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살인자 자식을 둔 부모도 그 중에 포함될 것입니다. 그것도 대량살인을 저지른 사이코패스 자식을 둔 엄마는 더 이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나쁜 경우입니다. 사지가 찢기는 고통에 버금가는 고통스런 삶이 그녀의 몫인 것입니다. 내세를 기다릴 것도 없이 현재가 바로 지옥입니다.

만약 신이 있어 인간을 이러한 상황에 던져 넣었다면 그 신은 정말로 잔인한 신이고, 그런 처지에 빠진 인간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처지에 떨어진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런 운명에 던져진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런 의문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얼마나 저질렀기에 이런 운명에 빠졌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이코패스 아들을 둔 불행한 엄마 이야기인 <케빈에 대하여>를 관통하는 끈질긴 의문입니다. <케빈에 대하여>(영국, 2011)는 아들이 대량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으로 떠난 후 남겨진 엄마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삶을 어떻게 추스르는가가 한 축이고, 다른 축은 아들의 범행에 대한 이유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살인자 아들을 둔 엄마의 잘못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게 영화의 또 다른 축입니다.

<케빈에 대하여>는 영국 출신의 여성 감독인 린 램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린 램지는 경력이 그리 오래된 감독은 아니지만 수상 경력은 화려한 편입니다. 처녀작인 <쥐잡이>로 화려하게 등단한 그녀는 이 작품 <케빈에 대하여>로 세계 유수 언론의 찬사와 더불어 ‘제55회 런던 국제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영화제에서 중요한 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한 이 작품의 원작인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동명 소설은 영어권 여성작가에게 주어지는 세계적인 권위를 갖는 ‘오렌지 상’을 수상했습니다. 원작자와 감독 모두 여성으로서, 여성의 입장에서 모성애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통념인 모성애가 아니라 여성의 입장에서 모자관계를 탐색하면서 또한 범위를 확장해서 인간과 신의 관계, 또는 인간의 운명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케빈에 대하여>라는 영화에 나오는 에바의 아들 케빈은 태어날 때부터 에바를 괴롭혔습니다. 어린 케빈은 한 번 울면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조금 더 자라서 말을 할 무렵에는 말을 하지 않고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혹시 자폐증인가, 하고 병원에 갔더니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케빈은 엄마를 괴롭히는 아이였습니다. 에바가 예쁘게 꾸며놓은 방에 물감을 뿌려 엉망으로 만든 것이라던가, 충분히 가릴 수 있으면서 기저귀에 똥을 싼다거나 하는 것 정도는 어릴 때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정도의 괴롭힘이었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케빈의 반항은 점점 심각해져갔습니다. 어린 동생이 아끼는 애완동물이 어느 날 사라져버렸는데 나중에 보니 개수대 구멍에서 죽어있었습니다. 동생을 사랑하는 엄마가 동생의 슬픔을 보면서 더불어 불행해지기를 바라고 케빈이 한 일이었지요. 햄스터는 약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수구를 뚫는 데 쓰이는 화학 물질을 동생의 눈에 닿게 해서 마침내 동생에게서 한 쪽 눈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케빈의 삶은 오직 엄마를 괴롭히는 일에 집중됐습니다.

에바는 케빈에게서 위협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냥 안 맞는 엄마와 아들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관계가 돼버렸고, 에바도 그렇지만 케빈도 관계를 회복하고픈 어떤 의지도 갖지 못했습니다. 에바는 남편에게 자신이 딸과 함께 살고 아빠가 케빈과 함께 삶으로써 떨어져 살자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에바는 케빈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엿들은 케빈은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엄마가 결코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영원히 지옥으로 떨어질 일을 꾸미는 것입니다. ‘피의 목요일’ 이라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체육관에 몰아넣고 밖에서 자물쇠를 채운 후 화살을 쏘아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집에서는 아버지와 동생에게 화살을 쏘아 죽이는 사건이었지요.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살인사건이었습니다.

케빈의 존재는 에바에게는 암 덩어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오직 에바를 고통스럽게 하기 위한 존재였으며, 케빈의 삶은 그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에바는 케빈이라는 암을 언제나 거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케빈은 비록 감옥으로 떠남으로써 에바를 떠났지만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족쇄를 채워놓은 것입니다. 살인자의 엄마라는 족쇄를 채워놓음으로써 영원히 자신에게 묶어둔 것입니다.

