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유일신(唯一神)을 위한 종교도 아니며 또한 인간의 문제를 그 시발점이자 종말로 삼는 인간학(人間學)도 아니다. 불교는 연기법을 근본으로 하여 우주 만유와 조화롭게 공존 공생함을 목적으로 한다. 불교는 인간만을 위한 인간중심주의나 인간우월주의의 종교가 아니라 우주 만유의 생주이멸(生住異滅)과 성주괴공(成住壞空)에 관한 법계의 이법을 따라 만물이 안정된 이완계(弛緩系)를 이루어 감을 보이는 ‘만물을 위한 만물의 종교’이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는 결코 이상추구나 개인적 삶의 충족을 달성시키는 개인 중심적 종교가 아니라 집단의 종교이며, 나아가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우주적 종교로서 ‘우주학’이며 ‘우주철학’이다. 그러나 인간에 국한시킬 때 불교는 인간의 삶의 가치를 실현토록 하는 신앙체계를 지닌다. 이때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로운 공존 공생적 연기성은 필수적이다.
▲ 이시우 전 서울대 교수.
불교의 진리체계로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연기법이다. 이것이 인간세계에서는 논리적, 도덕적 교리로서 정신세계를 중시하는 동시에 자연계에서는 사물의 관계이치를 다루므로 불교에는 물질과 정신을 함께 보는 물심불이사상(物心不二思想)이 내재한다. 연기는 ‘원인과 결과’ 또는 ‘조건과 귀결’의 관계보다는 상호 의존적 수수관계(授受關係)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집단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서로 간에 동시적으로 연기작용을 일으키므로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석존은 개체들 사이의 유기적 상호관계에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업(業)의 작자(作者)가 없고 또 그 업에 의해 생긴 과(果)를 맛보는 자도 없다고 했다. 즉 업과 과는 동시에 서로 주고받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업의 제공자나 과를 받는 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연기관계에서는 어떠한 법도 고정된 자성을 가지지 못하므로 무자성(無自性)이다. 집단에서 각 개체는 자아해체[無我論]로 자타가 동등해지고 또 특수성이 부재하는 보편성이 이루어지면서 전체가 안정된 이완상태에 이르게 된다. 무위적 연기과정이 일어나는 자연에서는 만물이 최소작용의 원리를 만족하면서 엔트로피가 최대에 이르는 이완계(弛緩系)로 진행한다. 이완상태가 세속에서는 염오(染汚)의 생동심(生動心)을 여의고 청정한 근본심(根本心)을 발현하는 해탈 열반의 경지에 해당한다.
사물이 존재하면 반드시 연기작용이 일어나므로 ‘존재는 연기의 한 양식’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연기관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상반되는 양극단의 현상이 생긴다. 예를 들어 有/無(유/무), 生/滅(생/명), 苦/樂(고/락), 隱/顯(은/현) 등등의 서로 상반되는 현상이 비동시적으로 동거한다. 이러한 존재의 이중성은 연기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반적 현상이며, 이런 대립적 양극단을 원융하는 전일적 사고가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중도이다.
물리학자 파울리가 세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양극단의 대립을 통합하고자 소망했던 생각도 바로 중도사상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의 관찰에서는 어느 한 관찰대상이 선택되면 다른 것은 관찰대상에서 제외된다. 실제적 자연관에서는 이런 ‘선택과 희생’이 따르지만 자연철학적 관점에서는 양극단 모두를 원융하는 중도사상을 따라야 한다.
연기적 세계에서는 ‘주고받는 작용[授受作用]’이 모든 구성원 사이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복합적인 연기관계에서는 어떠한 경우에 대해 완전한 확실성을 추구하기란 불가능하다. 만약 완전한 정밀성이나 확실성을 원한다면 관찰자는 관측대상과 연기적으로 분리된 채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하는데 이러한 상황이 연기적 세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의 관찰에서 완전한 확실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자연의 연기성 때문이다. 이것이 물리학자 하이젠베르그가 불확실성은 관찰의 미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본질적 속성(屬性)이라고 생각한 이유이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우주적 종교감각(宗敎感覺)이야 말로 과학적 탐구의 가장 강열하고 숭고한 동기라고 했다.『화엄경』에 따르면 우주 만물은 중중무진의 우주인드라망을 이루고 있는 데 이것은 중력적으로 서로 얽혀 있는 은하(銀河)들의 세계이다. 한편 원시경전인『디가니까야』에서는 세계가 수축 팽창한다는 진동우주(振動宇宙)를 제시한다. 실제로 은하들은 사차원적 시공간에서 안정된 육상원융(六相圓融)을 이루며 진화하고 있다. 이런 사사무애(事事無碍)의 화장세계(華藏世界)가 바로 우주적 종교감각을 심어주는 구체적 예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불교에서는 세계가 극미(極微)의 집적(集積)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래서 의상대사의 법성게에서 “한 티끌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한 티끌 속에 우주의 진화적 정보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불교세계관은 극미의 미시세계(微視世界)에서부터 우리가 인식하는 가시세계(可視世界)를 거쳐 우주라는 거시세계(巨視世界)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의 법계를 대상으로 한다.
불교에서는 보통 만물을 유정과 무정으로 나누며 그리고 동물은 인간보다 하등하다고 본다. 이런 구분과 차별은 어디까지나 인간우월주의에 기인한다. 그런데 천태종의 담연 스님과 지눌 보조국사처럼 무정물도 불성을 지닌다고 본다면, 인간중심적이고 인간우월적인 그릇된 사상을 벗어나는 첩경은 불교의 생명존중과 평등사상에 따라 생의(生意, 생명력·연기성)를 지닌 우주 만물을 모두 동등한 생명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진화된 문명체가 무수히 존재 가능한 우주에서 인간이 가장 우월하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연기법과 범생명관(汎生命觀)을 근본으로 하는 불교는 완전성이나 절대성을 배제하고 상대성을 따르며 불확실성을 수용하는 열린 종교로서 만물의 존재가치의 동등성과 생명존중사상을 지닌다. 이러한 유기적이고 전일적인 불교세계관에는 만물의 생명(生滅), 인연생기(因緣生起), 구조 등에 관한 세간의 법칙들이 들어 있다. 이것을 현대과학의 견해로 다시 밝혀보는 것이 과학자의 몫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라는 틀 속에 불법을 억지로 끼어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과학은 인간중심적 이성과 분석적이고 단편적인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며, 그리고 과학의 도구로 쓰이는 기술은 특히 반생태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불교는 주로 유심주의(唯心主義)와 인간중심주의(人間中心主義)에 머물면서 만물에 대한 불법의 오묘한 진리의 세계를 외면한 채 인간의 정신세계만을 중시하면서 신비적 깨달음과 기복신앙에 주로 안주해 있다. 그사이에 인간의 탐욕은 지구를 착취하고 파괴하면서 지구환경과 생태계의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이제 불교는 본래의 우주적 불법의 세계로 되돌아가 삼륜청정(三輪淸淨)한 보시를 통해 자연의 파괴를 막는데 앞장 서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생명을 인간의 관점에서 볼 것인지 아니면 자연의 관점에서 볼 것인지를 결정하고, 나아가 이를 토대로 불교를 현대의 언어와 사상으로 다시 쓰서 불교문화가 현대인의 생활문화로 정착하도록 해야 한다.

이시우/전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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