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의 다기(茶器) 의흥(宜興)의 자사호(紫砂壺)

중국(中國)이나 대만(臺灣)을 여행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거나 차(茶)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중국의 대표적인 차로 ‘오룡차(烏龍茶)’를, 중국의 대표적인 다기(茶器)로는 의흥(宜興)의 ‘자사호(紫砂壺)’를 거론함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 중국의흥자사성(의흥-정산 가는 로변)

그런데 사실 ‘의흥’에서는 자사호가 생산되지 않는다. ‘영덕’에는 영덕대게가 나질 않고, ‘보이현’에는 보이차가 생산되지 않는 이치와 같다. 자사호의 최대생산지는 의흥에서도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 더 외진 곳으로 가야 도착하는데, 그곳은 바로 정산(丁山)이란 곳이다. 필자는 중국차문화 유적지를 답사할 때 스스로 직접 유적지를 찾아 혼자 답사를 다닌다.

미리 현지의 유명 인사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버스를 전세 내고, 현지 가이드를 대동하여 단체로 편안하게 가는 답사는 한 번도 해 보질 않았다. 그래서 늘 거지같은 몰골로 고생은 무척되지만 현지의 생생한 상황을 아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의 흔적들이 도처에 널려있어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직접 발로 뛰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리는 곳도 숱하게 많았던 기억이 난다. 

▲ 의흥 정산 자사촌 입구의 패방(牌坊)

관광 사업을 위해 새롭게 단장된 곳은 볼거리가 일목연역하고 편하게 제공되어 좋기는 했지만, 역사적 체취가 부족한 게 흠이다. 더구나 약간의 조작된 냄새도 더해져서 어떨 경우는 역겨울 때도 있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서서히 잊혀져가며 버려져가는 과거의 도자기 공장들과 현지 도매시장들이야말로 정말로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며 꿈틀거리던 생생한 역사적 현장들인데 예쁘고 편한 것만을 찾는 관광객들의 수요에 맞춰 사라져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여기에서는 독자들의 자사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의흥(宜興)의 지명유래’와 자사호의 창시자가 누구인지를 살펴 본 뒤, 자사호의 각 시기(時期)별 대표적 도공(陶工)과 그 작품의 특성을 중심으로 설명하겠다.

1) 의흥(宜興)의 지명 유래 ―의흥(義興)과 의흥(宜興)의 차이―
중국의 차호 밑바닥에 대부분 제작회사나 제작자의 인장(印章)이 각인(刻印)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을 중국에서는 ‘인관(印款)’이라고 하고, 인관을 찍어놓은 것을 ‘낙관’이라고 하며, 또한 종정(鐘鼎)・석기(石器) 따위에 새겨진 문자를 관식(款識)이라 한다.

강소성 의흥에서 생산된 차호(茶壺) 밑바닥에는 어김없이 ‘의흥(宜興)’이라고 각인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간혹 ‘의흥(義興)’이라고 각인된 것도 볼 수가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예전에 필자는 “옳을 의(義)자가 새겨진 것은 분명히 가짜다.”라고 경솔하게 단정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우연하게 ‘의흥(宜興)의 지명유래’에 대해 바로 알게 되면서 필자의 경솔한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래서 학문은 어려우면서도 재미있는 것 같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자사호 밑바닥에 ‘의흥(宜興)’이나 ‘의흥(義興)’ 등의 관식(款識)이 보이는 것은 모두 진짜이거나 혹은 가짜이거나를 떠나서 ‘의흥(義興)’이란 글자의 진위(眞僞)를 제대로 밝히고 싶은 것이다.

자사호(紫砂壺)의 생산지로 유명하여 ‘도도(陶都)’라고까지 불리우는 ‘의흥(宜興)’은 현재 중국 강소성(江蘇省)의 무석시(無錫市) 서남부에 위치하며, 태호(太湖)를 사이에 두고 소주(蘇州)는 태호의 동쪽에, 의흥(宜興)은 태호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듯하다. 의흥은 무려 4천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로 진(秦) 이전에는 형계(荊溪), 진(秦)나라 통일 이후에는 ‘양선(陽羨)’현으로 개칭되었다가, 삼국시대에 오(吳)나라에 속하여 오흥군(吳興郡)에 속했었다.