아들이 살인자가 돼 감옥으로 떠난 후 에바의 삶은 지옥으로 추락합니다. 남편과 딸은 죽고 아들은 감옥으로 가고, 가족은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지고 에바 혼자 달랑 남았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렸고, 번듯하던 집에서 내몰려 허름한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됐습니다. 아들의 살인으로 모든 게 변했습니다. 그녀가 갖고 있던 모든 걸 잃어버렸습니다.

밖에서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아들의 만행으로 인해 자식을 잃은 누군가를 피해 다녀야 하고 가끔 만나게 되면 뺨을 맞고 적극적인 또 누군가는 에바의 집과 차에 붉은 페인트를 뿌려 놓았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순식간에 지옥으로 추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지옥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약한 사람이라면 결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에바는 참 강한 여자입니다. 지옥에서 잘 버팁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음으로써 복수하겠다는 사람처럼 죽을힘을 다해서 지옥 같은 현실에서 잘 살아남습니다. 에바의 고군분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누군가 뿌려놓은 붉은 페인트로 뒤덮인 집에서 페인트를 벗겨내는 작업입니다. 딱딱하게 달라붙은 페인트는 쉽게 벗겨지지 않습니다. 에바는 기계를 이용해서 매일 열심히 조금씩 페인트를 벗겨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집은 말끔한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처음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변신했습니다. 삶에 대한 에바의 의지와 자세를 보여주는 모티브였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아들을 면회 가는 장면에서 구체화됩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에바는 아들을 면회 갔습니다. 이제 만 18세가 돼서 성인교도소로 옮겨가게 된 아들은 조금 불안해했습니다. 그런 아들에게 에바는 물었습니다.

“왜 그랬니?”
“모르겠어.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이 물음은 살인 보다는, 왜 엄마를 괴롭히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모르겠다는 말 속에는 이유가 없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냥 이유 없이 엄마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바는 아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말 진심으로 아들을 안아주었습니다. 이게 마지막 장면입니다. 아들이 이유 없이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밀어 넣었지만 그런 아들을 용서한 것이고, 또한 수용한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에바는 아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비로소 에바는 아들을 수용하려는 자세를 보이면서 영화는 막을 내렸습니다. 비록 아들이 살인자고,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른 사이코패스지만 그냥 무조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인 것입니다.

에바의 집에 종교인이 찾아와서 "내세를 믿습니까?"했을 때 에바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당연하다고, 이미 지옥행 티켓을 끊어놓았다고. 에바야 말로 삶에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고, 삶에서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정말로 실감한 경우입니다. 꿋꿋하게 그 지옥을 버텨내는 것이 에바가 짊어진 몫인 것입니다. 에바가 마지막에 자신의 아들을 안았던 것도 비록 이런 척박한 삶이지만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수용의 의지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수용의 의지가 있으면 참담한 현실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면 어긋난 엄마와 아들의 관계로 볼 수 있지만 아들을 ‘인생’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잔인한 인생이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아들이 말했던 것처럼 원칙도 이유도 없이 괴롭히는 인생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에서처럼 인간은 특별한 이유 없이 형벌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형벌에 인간이 대처하는 방법은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묵묵하게 등짐을 날랐던 시지프스처럼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짐을 기꺼이 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이 영화의 논리입니다. 사이코패스와 모성애라는 색다른 소재를 사용했지만 실존주의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했는데 고통스런 삶을 다루는 서구 영화들의 일반적인 해석방향과 크게 다르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불교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결론은 같을지라도 고통은 많이 줄어들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는 에바의 고통에 원인이 없는 걸로 표현했지만 불교에서는 모든 현상에 대해 인과의 논리를 적용하기 때문에 에바에게서 분명 이유를 찾아낼 것입니다. 현재에서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전생까지 소급해서 생각하고, 아마도 원수가 아들로 태어난 경우라고 결론지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아들로 인한 고통은 이제 빚을 갚는 작업이라 생각하고 훨씬 적극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불교인은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에 대해서 훨씬 신뢰감을 갖는 편입니다. 합리적인 이유가 분명 존재하고, 콩을 심으면 콩이 난다고 보는 편이므로 에바의 불행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에바가 당연히 짊어져야 할 몫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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