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한국, 1989) 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불교적인 관점에서 심도 있게 탐구하는 영화입니다. 마치 과학자가 현미경 렌즈를 통해 대상을 관찰하듯 감독은 불교라는 렌즈를 통해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을 깊이 있게 파고들어 성과 있는 결과물을 내놓습니다. 또한 감독의 렌즈는 선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영화는 엄밀하게 말하면 선승의 렌즈를 통해 현상계를 설명하고 인간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의 의문에 대해서도 선불교의 입장을 빌어 명쾌하게 답을 제시하는 편입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등장은 당시 한국 영화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듣도 보도 못했던 신인 감독이 완전 새로우면서도 영화문법에 비추어 전혀 손색이 없는 영화를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80년대는 김기덕도 홍상수도 나오지 않았던 시기로 우리나라 영화가 해외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못 내고 있을 때인데 이 영화는 세계 영화제 중 하나인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당당하게 그랑프리인 황금표범상을 비롯한 중요한 상을 휩쓸었으며, 칸느 영화제에서도 ‘주목할 만한 부문’에 선정됐기 때문입니다. 신인 감독으로서 놀라운 성과였습니다. 이후 배용균 감독은 사람들의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됐으며, 다음 영화가 기다려지는 감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제목 참 특별합니다.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 정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먼저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굉장히 궁금하지만 정답을 찾을 길 없어서 의심이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이런 걸 화두라고 하지요. 간화선에서 중심을 삼는 게 화두고, 영화는 화두의 형식을 빌어 제목을 달았습니다.

이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염화미소’와 관련한 문장을 보여줍니다. 까만 화면에 ‘그는 진리를 묻는 제자 앞에 한 송이 꽃을 들어보였다.’는 하얀 문장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감독이 하고자 하는 얘기가 부처님께서 들어보였던 연꽃의 의미와 궤를 같이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가섭이 유일하게 그 의미를 알았던 것처럼 감독 또한 자신이 보여주는 영화의 의미를 관객이 알아채기를 기대한 장면이면서 또한 영화가 현상계 이면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예고이기도 합니다.

화두라는 게 언어와 표현 너머의 소식으로, 이것은 현상계를 뛰어넘을 때 밝혀질 수 있는 것으로서 화두는 현상계의 부정에서 출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상계에 발을 빼고 있는 사람에게 화두는 수월하게 풀리는 수수께끼고, 현상계에 발을 깊게 묻고 있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깜깜한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용균 감독이 만든 이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아주 새로운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상계를 통해 현상계를 부정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부처님께서 보여주었던 ‘염화미소(拈華微笑)’처럼 말이나 표현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해야 할 것을 설명하려는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도전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감독은 어려운 레이스를 성공적으로 완주했습니다.

영화에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한 스님은 임종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노스님으로 깨달음을 얻은 스님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스님은 젊은 스님으로 그는 가장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일 나무하고, 절 살림 살고, 큰스님 시봉 하고, 절 안팎의 모든 일이 그의 노동에 의해 굴러가는 것도 그렇지만 마음속에 번민이 있어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출가는 했지만 집에 두고 온 눈 먼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근심과 걱정, 그리고 미안함과 애착, 이런 감정들로 마음이 번잡합니다. 마지막으로 동자가 있습니다. 동자는 2살 때 시장에 버려져있는 걸 노스님이 업어와 키웠습니다. 동자는 엄마의 얼굴도 모르기 때문에 그리움도 슬픔도 없지만 어린 아이들이 가질만한 외로움, 무료함, 이기심, 순박함, 이런 태초에 가져온 감정들을 갖고 있기에 완전히 행복하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인물 구성을 살펴보면 두 부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노스님인 혜곡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자 나머지 둘에 대해서 스승 역할을 하고, 또한 아주 행복한 세계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해진 동자와 기봉스님은 노스님과 달리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면서 이런 감정들을 해결하여 노스님의 자유자재한 행복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학생 신분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어린 두 스님들이 수행과 배움을 거쳐 큰 스님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주 골격입니다.

