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는 세 사람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논어》

1.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어떤 모습인가요? 지금의 내 모습은 가짜인가요?

▲ 영화 《중앙역》 포스터
괴팍하고 자기만 아는 노처녀 도라(Dora: 페르난다 몬테네그로 분)는 오늘도 중앙역 한구석에 삐그덕거리는 책상을 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한때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지만 지금은 가난하고 글 모르는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며 연명하고 있다. 방탕한 아들을 용서하겠다는 아버지, 지난 밤 함께 했던 연인을 그리워하는 청년, 아들이 아빠를 보고 싶어한다는 말로 그리움을 감추는 아내의 사연을 도라는 뚝뚝한 글씨로 편지지에 옮긴다. 주절주절 읊어대는 사람들의 청승이 신물난다는 듯 휘갈겨 쓴 도라의 편지들. 순박한 사람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그리움이 담긴 그것들을 도라는 우체통이 아닌 쓰레기통으로 보내 버린다.

버려진 편지뭉치 중에는 남편을 간절히 기다리는 아나(Ana: 소이아 리라 분)의 편지도 있었다. 그러나 곧 아나는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고아가 되어버린 아들 조슈에(Josue: 비니시우스 드 올리베이라 분)는 중앙역 주위를 맴돈다. 도라는 갈 곳 없는 조슈에를 입양기관을 사칭하는 인신매매단에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리모콘 달린 TV를 장만한다. 그러나 TV를 보며 뿌듯해하던 마음은 어느새 죄책감으로 바뀌고, 날이 밝자마자 도라는 필사적으로 조슈에를 구해낸다. 무작정 조슈에와 함께 리오를 도망쳐 나온 도라는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에 조슈에의 아버지를 찾아주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조슈에는 자신을 팔아넘긴 도라가 사기꾼 같고, 도라는 조슈에가 짐처럼 부담스럽다.

거친 모래 바람이 부는 사막. 미움만 가득한 두 사람. 그들 사이의 골 깊은 미움은 녹록치 않은 여행길에서 차츰 믿음으로 변해가고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은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 말짱한 시계를 차비로 내고 트럭 뒷자리에서 도라는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조슈에는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아버지를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 끝에서 그들이 발견한 건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신의 참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남겨놓은 형들을 통해서 자신의 뿌리를 발견하는 조슈에. 그리고 조슈에를 통해서 오랫동안 잊어왔던 자신의 따뜻한 본성을 느끼는 도라. 조슈에 몰래 새벽 버스를 탄 도라는 조슈에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그 편지는 다시금 '나'를 사랑하게 된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로드무비가 그렇듯 영화 《중앙역》도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영화입니다. 조셉 켐벨이 도식화한 신화 속 영웅들의 서사구조를 그대로 따라갑니다. 영웅들의 서사구조란 ‘분리→입문→귀환’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 전개를 말합니다. 도라는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던 중앙역으로부터 분리되어 ‘세상 끝’까지 모험을 떠나게 됩니다. 이 여행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건이 생기고… 그런 와중에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고 갈등과 화해가 융해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본래 있던 자기 자리로 돌아옵니다.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아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여러 의미로 읽힙니다. 가족영화로도, 성장영화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종교영화로 이해해 볼까합니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름은 성서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름입니다. 물론 서양 사람들은 성서속 인물이나 성인의 이름으로 작명하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영화는 기독교적 요소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조슈아는 여호수아이고, 조슈아가 찾아 나선 아버지 제수스는 예수, 조슈아의 이복형인 모제스와 이사에쉬는 각각 모세와 이사야입니다. 그렇다면 도라는 누구일까요?
편지를 쓰던 책상에서 도라가 마주한 것은 세속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입니다. 세속 사람들은 간밤에 누군가를 사랑했고, 떠난 사람을 원망하고,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게 세속의 모습이고 보통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런 삶에 대해 도라는 무감각합니다. 오히려 조롱하고 멸시하지요. 어쩌면 일체의 세속적 가치와 단절된 채 오직 하느님의 세계만을 추구하며 높은 담장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중세 수도사들의 속마음은 아닐런지요? 사람들이 성직자 앞에 무릎 끓고 고백하는 죄는 세속을 살아가는 일상이기도 합니다. 그런 속인들 앞에서 도도하고 거만한 성직자가 있다면 도라와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이런 도라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모험에 나섭니다. 이 모험의 길은 조슈아를 위한 길이기보다는 도라 자신의 위한 길이 되지요. 세상 끝에서 도라가 만난 것은 바로 잃어버린 자신입니다. 마지막 날 거울 앞에 편지를 내려놓고 리오데자네이루 행 새벽버스를 탄 도라는 회환의 눈물을 쏟아냅니다. 그리고 한 때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고백합니다.

