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은 대승의 반야공사상을 말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대승과 소승 그리고 공이라는 낱말들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대승의 반야경전으로서는 이상하게 느껴지리만치 그런 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만 대승적이라 주장하는 스스로의 입장을 ‘위없는 도’라던가 또는 ‘구도자의 도’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며, 일반의 대승경전에서처럼 대승(Mahayana)이라는 낱말이 없다. 이에 대한 소승적인 것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신해(信解)가 열등한 사람들’이라던가 또는 ‘구도자의 서원을 세우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상대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역시 소승(Hinayana)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고 있다.
그리고 경전을 구성하는 형식에 있어서도 매우 간소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즉, 일반의 대승경전에서는 경의 첫머리에서 그 설법하는 자리에 모인 대중들 이름을 들어가면서 장황하게 들어내고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금강경』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다만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천 이백 오십인의 대비구중과 함께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시었다.”라고 하여 시작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원시불교경전에서 시작하는 형식과 꼭 같으며, 따라서 일번적인 대승경전다운 데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이 경전이 아직 ‘대승이다’ ‘소승이다’ 하는 의식이 뚜렷하지 않고 공이라는 말조차도 확실하게 쓰이지 않고 있던 시대에 일찍 성립되었던 때문일 것이라 보아진다. 그런 까닭에 『금강경』은 대승사상이 고정화하여 대승이다 소승이다 하는 정식화된 두 가지 관념의 대립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전을 만들어 내고 또한 이것을 믿고 받들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사회의 어떤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였던가. 이에 대하여 경전 자체에서는 아무 말도 없으며 다른 데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초기에 속하는 대승불교 경전에는 불탑에 관한 것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본래 불탑은 부처님이나 그 제자들의 유골 또는 유품들을 모셨던 곳이며, 그것이 차츰 수가 많아지고 규모도 매우 크게 되었으니 아소카왕이 인도의 각지에다 많은 불탑을 건립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이 불탑에 대해서 그 당시 사회의 상층계급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등의 부파에서는 불탑숭배를 장려하면서 대단히 커다란 공덕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 『금강경』 등의 대승경전에서는 탑묘(搭廟)에다 공양하고 보시하는 것보다는 경전을 수지하여 독송하는 것이 훨씬 더 공덕이 많다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경전의 취지를 분석해 본다면 탑묘를 건립하거나 거기에다 여러 가지를 기증한다는 것은 상당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경전을 수지하여 독송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가난한 사람들이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현대의 인도에서는 사는 자기 집이나 방 한 칸도 없어서 건물의 복도나 추녀 밑 그리고 도로에서 잠자며 생활하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라도 매일 새벽이나 저녁 시간에는 갖기 자기가 믿는 종교의 경전을, 예컨대 힌두교의 성전이나 회교의 코란, 불교의 경전 등을 손에 들고 소리 내어 읽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다. 이러한 모습은 아마도 옛적에도 같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경전을 수지하며 독송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일반의 민중 불교신도들에 대하여 『금강경』 등의 대승경전을 설하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여러 반야계통의 경전에서 주장하는 사상의 내용을 요약해 본다면 그 핵심은 공(空 sunya sunyata)의 사상이다. 그것을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며 또한 실천하는 면에서 말한다면 ‘얽매이지 않는 것’ 즉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부파불교의 여러 부파 가운데서도 가장 세력이 큰 ‘설일체유부’에서는 법체의 실유[法體實有]를 주장하였고 이것을 자상(自相) 또는 자성(自性)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즉, 이것은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이며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본체 또는 실체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설일체유부에서는 강조하여 확고한 이론적 체계를 펴나간 데에 대항하여 반야계통의 경전에서는 그것을 엄격하게 부정하였다. 즉 모든 것을 연기에 의하여 존재하는 까닭에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서로 서로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상대하고 서로 상관[相依 相得 相關]하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다른 것과의 인연되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자립해 있는 그런 존재란 있을 수 없다는 무자성(無自性)의 사상을 높이 내세웠으며 이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공(空)’이라는 말이고, 이 공사상에 관한 이론적 체계를 후세에 확립하여 대승불교를 크게 드날린 인물이 유명한 용수(龍樹 B.C. 2~3세기) 보살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설하는 공사상의 표현을 이론적인 면보다는 아직 직관적인 요소가 많은 편이며, 따라서 실천적인 면에서 두드러진 특색이 있다고 하겠다. 