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떠나 해탈에 이른 수행자를 일컫는다는 것은 수 차 언급한바 있다. 그러면 모든 아라한은 깨달음의 경지도 동일하고, 그 외의 초인적인 능력에 있어서도 동일하다고 보아야 할까? 이 물음에서 전자에 대해서는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최초의 다섯 비구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부처님은 ‘이 세상에는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다’라고 선언적으로 말씀하셨으며, 아라한을 규정하는 정형구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행위는 성취되었으며,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냈고, 다시는 이와 같은 몸을 받지 않는다’의 내용이 모든 경전에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후자의 물음은 어떨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답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이전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초인적 능력은 사실 깨달음과는 상관이 없다. 하늘을 날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다른 이의 마음을 모두 알고,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이나 사건을 보는 등의 능력은 사실 깨달음의 내용과는 전연 관계가 없다.

그런데 아라한의 경우, 초인적인 능력을 구사할 줄 아는 아라한과 그렇지 않은 아라한의 구별이 경전 상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구분은 사실상 수행법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려(Jha-na) 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위빳싸나(Vipassana-) 수행이다. 전자는 선정 수행 혹은 사마타 수행이라고도 하며, 후자는 관법 수행이라고도 한다.

이들 두 수행법 가운데 어느 수행법을 통해 아라한이 되었느냐의 차이에 의해 초인적 능력을 구사할 줄 아는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초인적 능력은 정려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경전에서는 기술하고 있다. 즉 위빳싸나 수행을 통해 아라한이 된 수행자들은 초인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게 된다. 경전에서는 이를 구분하여, 심해탈자(心解脫者)와 혜해탈자(慧解脫者)란 용어로 나타낸다.

심해탈은 cetovimutti를 번역한 것으로 ‘마음의 해탈’을 의미하고, 혜해탈은 pan~n~a-vimutti로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의미한다. 따라서 심해탈자는 ‘이미 해탈된 마음을 지닌 자’이며, 혜해탈자는 ‘지혜를 수단으로 해탈의 상태에 도달한 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되었든, ‘해탈’된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심해탈자와 혜해탈자가 본래부터 나뉘어져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경전의 기술 내용을 보면, 이 두 해탈자(아라한)의 구분은 위빳싸나 수행법이 고안된 이후부터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최고층의 경전을 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위빳싸나 수행과 관련된 내용은 기술되어 있지 않고, 고층의 경전에 가서야 확인되며, 그 이후의 산문 경전은 거의 위빳싸나 위주의 수행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따라서 최초기 불교 수행법은 정려를 위주로 한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는 심해탈자와 혜해탈자의 구별도 없이, 오로지 심해탈과 혜해탈은 아라한이 된 한 수행자의 해탈 상태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때의 아라한은 ‘모든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심해탈), 그러한 해탈 상태에 있음을 있는 그대로 아는(혜해탈)’, 즉 두 가지 해탈을 구족한 아라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빳싸나 수행이 고안되고, 이를 통해 깨달음에 이른 수행자가 나오면서, 심해탈자와 혜해탈자로 구분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전자를 구분해탈자(俱分解脫者), 즉 두 가지-심해탈과 혜해탈- 해탈을 구족한 아라한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 둘을 구분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정려’수행으로, 구체적으로 4정려/4선 수행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혜해탈자는 ‘정려의 경지를 몸으로 경험하지 않고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으로 규정하고, 심해탈자 혹은 구분해탈자는 ‘정려의 경지를 몸으로 경험하고 해탈한’ 아라한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혜해탈자를 규정짓는 특징인 ‘지혜’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경전에서는 이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사성제나 삼학, 혹은 오온 무아, 연기 등에 대한 명확하고 확실한 깨달음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한다. 이것은 달리 표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 곧 진리를 완벽히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지혜가 나오는데, 이 지혜로 ‘무명’이 제거됨으로써 해탈에 이른 아라한이 혜해탈자인 것이다. 반면에, 심해탈자는 정려 수행을 통해 ‘갈애’와 같은 모든 정서적인 번뇌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마음이 어떠한 경우에도 동요됨이 없는 ‘평정함’을 성취하여 해탈에 이르게 된다. 이 때, 심해탈자에게는 모든 번뇌의 소멸과 함께, 마음이 해탈했다는 인식(an~n~a-)이 발생하는데, 이 인식이 바로 심해탈자의 지혜가 된다.

따라서 심해탈자와 혜해탈자의 지혜에는 약간의 차이가 인정된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이 두 해탈자는 명확히 다른 방법을 통해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여 아라한이 됨을 알 수 있다. 즉 심해탈자는 정려 수행이고, 혜해탈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명확히 분석하여 이해하는 방법인 위빳싸나 수행이다.

그럼, 어떤 수행방법이 더 쉬운 수행법일까. 경전에서는 수행의 쉽고 어려움을 가리고 있지는 않다. 다만 수행 결과의 차이로써 심해탈자인 아라한에게는 신통력/초인적 능력이 인정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양의 펫터나 슈미타우젠과 같은 학자들은 정려 수행을 통해 아라한이 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위빳싸나 수행법이 고안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것은 심해탈자나 혜해탈자가 모두 아라한이지만, 심해탈자는 특히 정서적 번뇌를 모두 극복한 반면, 혜해탈자는 이지적 번뇌를 중심으로 극복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설득력 있는 견해라 생각된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이들이 각각 자신들의 수행법이 더 뛰어남을 주장하면서 양분되어 심각히 갈등했음도 전하고 있다. 이 갈등은 춘다(Chunda) 장로의 중재로 봉합되지만 초기불교 교단내에 이미 수행법을 둘러싼 논쟁과 함께 두 부류의 집단이 성립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필원/청주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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