“나도 아버지가 보고 싶다. 그리운 게 너무 많아.”

2. 길 위에 선 성자, 프란체스코

▲ 엘 그레코 작, 《성 프란체스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아버지는 예수입니다. 예수를 만나려면 길 위에 나서야 합니다. 중앙역 책상 앞에 앉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일상을 한 귀로 흘려보내 가지고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지난 호에서 살펴 본 것처럼 중세시대 기독교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높다란 절벽위로 오르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더 높이 담장을 두르고 세속과 단절된 채 침묵과 기도 속에서 그들만의 고결한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엄숙과 경건이 중세 천년을 지배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예수가 살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는 세속과의 단절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잠시 세속을 떠나 광야에 들어간 것도 세속에서의 활동을 위한 통과의례일 뿐입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억압과 차별받는 사람들 옆에서, 그들을 위로해 주고, 병을 치료해주고, 온갖 억압에 저항했습니다. 이런 예수의 삶 자체가 하느님의 가르침입니다.

중세 말, 일군의 수도사들이 수도원의 높은 담장을 허물고 죄악에 물든 속세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예수가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준 가르침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멤버들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아시시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는 젊어서 한 때 향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돌이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버리고 평생을 청빈하게 살며 이웃을 위해 헌신합니다. 길 위에서 프란체스코가 만난 이웃은 무지몽매하고, 지난밤의 사랑을 갈구하고, 그에게 혹은 그녀에게 애걸복걸 매달리는 속인들입니다. 이들의 경멸스런 애정행각과 한심한 욕망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알아야 진정한 이웃사랑이 될 것입니다. 이제 세상 끝에서 다시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도라는 중앙역을 스쳐가는 속인들의 속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온전히 느끼게 됩니다. 간절하게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는 조슈아에게 도라는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조슈아의 소망에 믿음으로 답해주는 것, 이게 진정한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3. 새로운 수행자, 보살이 걷는 길

대부분의 대승경전에는 보살(Bodhisattva, 菩薩)이 등장합니다. 대승불교 초기에 등장하는 경전이 반야부계통의 경전인데, 우리가 흔히 반야경으로 알고 있는 《반야바라밀다심경》도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했다.”로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대승경전인 《화엄경》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이야기를 이끌고 가지요.

불교의 역사에서 보살의 등장은 전혀 새로운 불교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보살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아라한(Arhan, 阿羅漢)이 주축이었습니다. 아라한은 간단히 나한(羅漢)이라고도 하며, 응공(應供)·응진(應眞)·무학(無學) 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는 마땅히 공양을 받을만하고[應供], 진리를 따르며[應眞], 더 닦을 것도 없다[無學]는 의미입니다. 또 불생(不生)·이악(離惡)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다시는 미망(迷妄)이 생기지 않으며[不生], 모든 잘못된 것에서 떠났다[離惡]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궁극의 진리를 완전히 터득해서 일체의 미망과 어리석음을 여의었기에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의미이지요. 불교 성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계위가 아라한입니다.

이런 아라한을 대승불교에선 비판합니다. 그들은 냉철하고 명석한 머리와 깊은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과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은 없었던 것입니다. 대승불교가 본인의 깨달음과 해탈 이전에 먼저 이웃 사랑과 중생제도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은 단순히 실천수행의 우선순위가 바뀐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불교 교리의 다른 해석과 재구성이 뒤따라옴을 내포합니다.

