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문서 포교는 인쇄 문화의 발달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세계 최초의 목판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1)과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1377)이 우리나라에서 인쇄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불교의 문서 포교 역사가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려대장경의 조판과 조선시대 간경도감에서의 불서(佛書) 편찬도 단순히 불심에 의한 조성이었다기보다는 우리나라 불교가 지니고 있는 포교 역량의 발현이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불교는 조선시대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 속에서 대외적인 활동이 위축되었고, 제도권 밖에서 문파를 중심으로 자체적인 명맥을 유지하는데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근대에 접어들어 불교가 공식적으로 중앙 무대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1895년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조치가 해제되면서부터이다. 이미 개항 이후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 불교의 포교 활동을 지켜보던 불교계는 조선 불교의 발전을 위해 종단의 건설과 교육 및 포교의 근대화를 이뤄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인식하였다. 그에 따라 불교계는 1908년에 원종(圓宗)을 세우고,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1910년에 잡지 󰡔원종󰡕을 발간하여 포교를 위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사회에서 불교계는 사찰령이라는 굴레를 쓰고 본산(本山) 제도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로 인해 자생적인 종단 건설 노력은 훗날을 기약해야 했다. 비록 종단은 서지 못하고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불교계는 30본산 연락사무소와 주지총회를 중심으로 발전을 도모하였고, 1920년대에는 재단법인을 성립시켜 각종 사업을 추진하였다.

중앙에서 불교계를 통일하려는 노력과 함께 중요하게 인식했던 사안은 바로 ‘불교의 대중화’였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 서구 종교의 침식이 가속화되는 현실 속에서 불교의 대중화 노력은 도심 불교의 발전을 의미했으며, 이는 곧 불교의 근대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불교 대중화의 첫걸음은 포교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를 도운 것이 바로 매스미디어의 등장이다. 오늘날은 방송과 인터넷이란 매체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당시에 그러한 역할을 맡았던 것은 신문과 잡지였다. 시대성을 감안할 때, 당시 발간됐던 잡지의 역할은 오늘날의 인터넷 그 이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문맹률이 관건이긴 했지만, 불교를 만방에 알리고 소식을 공유하며 신도들의 단결을 이끌어내는 수단으로서 매체를 이용한다는 것은 근대적이고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근대 불교 잡지는 앞서 언급한 『원종』을 시작으로 해방 이전까지 30종이 확인된다. 1910년대 잡지는『원종』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월보』, 『해동불보』, 『불교진흥회월보』, 『조선불교계』, 『조선불교총보』, 『유심』 등 모두 7종이다. 이 중 한용운 개인이 발간한 『유심』을 제외하면 모두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기관의 잡지였다. 이 시기 잡지들은 처음 시도되는 대중 잡지였던 만큼 내용적인 면에서 크게 분화되지 못하고, 불교계의 개혁 호소와 교리 소개 및 유물・유적 등의 소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불교계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입장과 더불어 일제의 불교정책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근대적인 개혁의 시행을 강조하면서도 불교사, 고승대덕의 행장, 불교 교리 등을 많이 게재하고 있는 점은 서구 종교와의 경쟁 속에서 전통적인 불교 본연의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20년대는 본격적으로 ‘대중’적 규모의 독자층이 형성된 시기였다고 한다. 3・1운동 이후, 총독부의 정책 전환에 의해 출판법, 신문지법 등의 규제가 완화되었고, 그에 따라 1910년대에 비해 출판 산업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져 신문・잡지의 구독도 그만큼 일반화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불교 잡지도 1920년대에는 12종이 신간(新刊)되었고, 일부는 중간에 휴간되기도 했지만 30~40년대까지 이어지기도 하는 등 본격적인 문서포교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취산보림』, 『조음』, 『황야』, 『불일』, 『금강저』, 『조선불교』, 『불교』, 『평범』, 『불교세계』, 『무아』, 『일광』, 『회광』 등이 이 시기에 신간된 잡지이며, 그 중 『금강저』, 『조선불교』, 『불교』 등이 1930년대까지 이어진 잡지에 속한다. 이 시기의 불교 잡지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많은 지식인들이 필자로 참여하였고, 그런 차원에서 내용 구성의 질적인 향상을 보였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종교’의 본질에 대한 탐구, 불교 정체성의 정립에 대한 인식, 교학 및 불교사에 대한 소개, 역경(譯經)에 대한 중요성 인식 등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졌으며, 본격적으로 국내외의 불교 유적을 답사하고 쓴 기행문과 시・소설과 같은 문학적인 글들이 게재되어 다양한 독자층을 흡수하려고 하였다.

