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제하의 『초식(草食)』, 김이태의 『식성』, 오수연의 『부엌』을 다시 꺼내 봤다. 『식성』의 주인공은 거식증에 걸린 여자이다. 그녀가 거식증에 걸린 것은 애인의 정액을 받아먹은 후부터이다. 화자에게 토악질을 유발하는 것은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세상 그 자체인 것이다. 『부엌』은 연작 장편소설이다 보니 동일한 제재와 주제를 가져가면서도 단편인 『식성』에 비해 구조가 훨씬 중층적이었다.
주인공은 타국에서 집을 구하다가 흰 찬장이 달려 있는 부엌을 보고서 안심을 한다. 부엌을 보는 순간 고향집에 돌아온 것은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 부엌에서 주인공은 다모와 무라뜨를 만난다. 다모는 동물성 식품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양념도 거부하는 반면 무라뜨는 온갖 향신료가 들어간 고기 요리만을 즐긴다. 소설 속에서 부엌은 욕망의 삼각형 구조를 띤다. 그러나 주인공을 구심점으로 형성된 이 삼각구도는 점차 위태로워진다. 끝내 주인공은 다모와 무라뜨의 인육을 먹는 환상을 보기에 이른다. 주인공은 자신의 전부를 그들에게 주고, 자신도 그들을 먹고 싶어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식욕은 성욕으로 곧바로 환치된다.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지우는 행위. 먹고 먹이는 관계 속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내가 모르는 체하는 사이에 굶고, 병들며, 죽고 있을 것’이라는 죄책감과 포식자이자 피식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 숙명에 대한 비의(悲意)이다.
이제하의 『초식』은 식욕과 권력욕의 관계를 밀도 있게 다룬 작품이다. 소설은 화자가 부친의 국회의원 출마벽에 얽힌 일화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자유당, 4.19, 5.16쿠데타에 이르는 격동의 현대사를 묘사하고 있다. 소설의 압권은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도살장 주인이 마을사람들 앞에서 소를 도살하는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 육식성은 파시즘으로, 초식은 파시즘에 억압된 징후로 풀이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세 편의 소설들은 육식성에 내재된 폭력성의 메타포를 잘 간파하고 있다.
‘먹는다’는 단어에는 ‘식량을 섭취한다’는 뜻 말고도 ‘타자에게 가학성을 가해 인간관계에서 우위를 점령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씹는다’는 단어도 ‘음식을 저작(咀嚼)한다’는 뜻밖에 ‘남을 비방하고 헐뜯는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언어습관에서도 식욕이 성욕이나 권력욕의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언어에 대한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면, 하이데거는 세상을 명사로 보지 말라고 강조했다. 명사적 사고는 소유론적인 사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프랑스 언어학자 뱅브니스트는 have 동사가 피동형으로 안 쓰인다는 데 주목했다. 어느 나라든 have의 의미를 갖는 동사는 수동태로 쓰이지 않는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있다’와 ‘가지다’를 혼동한다. 언어학에서도 소유론과 존재론이 나눠지듯이 철학도 마찬가지다. 이에 입각해서 보자면 철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구성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해체철학이다. 구성주의는 자연의 인간동형론에서 출발한다. 구성주의 철학에는 형이하학적인 구성주의와 형이상학적인 구성주의가 있다. 전자가 세상을 어떻게 편리하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면, 후자는 세상을 어떻게 도덕적으로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한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사에서 형이하학적 구성주의는 자본주의의 근간인 경제 지상주의로, 형이상학적 구성주의는 사회주의의 근간인 맑스-엥겔스의 철학으로 발달했다. 그러나 이 두 사상은 양극체제를 구성하는 두 축이었지만, 근대이성주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근대이성주의를 신봉한 결과 인류는 자연개발의 부메랑으로 날아온 환경문제 때문에 생존 자체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광우병이다.
광우병은 이종간 장벽을 무너뜨림으로써 발생한 질병이다. 광우병은 그 피해양상도 치료법도 아직까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원인만큼은 분명하다. 학계에서는 광우병의 원인 물질로 ‘프리온’이라는 단백질을 꼽고 있다. 프리온은 모든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핵산이 없는 단백질이다.
처음 광우병이 발생된 이유는 초식동물인 소에게 양의 내장을 먹였기 때문이다. 광우병은 인간중심의 사고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대변해주는 예이다.
근대 이성주의의 도래이후 인류는 자연을 개발의 도구로만 생각해왔다. 인류는 언젠가부터 ‘종-속-과-목-강-문-계’라는 ‘린네의 명명법’에 맞춰 자연의 구성원을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자연의 구성 주체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속하는지 알지 못한다.
근대 이성주의는 고스란히 테크놀로지에 대한 숭배로 이어졌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자연 파괴의 가속화를 초래했다. 심지어 ‘포디즘(Fordism)적 자본주의’라는 명목 아래 공급에 수요를 맞추는 일까지 생겨났다. 그 결과 개인의 행복을 위해 체제가 있는 게 아니라 체제 존립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됐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불교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전도몽상(顚倒夢想)’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이 공저한 『죽음의 밥상』은 ‘전도몽상’의 시대에 차려지는 성찬이 죽음의 밥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먹을거리가 흔치 않았던 과거라면 어쩔 수 없었을지 모른다. 사람은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잘못된 영양학이 풍미할 때라면 또 모른다. 그러나 지금 오로지 남의 살을 씹고 삼키는 맛과 재미를 위하여 동물을 먹어도 될까?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를 가두고, 때리고, 피를 뽑고, 목을 잘라도 될까? 끊임없이 젖을 짜낼 수 있도록 젖소를 쉴 새 없이 강제 임신시킨 다음, 송아지가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서 빼앗고는 곧바로 죽여 버려도 되는 걸까? 빼앗긴 새끼를 찾아 슬피 울며 발을 구르는 어미 소의 절규를, 자동차 엔진에서 어쩌다 덜덜거리는 소리가 나는 정도로 생각해도 좋을까?”
저자들의 주장은 ‘살육됐다고 의심이 되는 고기는 먹지 말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한다.
자연은 언제나 배가 고플 수밖에 없다. 심지어 먹이사슬의 최고 포식자인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조차도 허기를 면할 수는 없다. 유일하게 자연의 구성원 중 배고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어쩌면 배고픔을 면하는 조건으로 인류는 어머니 대지(大地)의 품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직립보행(直立步行) 할 수 있는 두 발과 불을 쓸 수 있는 두 손을 지닌 유일한 동물. 그리하여 ‘인간은 드디어 요리하는 동물’이 된 것이다. 죽음의 밥상을 차릴 수 있는.

유응오/불교투데이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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