프란체스코가 굳게 닫힌 수도원 문을 열고 세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는 것은 예수와 하느님의 성격이 달라짐을 의미합니다. 프란체스코가 활동하면서 비로소 십자가에 못 박힌 채 고통 끝에 고개를 떨군 예수상이 그려집니다. 이전 언제나 당당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심판하는 위대한 심판자의 모습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요. 이런 변화는 예수도 인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고, 결국 서구기독교의 전통적인 삼위일체설이 부정되거나 적어도 상당히 수정되어야만 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제 인간의 시선으로 예수를 그리고 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르네상스의 시작이지요. 이런 변화에의 압력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그 권위를 상당부분 잃게 되겠지요. 따지고 보면 르네상스는 중세 자체를 부정하며 출발합니다. 중세를 암흑시대로 규정한 사람은 바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였습니다. 인간이 주체인 고대 그리스 인문주의 시대와 근대 르네상스 인문주의 시대 사이에 낀―그래서 중세라는 말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어두운 암흑의 시대가 바로 중세입니다. 근대 유럽인에게서 중세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중생제도(衆生濟度)가 전면에 등장한다는 것은 불교가 개인의 문제를 중심으로 구성되던 체계에서 사회와 공동체의 문제를 중심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하였음을 뜻합니다. 이런 변화는 불교 곳곳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그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수행자들이 바로 보살입니다. 따라서 보살은 아라한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아라한에서 보살로의 변화는 기독교가 프란체스코 이전과 이후의 변화와도 흡사합니다. 다만 기독교는 프란체스코 이후의 변화 압력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통적인 교리를 고수함으로써 독단(dogma)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반면 불교는 적절할 뿐만 아니라 선도적으로 변화해 가면서 인류문화사와 지성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한 문화와 철학을 창조해 내지요. 이 대승불교운동이 예수 탄생 이전 기원전 1세기부터 일군의 보살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4. 봄날의 꿈처럼 흔적이 없다

교리의 재구성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부분이 육바라밀(六波羅蜜)입니다. 주지하다시피 근본불교의 실천수행은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정(正定)의 팔정도는 깨달음의 주체로써 개인의 문제의식이 아주 분명합니다. 여기에 뚜렷한 공동체적 사유는 아직 보이지 않지요. 하지만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라고 하는 육바라밀은 처음부터 공동체적 문제의식을 표출합니다. 보시는 흔히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합니다. 이는 머무름이 없는 보시라는 뜻으로, 곧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주고받는 일도 없는, 이른바 삼륜체공(三輪體空)입니다. 세 가지 수레바퀴가 모두 공(空)한 것이지요. 소동파(蘇東坡)의 시 “일지춘몽처럼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事如春夢了無痕]”입니다.

▲ 일본 대덕사에 있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에 보이는 선재동자
다시 영화 《중앙역》을 볼까합니다. 이 로드무비에서 주인공은 도라입니다. 도라는 편지 쓰는 일상에서 벗어나 세상 끝까지 모험을 떠납니다. 그 도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요. 마치 《화엄경·입법계품》의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53명의 선지식을 차례로 만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선재동자의 도정은 그저 우연의 연속일까요? 선재동자가 만나는 선지식 하나하나에는 긴밀한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전을 읽는 사람들은 이 연결고리의 배후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존재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선재동자를 깨달음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존재가 바로 문수와 보현이라면, 도라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존재는 누구일까요? 그저 우연히 도라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은 것일까요? 이 여행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존재가 바로 조슈아입니다. 어떻게 보면 조슈아는 자기 어머니를 바치면서까지 도라의 자아찾기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저 우연히 조슈아의 아버지 찾기에 도라가 얽혀 들었고, 그 우연한 사건들이 이어지다가 우연의 결과로 잃어버린 자아를 찾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지요. 그러니 조슈아가 보살임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조슈아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도라에게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편지가 원하는 사람에게 도착하리라고 믿을 때, 아니 어쩌면 이런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저 그들의 소망을 말할 때, 조슈아는 홀로 도라를 의심하지요. 도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존재, 그리하여 잃어버린 자아를 찾게끔 도와주지만, 오히려 자신이 도움을 받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존재가 조슈아입니다.

보살은 결코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오늘도 길에 나서면 만나는 많은 사람들, 호떡 굽는 아줌마, 가판 위에서 엑세서리를 파는 젊은이, 환경미화원, 채소가게 아저씨가 모두 우리의 보살입니다. 투자에 실패한 어느 오만한 사람에게 이들은 겸손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왜 겸손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것이지요. 그런 깨달음을 통해 삶의 본질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해줍니다. 길에 나서면 흔히 마주치는 아저씨 아줌마가 그래서 모두 보살입니다.

김문갑/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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