먼저 괴로운 사람이 괴로운 이유를 찾아내야 하고,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이유를 찾아내야 합니다. 기봉스님이 괴로운 이유는, 집에 두고 온 눈먼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근심 때문입니다. 물론 그는 눈 먼 어머니와 함께 살 때도 괴로웠습니다. 생활의 무게와 알 수 없는 공허감 때문에 그는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을 찾고자 절로 왔고, 마침내 노스님 앞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속가에서는 영혼이 목말라서 괴로웠는데 절에 와서는 오히려 속가 걱정으로 괴롭고, 이래도 괴롭고 저래도 괴로운 처지였습니다. 그는 그 괴로움에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수행합니다. 그렇지만 괴로움은 갈수록 더해만 갑니다.

그리고 해진동자의 괴로움은 어느 날 새 한 마리를 잡아오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계곡에서 수영을 하던 동자는 우연히 날아가는 새 한 쌍을 발견하게 되고, 동자는 무슨 마음에서인지 돌을 던져 새를 잡습니다. 돌에 맞아 다친 새를 절로 데려와 몰래 숨겨놓고 물도 주고 하면서 간호를 하지만 새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습니다. 새가 죽자 동자는 새를 기왓장 아래 숨겨둡니다. 혹시나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 죽은 새의 시체에서 구더기가 바글바글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 모습에서 동자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죽음을 체험한 동자에게 현상계는 불안과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오줌 누러 일어났다가 나무에서 울어대는 새소리와 산짐승 소리에 잔뜩 겁을 먹고 도망가듯 방으로 숨기도 하고, 큰스님 약사발을 들고 가다가도 새소리에 놀라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동자 주변에는 늘 새 한 마리가 쫓아다녔습니다. 동자가 죽인 새와 한 쌍을 이뤘던 새로 짝 잃은 새입니다. 동자에 대한 원한과 잃은 짝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동자가 갖고 있는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걸 상징하는 매개물입니다. 결국 동자는 새 한 마리를 갖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다가 이렇게 불편한 감정들을 무더기로 껴안게 된 것입니다. 기봉스님이 집에 두고 온 노모에 대한 죄의식과 별로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절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사람인 노스님은 이들이 불행한 이유를 알고 있었고, 스승답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노스님은 해진스님이 버려진 자기 이빨을 찾아내서 소중하게 움켜잡는 걸 보고는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이빨을 움켜잡는 그 마음 때문에 앞으로 감당해야 할 고통이 노스님의 눈에는 보였기 때문에 나온 탄성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혜곡스님은 어린 해진 동자에게 그 이빨이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다고 타이릅니다. 사실은 전혀 다를 게 없는데, 이빨은 소중하고 돌멩이는 나와 무관하다는 마음의 분별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해진스님이 버려진 이빨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고통의 근원은 ‘자기’라는 소유욕에서 출발했습니다. 해진스님의 이빨이 예전에 해진스님의 몸에 붙어있을 때 해진스님의 것이었지만 이제 길에 버려졌는데도 여전히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해진스님이나 기봉스님이나 모두 몸을 자기라고 생각하는 데서 고통이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빨이 수명이 다해 폐기되는 것처럼 이 몸도 그렇게 사라질 것인데 절대로 근본자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시작된 ‘이 몸이 바로 나’ 라는 생각 때문에 자기라는 정체성이 생기고, 내가 있으니까 죽는 걸 걱정하게 되고, 또 이 몸을 낳은 부모와 형제도 갖게 되고, 거기서 많은 소유욕이 생겨나고 애착이 생기고, 고통이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영화는 혜곡스님의 죽음을 통해서 이빨 에피소드에서 보여주었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킵니다. 이빨이 버려지면서 길가의 돌멩이와 다름없어진 것처럼 육신 또한 그런 운명이란 사실을 죽음이라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통해서 관객에게 확인시켜주었습니다.

