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염불을 권하는 소리마다
새겨진 바를 면밀히 살펴보고,
한 글자를 설함에 멀리 유통케 하니
모든 공덕의 수량이 무량하구나.

사리(事理)는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고
일대사인연 동등(同等)하여 평등(平等)하고,
쉽지도 어렵지도 아니함에 정토가 눈앞에 펼쳐지니
큰 발원 세워 마땅히 일념에 입문(入門)함이라.
- ‘서방합론’ 중에서 -

지난 호에서 ‘왕생론’과 아울러 담란(曇鸞)스님에 의해 ‘왕생론주’가 저술되었고, 선도(善導)스님 계통의 정토불교를 일으키게 한 원류가 되었다고 원고의 말미에 말씀드렸습니다. 세친보살의 ‘왕생론’을 한눈에 보시기 좋게 도표로 다시금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왕생론’을 주석한 ‘왕생론주’의 원래 명칭은 ‘무량수경우바제사왕생게주(無量壽經優波提捨往生偈註)’입니다. ‘무량수경론주해(無量壽經論偈註解)’ 내지 ‘무량수경논주(無量壽經論註)’라고도 합니다. 이름에서 살펴보실 수 있듯이 세친보살의 ‘왕생론’을 주석한 책이 되겠습니다. 담란스님(476~542)은 중국 정토교학의 기초를 확립한 분인데, 세친보살이 설한 정토를 용수보살의 공사상(空思想)을 바탕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담란스님은 보리류지대사로부터 '관무량수경'을 받고난 뒤 정토학에 전념하신 어른입니다. 주로 현중사(玄中寺)에 머물러 대중을 모아 경을 강설하는 한편 정토법문을 전하였습니다.

‘왕생론주’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책 상권의 앞머리에서 담란스님은 용수보살의 ‘난이행(難易行)’의 2도(道)를 인용하고, 본론에 ‘이행도(易行道)’가 극치라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상권의 말미에 “널리 모든 중생과 함께 안락국에 왕생하기를”이라는 대목에 대해 풀이하였습니다. 스님은 "대경"(大經 ; 무량수경)과 "관경"(觀經 ; 관무량수경)등을 인용하여 10악(惡)과 5역(逆)의 죄를 범한 악인이라도 10念에 의해 왕생할 수 있다는 등의 이행도와 악인왕생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하권에서는 3신(信)과 3불신(不信)의 상(相)을 밝히며, 또 왕상(往相)․환상(還相)의 2회향을 설하여 청정의 올바른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귀결로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만족”이라는 조항에서 "대경"의 48원 중 특히 제 11, 18, 22의 3종 원(願)을 강조하였습니다.

정리해보면 담란스님은 정토에 왕생하여 불퇴를 얻은 것을 ‘이행도’라 하였고, 차토에서 불퇴를 얻은 것을 ‘난행도’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첨부하면 용수보살이 말한 ‘이행도’은 선덕불(善德佛) 이하의 많은 제불보살의 명호를 칭하는 것입니다. 이와 비교하여 담란스님의 입장을 살펴보면, 정토에 왕생하여 불퇴를 얻기 때문에 정토의 교주인 아미타불 1불만의 칭명을 ‘이행도’라고 한 것입니다.  

담란스님의 뒤를 이어 칭명염불의 수량신앙을 고취시킨 분은 도작스님(道綽, 562∼645)입니다. 스님은 말법을 맞이하여 상응하는 으뜸가는 가르침이라 여겼습니다. ‘안락집(安樂集)’에서 수량신앙(數量信仰)을 권하고 있는데, "아미타경"에 의거하여 칭명염불설을 강조하고 칭명의 숫자를 헤아리는 수량신앙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목을 끄는 것은 칭명염불의 수를 세기 위하여 마두(麻豆)를 가지고 수를 세거나 또는 수주(數珠)를 만들어 수량을 세는 것입니다. 정토전기에 의거하면 스님은 매일 7만 염불을 했다고 합니다. 한편 가재(迦才)스님은 도작스님과 거의 동시대의 수행하신 분입니다. 이 어른은 도작스님의 염불사상을 계승하여 백만편염불의 신앙을 전개하셨습니다. 선도(善導)스님의 경우 "관경"(觀經)이 설하는 열세가지의 관법[十三觀]으로 정토의 장엄과 불보살에 대한 관상(觀相)을 권하고 있습니다.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일상관(一相觀, 日沒觀) ② 수상관(水想觀) ③ 보지관(寶地觀) ④ 보수관(寶樹觀) ⑤ 보지관(寶池觀) ⑥ 보루관(寶樓觀) ⑦ 화좌관(華座觀) ⑧ 상상관(像相觀) ⑨ 진신관(眞身觀) 관음관(觀音觀) 세지관(勢至觀) 보관(普觀) 잡상관(雜相觀) 등의 13종

이 가운데 대표적인 가르침은 ‘일상관’입니다. ‘일상관’은 산란한 마음의 중생이 관상(觀相)을 달성하게끔 극락의 모습[事象]을 보여 수행에 전념케 하는 것입니다. 극락을 살펴보는 것[觀相]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극락을 살펴보는 것[觀相]이란, 태양이 진동(眞東)으로 부터 진서(眞西)로 지는 춘추(春秋)의 두 계절을 택하여, 해가 지는 때에 서쪽으로 향하여 정좌(正坐)하고 마음을 조용히 하여 관상(觀相)하는 것이다.

후대의 ‘관경소’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전승하고 있는 관법을 살펴보면 그 의미를 보다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떨어지는 태양(落日)을 북으로 삼아 생각을 보내니, 마음을 묶어두기[繫縛] 위하여 태양을 관찰하는 이유는 아미타불의 거처로 모든 생각을 향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태양을 대상(境界)으로 삼아 생각하는 것은 태양의 원상(圓相)으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함이니, 마음의 갖추어진 일체(一切)의 의정(依正)을 생각함이라.
이제 태양을 인연하여 본성(本性)이 현현(顯現)케 하고자 하니, 법계의 마음으로써 법계의 경계에 인연하여, 법계의 태양을 일으키니 이미 모두 다 법계인지라.
아, 어찌 공가중(空假中)에 나아감이 아니겠는가?
마음이 견고히 밝고 뚜렷하게 자리 잡는 것이니, 곧 일관(日觀)을 성취(成就)함이다.

정성우/한국불교선리연구원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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