1930년 이후까지 이어졌던 세 잡지를 보면, 우선 󰡔금강저󰡕는 재일(在日) 불교 청년들이 펴낸 잡지로서 당시 불교계의 실상을 비판한 글이 다수 게재되었다. 일본 유학생들은 잡지를 발간하기 위하여 방학을 이용해서 전국 사찰을 순행하며 간행비를 모으기도 하였으므로 잡지를 통한 문서포교와 더불어 포교 방면에서 큰 효과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불교󰡕는 일본어로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불교의 각 종파가 후원한 조선불교단에서 간행한 기관지로서, 친일파의 활동과 인식, 일제의 불교 정책 등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불교󰡕는 무엇보다 1920~30년대의 대표적인 불교 잡지였다고 할 수 있다. 『불교』는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발간하였고, 1924년부터 1933년까지 월간으로 통권 108호가 간행되는 등 단연 돋보이는 잡지이다. 이 잡지는 기관지였기에 재단법인 교무원의 회의록에서 그 간행 실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일제 강점기 불교 잡지의 간행과 포교 형태의 단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각 연도 교무원의 평의원 총회 회의록을 보면, 『불교』는 매월 1,000부에서 1,500부 정도가 간행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간행된 잡지는 각 지역의 본산에 배포되어 다시 각 말사나 개인에게 필요한 부수를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잡지의 구독률이 높은 사찰은 김룡사, 마곡사, 범어사, 법주사, 통도사, 해인사 등으로 매달 평균 50부 이상을 구독하였다. 각 본산은 지사(支社)를 설립하고 종무소의 감독 하에 지사장이 잡지의 구독과 각 사암의 지대(誌代)를 수납하였다. 또한 각 본말사암에서 각 개인이 생활 능력이 되는 수입을 가진 자면 필히 잡지를 구독하게 하였고, 승려 이외의 개인 독자도 종무소나 지사에서 구독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불교와 관계되어 직접 경영하거나 간접 관계에 있는 기관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도 의무적으로 잡지를 구독하도록 권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볼 때, 당시 신도들이 잡지를 접할 수 있었던 일반적인 방법은 각 사찰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서점에서 일반 대중들이 손쉽게 잡지를 구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아쉽게도 확인이 되지 않는다.

1930년대에도 불교 잡지의 발간은 활발하여 새로 신간된 잡지로 총 11종이 있었다. 『관서불교』, 『불청운동』, 『선원』, 『불교시보』, 『금강산』, 『경북불교』, 『신불교』, 『룸비니』, 『홍법우』, 『탁마』, 『불심』 등이 그것이다. 그 중 『신불교』와 『불교시보』가 1944년까지 간행된 잡지로서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불교 잡지들의 편집 원칙과 내용은 대부분 1920년대와 비슷하다. 그러나 대동아경영을 내걸고 대대적인 전쟁에 돌입했던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일부 잡지는 전쟁에의 동참과 일제의 심전개발(心田開發) 정책에 동조하는 입장을 표방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전 1940년대에 신간된 잡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해방 이전 근대 불교 잡지의 간행 사례와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근대 불교 잡지는 그 간행 회수와 양에 관계없이 불교계 자체의 지적(知的) 역량을 보여준 결과물이다. 또한 근대 불교 지식에 대한 앎과 불교도들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해준 윤활유와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부터 불광운동을 이끌었던 광덕 스님은 󰡔불광󰡕의 창간호를 내며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법사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일제강점기 어려웠던 현실 속에서 잡지 한 권 한 권, 글 한 편 한 편은 조선 시기 쇠퇴했던 불교의 소생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포교의 일선에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던 수천, 수백의 전법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연/원각불교사상연구원, 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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