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년시절, 그러니까 한참 전의 일이다. 당시 구도회 법당에서 고 서경수 교수님의 법문을 들은 적이 있다. 교수님은 도(道)를 설명하면서 그것은 과정으로서의 길이며 동시에 궁극적 목적이라 했던 기억이 맴돈다. 도는 현재 이 자리에서 내가 가는 길이면서 거기에 궁극적 완성이 현전한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도'라는 말은 불교는 물론 유교, 도교, 선에서도 나타나며 검도니 유도니 태권도니 합기도니 하는 스포츠에서도 쓰고 있다. 어디 스포츠뿐이이랴? 무슨 일을 하든 그것에 정통하면 그 방면의 도사요 도통했다고 한다.

유교에서의 도는 인륜의 길을 말하며, 도교의 도는 세상을 움직이는 궁극적 원리를 지칭한다. 노자는 도를 일컬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근원이라 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과 말을 초월해 있는 진리이다.『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에서 열반을 일컬어 도라 하는데, 그것은 고요하고 텅비어 형체나 이름으로 닿을 수 없고, 미묘하고 모양이 없기에 감각으로도 감지할 수 없다고 했다.

열반을 도(道)라 부르는데, 그것을 어떻게 모양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다만 텅 비어 있어 공하다는 것이다. 도는 그렇게 깨달음, 열반, 해탈, 공(空), 반야의 지혜로도 일컬어진다. 또한 불교에서는 도를 궁극적 진리를 얻기 위한 과정으로 정의내리기도 한다. 과정으로서의 도는 사성제의 도(道)성제에 잘 드러난다. 팔정도는 그 구체적인 길이다.

그렇다면 선불교에서는 어떠한가? 선어록을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도에 대한 개념은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대도문문(大道無門)' 등의 선어에서 잘 나타난다.

'지도무난, 유혐간택.'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다만 시비하고 가리는 것만 하지 않으면 될 뿐이라는 의미이다. 『신심명』에 나오는 말이다. '나'라는 상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분별심, 차별심. 간택심만 버리면 궁극적인 도는 바로 이 자리에 있다는 말일 게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구절은 평상의 마음 그것이 도라는 '평상심시도'와 어울린다. 이 역시 조작과 시비와 취사를 떠난 마음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건 밥먹고 책보고 운동하고 작업하는 가운데 거기에 몰입하여 일삼매, 일상삼매의 흐름을 타게 되면 무심해지는데 그것이 도의 흐름이요 완성이기도 하다는 뜻일 게다.

도는 산속이나 절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 이 자리를 떠나서 도를 구한다면 그것은 현실에 뿌리박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이상이요 헛된 꿈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도가 먼 훗날 전개되는 미래의 전망이라면, 그것 역시 오지 않은 미래에 매달려 사는 헛물켜는 삶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하는 일과 하나되어 깨어 있다는 것, 그래서 부드럽고 유연하며 지극히 기쁘고 행복하다는 것, 그러면서도 한치도 어긋남이 없고 정확하고 완숙하며 빼어나다는 것이 도의 드러남이며 그것이 능인달사의 삶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실 그렇게 완숙해지려면 많은 노력과 땀방울이 필요하다. 왜 동양의 무술이나 스포츠를 검도, 유도, 궁도, 태권도라 했겠는가? 거기에는 선의 정신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검도나 궁도 등의 기예를 익히려면 기본자세부터 같은 자세를 무수히 반복하고 훈련하는 가운데 완숙해 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그 방면에 도가 익어간다는 뜻이다. 검도는 t숱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연습을 하는 가운데, 궁도는 열심히 활을 당기는 가운데 그 자세에 정통해지고 몸이 유연해져 정확성과 스피드를 갖추는 법이다. 그것은 사실 집중과 반복을 통한 삼매의 경지에서 나오는 도의 흐름이요 무르익음이다. 그래서 나와 대상이 척척 착착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도가 무르익으며 나와 대상이 하나가 되기에 호흡이 안정되고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 '나'라는 생각이 들어가 마음이 흔들리면 어께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하여 굳어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될 경우 도에서 멀어진다. 검도나 궁도, 유도 등의 달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마음이 평정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무심한 경지에서 나오는 한방이 최고의 완성을 이룬다. 검을 내리치는 순간, 활 시위를 당기는 순간, 팔 다리를 뻗는 순간, 최고의 스피드와 정확성으로 목표를 명중시키거나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다.

축구, 배구도 마찬가지다. 물론 체력이 뒷받침되어야겠지만, 그것은 반복 훈련과 마음의 집중력, 그리고 유연성과 정확성, 여기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 거기에다 경기 자체를 즐기는 자세만 갖춘다면 무한한 창조력도 나오기 마련이다.

런던 올림픽이 시작됐다. 올림픽의 현장에서 이러한 스포츠의 도인들이 진정한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계 또한 스포츠인들에게 선-명상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인식시키고 그런 자세를 수행을 통해 단련시켜 나갈 때 그 방면의 진정한 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본다. 사실 그것이 진정한 스포츠 포교요 스포츠 발전이 아니겠는가?

도는 다른데 있지 않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분별 망상만 쉬고 자신이 하는 이곳 이 자리에서 일과 하나가 되면 그뿐이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되는 길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아상을 멸하는 싸움, 분별심이 사라진 철저한 무자기성, 그래서 진정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길 때 그 길은 열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과정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다면야, 금메달을 못 딴들 어떠하랴.

-고명석 / 조계종 포교연구실 종무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