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수와 소년의 동거를 다룬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미국, 2012)를 보면서 언젠가 읽은 책이 생각났습니다. 책에는 주인공이 키우는 개 세 마리가 이웃집 앞마당을 피바다로 만들어놓은 사건이 묘사됐습니다.
풍산개들이 점령한 이웃집 마당은 개들의 시체가 널브러져있고 피가 낭자했습니다. 그런데 처참한 풍경에 분노하는 것은 인간뿐이었습니다. 정작 당사자인 개들은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살생의 범인인 개들은 주인이 나타나자 꼬리까지 흔들며 반겼고, 이 현장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는 개들처럼 갑자기 온순해졌습니다.

사람 입장에서 봤을 때는 끔찍한 장면인데 개들은 그렇지 않아 보였습니다. 개들에게는 사람이 갖고 있는 죄의식이 없으며, ‘살아있는 생명체를 이유 없이 죽이는 것은 나쁘다’와 같은 ‘도덕의식’이 부재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의문이, 야생의 본능대로 사냥을 한 풍산개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럼 죄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까지 가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안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 또한 위 이야기에서 가졌던 의문에서 출발합니다. 과연 동물에게 살생죄를 물을 수 있을까? 얼룩말을 먹은 하이에나에게 죄가 있다면 하이에나를 죽인 호랑이는? 더 나가 만약 인간이 동물의 야성 상태에서 살생을 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런 근원적 의문에 대한 답을 표현한 영화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1884년 7월 난파선 미뇨넷호에서 일어났던 식인(食人)사건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더들리와 스티븐스 재판’은 19세기 영국에서 실제 있었던 재판인데, 미뇨넷호가 침몰했을 때 구명선에서 목숨을 건진 선원에 관한 재판입니다. 더들리라는 선장이 스티븐스라는 항해사와 모의해서 함께 난파됐던 급사 소년을 살해하고, 그 인육을 먹으면서 바다생활을 버티다가 구조되고, 이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수하고 재판받는 내용입니다. 더들리에게 목숨을 빼앗긴 소년의 이름은 리처드 파커였습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나오는 벵갈 호랑이의 이름도 리처드 파커였습니다. 아마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원작자인 얀마텔은 이 재판에서 모티브를 얻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소설가 얀 마텔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통해 ‘더들리와 스티븐스 재판’을 판단한다면, 영화는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바다 위는 생존본능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이고 이성이 낄 틈이 없는 상황이었다, 인간은 동물의 상태였었다, 그런 상태에 있었던 인간을 이성의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이웃집 개들을 물어 죽인 풍산개를 사형에 처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겠지요.

불교에서는, 죄라는 것이 자성을 가진 것이 아니고 마음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죄도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비우게 되면 ‘나’가 없어지게 되고, 그럼 지옥에 갈 ‘누구’도 없고, 죄업에 대한 과보를 받을 ‘누구’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에서 보았을 때 ‘나’라는 의식이 없는, 동물의 생존본능에 의한 살생에 대해 죄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에게 면죄부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는 인도 프랑스풍 마을에서 시작됩니다. 이곳에서 파이는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의 파이는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이름과 관련 있습니다. 파이의 본명은 피신 몰리토 파텔인데, 첫글자 ‘피신’은 영어로 오줌싸개라는 뜻입니다. 아이들은 파이를 오줌싸개라고 놀렸고, 주인공은 이 별명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줄여서 ‘파이’라고 소개하고, 칠판에 빽빽하게 원주율을 외워서 적었습니다. 이후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한때는 찌질한 오줌싸개였고, 이제는 원주율의 무한소수를 외우는 머리 좋은 파이가 되었습니다. 이름이 달라지면서 사람도 달라졌습니다. 파이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는 언어의 의미를 표현한 것이고, 인간이 현존 보다는 관념적 존재임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특징은, 파이가 매우 종교적인 아이라는 것입니다. 힌두교도이면서 채식주의자인 어머니를 닮아 파이 또한 채식주의자이면서 힌두교 신을 비롯해 알라와 예수도 믿는 다종교주의자로 성장했습니다. 신에 대한 헌신 안에서 파이의 어린 시절은 평화롭고 행복했습니다. 어린 파이에게서 신은 자비로웠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처럼 신도 그렇게 따뜻하고 평화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를 만나면서 깨졌습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동물원에서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의 벵갈 호랑이를 만납니다. 아버지는 파이를 호랑이 가까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잔인한 본성이 있으니까 위험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파이에게 호랑이의 야성을 확인시키기까지 했습니다. 노루 한 마리를 잽싸게 낚아채 물어 죽이는 호랑이를 보면서 파이는 두려움과 함께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평화도 깨졌습니다. 신에 대한 회의감에 빠졌습니다. 정말로 선한 신이 있다면 왜 벵갈 호랑이를 벌하지 않는가, 왜 신은 죄 없는 양을 죽도록 내버려 두는가, 와 같은 의문에서 시작된 회의감이 어린 시절을 구성하던 세계에 균열을 가져왔습니다.