혜곡스님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아는 도인이었습니다. 동상에 걸린 살을 한 근이나 잘라낼 때도 웃을 수 있는 경지, 육신에 대한 애착을 많이 끊어낸 경지에 이른 혜곡스님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스님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제자인 기봉스님에게 죽음과 관련한 당부를 상세하게 합니다. 자기가 죽으면 관으로는 반닫이를 쓰고, 입었던 옷 그대로 그 관에 넣어서 하루 밤 사이에 다 태워달라고 당부합니다. 그의 당부에는 몸에 대한 어떤 존중도 슬픔도 보이지 않습니다. 수명이 다한 이빨을 길가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듯이 쓸모가 없어진 고기 덩어리를 처리하는 것 같은 담담함이 느껴지는 어조였습니다.

혜곡스님의 육신은 스님의 유언처럼 장작더미 속에서 밤 내내 타들어갑니다. 영화는 오랜 시간 육신이 불 속에서 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궁극적으로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이 이 속에 들어있으니까요. 혜곡 스님도 기봉스님에게 자신의 죽음을 당부하면서 자신의 다비식이 제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활구(活句)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하고 싶은 말은 육신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직시해서 그 허구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육신은 결국 이렇게 불구덩이 속에서 타들어가고 한 줌의 재로 남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는 집요하게 불길을 잡습니다. 그렇게 밤 내내 타들어간 육신은 아침이 되자 재로 남습니다. 제대로 타지 못한 뼛조각은 기봉스님이 다시 빻아서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장면까지 리얼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렇게 훌륭한 스님도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진다는 걸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세부적인 묘사도 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내 완전한 재로 남은 혜곡스님의 육신은 기봉스님에 의해 뿌려집니다. 그 재는 물 속에 뿌려지고 바람에 날리고 숲속에 버려지고 하면서 흙의 양분이 되고, 물고기 밥도 되고, 마침내 육신은 지수화풍으로 돌아갔습니다.

영화가 보여주려고 했던 가장 중요한 퍼포먼스이자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끝나고 과연 노스님의 두 제자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노스님이 죽음을 통해 보여주었던 활구를 통해 기봉스님과 해진스님은 성장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또한 그들의 성장이 이 영화의 중요한 대목입니다.

혜곡스님의 입적 후 기봉스님은 산을 내려갑니다. 해진스님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봅니다. 뜬구름에게서는 어디든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 또한 그렇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소와 함께 떠나갑니다. 여기서 소는 불성을 의미합니다. 불 속에 들어가더라도 꽉 깨문 화두를 뱉어서는 안 된다는 혜곡스님의 당부처럼 그가 어느 곳에 있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한 것은 화두를 늘 챙겨서 불성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기봉스님은 스승의 죽음을 통해 불성에 더욱 다가간 삶을 살게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진스님은 절에 남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그는 여법하게 예불을 올립니다. 그리고 해진스님을 맴돌던 짝 잃은 새는 떠나갑니다. 이는 해진스님이 새의 죽음을 통해서 갖게 됐던, 불안과 두려움, 애착, 죄의식 등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 또한 쓸데없는 감정을 극복하고 수행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을 알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이 영화를 통해 기봉스님과 해진동자처럼 한 단계 의식이 확장된 경험을 했습니다. 삶이라는 건 이빨이 입 속에서 제 역할을 하는 정도고, 죽음이란 빠진 이빨이 버려지는 것 정도의 차이 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빨이 한때는 내 것이었지만 어느 순간 무관한 물건이 돼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육신 또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본 후 다른 의문이 남았습니다. ‘이 몸이 흙과 물과 바람으로 허공에 흩어지고 나면 나의 주인공은 어디로 가는가?’ 라는 화두를 하나 챙기게 됐습니다.

김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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