서 그 욕망 하나가 아직 남았는가 보다’라고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간 지족선사처럼 생각하는 이도 있었지만 조실스님은 묘혼스님의 나신을 보면서 ‘무불당’이라고 말하고 앉아서 입적에 들었습니다. 몸에는 불성이 없으니 몸뚱이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 평생 지켜온 청정비구로서의 이미지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조실스님은 자비심과 더불어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를 획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스승들의 모습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도달해야 할 경지와 방법을 보여줬다면 이제 제자들은 자신은 도대체 어느 길로 갈 것인가, 하는 길 찾기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무불스님처럼 세속의 길을 걸을 것인가, 조실스님처럼 산중에서 계를 지키고 욕망을 억제하면서 깨달음을 구할 것인가, 선택은 제자들의 몫입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의 배경이 되는 비구 절과 비구니 절은 꽤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 두 절 사이에는 왕래도 잦아 누군가 아프면 서로 걱정해줄 정도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입니다. 비구 절에는 ‘침해’라는 미소년에 가까운 사미승이 있고, 비구니 절에는 묘혼이라는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만큼의 미모를 소유한 비구니가 살고 있습니다.

선남선녀인 두 스님은 어느새 사랑에 빠지고, 서로를 그리워합니다.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잊어버릴 정도로 상대에게 몰두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가장 공을 들였으며, 또한 가장 잘된 묘사가 이 두 스님이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상대방의 절 앞을 서성거린다거나 서로를 만나기 위해 애쓰는 장면입니다. 계를 파한 스님들의 모습이 아니라 처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설렘을 잘 표현했습니다. 둘은 마침내 함께 도망가자고 하면서 사람들 몰래 산을 내려왔으나 눈 덮인 산에서 헤매기만 하다가 다시 자신들의 절로 돌아갈 정도로 사랑의 감정이 매우 진지했습니다.

사랑의 감정을 표현할 때 계율의 잣대가 끼어들지 않은 게 좋았다고 봅니다. 비록 스님이긴 했지만 이제 19살인 어린 사미승이고, 그가 그 감정에 몰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사랑은 하얀 설경처럼 깨끗하고 순수했는데, 그게 이 영화의 장점이기도 했지만 또한 단점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스승의 마지막 설법을 듣고 그들은 어떻게든 이 감정을 정리해야 하는, 결과가 비극으로 끝날 게 뻔한 사랑인데 너무 아름답게 묘사됐기 때문에 다음 얘기와 매끄럽게 연결이 될 수 없다는 게 단점이었습니다.

조실스님은 이 둘의 관계와 감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돌아가시면서 묘혼의 나신을 보겠다고 하셨고, 몸뚱이에는 자성이 없다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묘혼스님은 조실스님 앞에서 옷을 벗은 일이 꽤 충격이었는지, 아니면 스님의 ‘무불당’이라는 활구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사건 후 들떴던 감정을 정리합니다.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는 의지를 보이면서 수행자의 진지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묘혼스님은 산중에서 수행자로서 살아가는 삶인 조실스님의 길을 걸을 것으로 정리된 것입니다.

반면에 침해 스님은 묘혼스님과는 다른 길을 걷기로 합니다. 무불스님처럼 세속을 만행하면서 깨달음을 구하기로 합니다. 욕망을 억제하는 길이 아닌, 경험하고, 속성을 이해하고, 그리고 헛됨을 깨달으면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바랑을 짊어진 침해스님 뒤로 기차가 지나가는지 기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는데, 이것이 이런 정황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침해스님이 세속 행을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갑작스런 결론은 좀 느닷없게 여겨지는 점이 있습니다. 세속의 길을 가게 되는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침해스님의 느닷없는 세속 행이 영화의 구멍이 되고 있습니다. 이 뚜렷한 단점 때문에 영화는 기대에 못 미치는 편이었습니다. 원작은 고은이고, 감독은 우리나라 최고 감독 반열에 드는 정지영 감독인데 반해 뭔가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불교영화라고 말하기는 좀 망설여집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에서 보여준 것처럼 세속의 길을 갈 것인가, 산중에서 수행할 것인가, 양단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수행자를 표현하는 것은 우리나라 불교영화만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영화의 원작자가 주로 환속한 사람이었다는 게 이런 경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은작가나 <만다라>를 쓴 김성동 작가나 다들 환속하신 분들로 당연히 수행방법에 대한 모색을 했을 것이고,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밟았을 걸로 생각됩니다. 그렇게 탄생한 소설이 바탕이 되다보니 어느새 이런 형태의 영화들이 우리나라 불교영화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현재 수행자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스님에 의해 쓰여졌다면 아마도 다른 종류의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새로운 종류의 영화에 대한 기대도 가져봅니다.

김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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