어떠한 종교라도 악한일 그치고 착한 일 하기를 권하고 있으며 대승불교의 반야경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나 여기서는 그러한 윤리적 행위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공사상의 기반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베풀어 주어 도와준다는 것은 착안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에서거나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마음에서 하지 말고 바라는 바 없는 마음으로 하여야 한다고 설한다. 즉 보살이 수없이 많은 중생을 제도하지만 그 보살이 만일 내가 누군가를 제도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진실한 보살이 아니며 진정한 제도가 아니다. 제도하는 보살도 공한 마음이며 제도 받는 중생도 역시 공한 존재이며 따라서 제도되어 도달하는 곳도 또한 공한 경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반야공의 경지를 『반야심경』에서는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하였는데, 모든 물질로 모양 있게 만들어진 것[色]운 인연 따라 생겨서 존재하는 동안 시시각각으로 변하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 참 모습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동시에 거기에 그렇게 있는 그러한 것들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며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나는 곳에 그 물질의 바른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는 뜻을 아주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금강경』에서는 공사상을 의지하여 열리는 이상적인 세계인 열반의 경지에도 집착하지 말며 또한 범부 중생이 항상 미하여 괴로워하며 생사에 윤회하는 세계에도 얽매이지 말아야 하며, 그러한 것이 다 같이 집착의 대상이 되지 않는 그 곳에 도리어 매일의 생활 속에서 반야지혜가 활발발하게 작용하는 열반의 경지를 수용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공의 실천적인 것이니, 이러한 경지를 경에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써라[應無所住而生其心]”고 표현하였으니, 마땅히 어디에도 얽매이고 집착하는 데에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리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되 사랑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미워하되 그 마음에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살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음을 정리하여 부파불교와 비교하면서 대승불교를 설명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기존의 불교에서 전하고 있는 경전은 오래된 것이기에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에 가까운 것을 충실하게 전하고 있음에 비하여 새로운 대승경전들은 불교계의 새로운 지도자들에 의하여 창작된 것이기에, 여기서는 부처님을 역사적 존재라기보다 오히려 이상적이며 신화적인 존재로서 존경하고 찬송되고 있다고 하겠다.
둘째로는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전까지의 전통을 따르는 보수적 성향의 불교는 국왕 대신 지방의 수장 장자 즉, 재산가 등의 후원을 받으면서 사회적인 기반을 구축하면서 존재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승불교는 민중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불교쇄신운동이며 거기에서는 후원자를 의지하지 않았고, 『법화경』 같은 데서는 오히려 “국왕이나 대신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였고, 이러한 확신으로써 아주 순수하고 맑고 깨끗한 신앙임을 자부하였다. 그러므로 동산 등의 기증을 받지 않았고 재산가 불교신자가 사원이나 탑묘를 건설하기 보다는 오히려 대승경전을 수지하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해설하고 사경하는 공덕이 훨씬 더 크다고 믿고 권하였다. 그러기에 전통적 보수적 불교교단에서는 인가에서 떨어져 있는 커다란 사원에서 전적으로 교리연구에 치중하고 있었지만 대승불교 교단에서는 중생들과 함께 하는 종교로 존재하기 위하여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이타행’을 강조하였고 실천에 힘을 쏟았다.
자비의 범어는 maitri karuna 이며 maitri 는 진실한 우정이라는 뜻이며 karuni 는 슬픔을 함께 한다는 뜻이니, 이 두 가지 말은 같은 심정이므로 합쳐서 ‘자비’라고 하는 것이므로 이것이야 말로 불교적인 마음가짐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자비의 실천에 있어서의 근본정신으로서는 ‘내 자신이 제도되기에 앞서 남을 먼저 제도케 한다.’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나 자신도 고통 받고 있지만 남도 다 같이 고통 받고 있으니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기에 앞서 남들을 먼저 고통을 멸하는 이상세계의 저 언덕에 이르러 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타행을 실천하는 존재를 ‘보살 bodhisattva’이라고 부르며, 그 뜻은 바른 일을 행하는 훌륭한 사람[正士] 또는 가장 큰 일을 행하는 훌륭한 사람[大士]이라는 것이며, 보살은 위로는 부처님 같은 바르고 큰 깨달음을 이르기를 간절히 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함께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기에 노력하는 존재이니, 본래는 정각을 이루기 전의 석가세전의 수행시대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대승불교시대에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타행’을 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인환 스님/전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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