영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는 ‘호랑이’에 대한 해석입니다. 호랑이에 대해 이안 감독은 ‘자연’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연은 인간과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생각과 이성, 판단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상태를 의미하고, 대부분의 야생동물은 아마도 이 상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파이가 호랑이에게 거리감을 보인 것은 야성과의 거리감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야성은 파이에게서 불편하고 거북한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과 동물원에서 키우던 동물들과 함께 파이 가족은 캐나다로 떠나는 화물선을 탔다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모두 죽고 파이만 구명선에서 간신히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구명선에는 다리를 다친 얼룩말이 타고 있었고, 바나나를 타고 오랑우탄이 구명선에 오르고, 이어 사람인 줄 알고 구해주었는데 배에 오른 것은 호랑이 리처드 파커였습니다. 나중에 하이에나까지 나타났습니다. 항해가 길어지자 동물들은 배가 고팠고, 가장 먼저 얼룩말이 죽고, 하이에나에게 오랑우탄이 죽고, 이어 리처드 파커가 하이에나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배에는 호랑이와 파이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서 이제 어른이 된 주인공 파이는 자신의 얘기를 쓰려는 작가에게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가 두 번째로 들려준 이야기는, 사실 구명보트에는 파이와 어머니, 그리고 배에서 만났던 친절한 불교신자, 그리고 성격이 나쁜 주방장이 타고 있었는데, 불교신자가 다리를 다쳐 쓰러져 있다가 죽었는데, 그 인육을 이용해서 주방장이 물고기를 잡는 걸 보고 엄마가 화를 냈고, 그래서 주방장이 엄마를 죽였으며, 이에 분노한 파이가 주방장을 죽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주방장은 하이에나로, 엄마는 오랑우탄으로, 불교신자는 얼룩말로, 자신은 리처드 파커로 바꿔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인 파이는 작가에게 두 이야기 중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냐고 묻습니다. 작가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더 낫다고 합니다. 누군가 죽이고 죽는 현상은 똑같지만 한 편에는 사람이 나오고, 다른 편에는 동물이 나오는데,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더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 이야기는 관념이 끼어들게 되고, 즉 죄의식이 끼어들게 되지만 동물 이야기에는 순수한 현실만이 존재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영화는 끊임없이 인간이 갖고 있는 관념에 대한 회의감을 표현했습니다. 동물의 야수성이 극단적으로 순수하다는 의식을 갖고, 결국에는 신의 의지와도 오히려 동물의 야수성이 더 어울린다는 결론까지 도출해냅니다.

구명선에서의 파이는 어린 시절의 파이와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어린시절의 파이가 이성과 종교, 즉 인간으로서의 특성이라고 규정짓는 것들에 의해 지배받는다면 구명선에서의 파이는 야성과 생존본능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파이의 상태를 영화는 ‘호랑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표현했습니다.

문명으로 돌아온 파이는 호랑이와 헤어질 때 매우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돼서 다시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호랑이를 그리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호랑이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운다고 했습니다. 즉 파이는 문명사회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자신의 야성과의 결별을 슬퍼했고, 또한 그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으로 추켜세우며 동물에 대해 우월성을 주장해왔습니다. 그 근거는 이성에 바탕을 둔 종교와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인간의 이성을 마음껏 조롱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극단적이게도 동물의 야성을 신과 연결시키면서 인간의 이성을 비판했습니다. 이성이 인간을 근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이안 감독이 이런 결론을 내린 게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이전 영화 <색, 계>에서도 인간의 이성에 대해 비판을 했습니다. 이성이 인간을 외롭고 불안하고 개체로 전락시킨다고 했었습니다. 이 영화도 이런 결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의 결론에서 한 발 더 나가 본성이 신의 특성과 맞다고 할 정도로 인간의 이성은 우릴 신에게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지요. 과학과 문명이 만개하고, 가장 이성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을 그는 영화를 통해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김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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