진(晋)나라 초기에는 오(吳)나라의 구제(舊制)를 그대로 따르다가 영가(永嘉:307년-312년) 연간에 잠시 군(郡)으로 승격하여 ‘의흥군(義興郡)’이 되었다. 수(隋)나라 때, 다시 군에서 현(縣)으로 강등되어 의흥현(義興縣)이 되었다. 당나라 초에는 ‘아주(鵝州)’、‘남흥주(南興州)’ 등으로 불리다가 6년 후에 다시 옛 이름인 ‘의흥(義興)’으로 환원되었고, 송(宋)나라 태평흥국(太平興國) 원년 때 태종 조광의(趙光義)의 휘(諱:황제의 이름)를 피하여 ‘옳을 의(義)’를 ‘마땅할 의(宜)’로 고치어 ‘의흥(宜興)’이라고 불렀던 것이 줄곧 지금까지 의흥(宜興)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 중국의흥도자박물관(의흥시 丁山) 본관

 

이렇게 황제의 이름과 똑같은 글자를 피하여 다른 글자로 바꾸는 것을 ‘피휘(避諱)’라고 하는데, 비단 지명뿐만 아니라 사람이름이나 서책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나라 강희제 때 발행된 천자문(千字文)을 보면, 천자문의 첫 문구인 ‘천지현황(天地玄黃)’이 ‘천지원황(天地元黃)’으로 되어있다. 강희제의 이름이 ‘애신각라(愛新覺羅)・현엽(玄燁)’이므로 황제의 이름인 ‘검을 현(玄)’자를 피해 ‘으뜸 원(元)’으로 고친 예라 하겠다.

2) 자사호(紫砂壺)와 창시자(創始者)
자사호(紫砂壺)란 자사(紫砂)로 만든 차호(茶壺)를 가리키는 말이며, ‘자사(紫砂)’란 이름에서 그대로 나타나듯이 “자줏빛 나는 모래흙”이라는 뜻이다. 차호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자사(紫砂)는 대체로 진흙처럼 찰기가 있고, 모래의 입자는 윤택이 있으며 소조(塑造)에 용이하여야 한다.

자사호(紫砂壺)의 창제(創製)는 중국 다기 발달의 과정에 있어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또한 중국 전체 도자기사(陶瓷器史)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의흥 자사호의 예술적 창조는 바로 중국 명나라 정덕(正德) 연간(年間:1505-1521년)에 비롯되었다. 강소성 의흥현 동남쪽 40리 밖에 위치한 금사사(金沙寺)란 절에 어느 한 스님이 있었는데, 그는 자사(紫砂) 진흙을 이용하여 차호(茶壺)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는 차호를 완성 후 낙관(落款)이나 인장(印章)을 남기지 않았음은 물론 서명(署名)조차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안타깝게도 후인들은 그의 작품을 식별해낼 길이 없었다.

최초로 차호 밑바닥에 서명(署名)을 한 사람은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年間:1521-1566년)에 살았던 의흥명호가(宜興名壺家)‘공춘(供春)’ 이다. 그래서 후인들은 그를 가리켜 의흥(宜興) 자사호(紫砂壺)의 창제자라고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공춘(供春)이 금사사(金沙寺)의 노승(老僧)에게서 자사호를 만드는 기예를 익혔다고 전하고 있다. 공춘(供春)은 명대(明代) 사천성(四川省) 참정(參政)이었던 오이산(吳頤山)의 노비였다. 주인인 오이산이 금사사(金沙寺)에 공부하러 갈 때 몸종으로 따라갔던 것이다. 

▲ 의흥 정산 자사호박물관 앞 도자기 도매재래시장

그는 본래 손재주가 비범하여 금사사의 노승이 차호를 만드는 것을 보고는 금방 흉내 내어 차호를 만들어 내었다. 그는 노승에게 차호 만드는 법을 열심히 배웠고,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풍의 차호(茶壺)를 예술의 극치로까지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3) 자사호(紫砂壺)의 명장(名匠) 계보
자사호(紫砂壺)의 발전 시기는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시대적 구분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나 명·청(明淸)의 두 시대를 일단 함께 묶어서 자사호의 발전시기로 보는 데는 학자들 간에 별다른 이견(異見)이 없다. 그러나 학자들 마다 자사(紫砂)의 발전시기를 세분화 하는 데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세 시기로 구분한다거나, 혹은 네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그러하다. 저자는 여기에서 초창기를 포함하여 총 다섯 시기로 구분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즉, 명나라를 초창기 및 제1기와 제2기로, 청나라를 제3기와 제4기로 구분하여 명인들의 계보와 그들의 자사호 제작의 특징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박영환 / 중국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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