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 가면 해탈문 사천왕문 불이문… 입구에서부터 온통 한자투성이.
알아보지 못하는 한자에 절집에 들어서면 주눅부터 들죠? 알아듣지 못하는 염불소리도 괜히 몸을 빼게 만들어요. 절 여기저기에 걸린 한문 글들을 보면 재미없는 수업을 억지로 듣는 것만큼이나 부담스럽죠? 미안하지만 이번엔 여러분이 듣기에 좀 어렵고 학술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경전에 대한 이야기는 꼭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곧 한글로 된 현판을 읽고 우리말로 된 경전을 공부할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전통과 문화도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변하고 움직이기 마련이니까요.

부처님 가르침 담은 불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각기 자신들의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변상도

기독교는 성경이라는 ‘바이블’이 있고 유교는 흔히 ‘사서오경’이라는 기본적인 교리책이 있죠. 이슬람도 ‘코란’이라는 경전이 있습니다. 그럼 불교의 경전은 뭐가 있을까요?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글쎄요. 불교의 교리는 성경이나 코란처럼 딱 한권이나 몇 권의 교리책으로 한정하기 힘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29살에 카필라성을 뛰쳐나와 35살에 깨달음을 얻고 바로 열반에 들려다 포기하고 중생을 고통에서 건지기로 작정합니다. 불교 경전은 이때부터 80살 열반하실 때 까지 45년 동안 말씀하신 내용이 모두 집대성되어 있습니다.

경(經)이란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내용을 엮은 것만을 이릅니다. 그런데 경중에서도 부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내용을 담은 책을 ‘00경’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흔히 ‘위경(僞經)’이라고 해서 거짓으로 만든 경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위경이 나타난 건 여러 가지 배경과 이유가 있겠지만 불교가 그만큼 ‘명품’이라는 증거겠죠. 그런 위경도 대체로 부처님의 정법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이면 절집에선 대체로 받아들이는 분위깁니다.

▲ 부인사 초조대장경의 모작

대표적으로 어른들이 가장 많이 독송하는 <천수경>이 그런데요, 경전이라기보다는 불법의 정수를 엮은 의식용 발원문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네요. 불교에는 여러분은 들어보지도 못한 이런 저런 경전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불교의 경전이 많아진 원인을 일부는 부처님의 장황한 설명과 가르침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믿을 수는 없지만 부처님의 혀는 아주 길어서 얼굴을 한 바퀴 돌고도 남았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그만큼 뭔가 가르침을 주실 때는 중생의 눈높이에 맞춰 아이에게 설명하듯 반복과 비유로 지도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또 불교가 아시아 여러 민족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도 불교의 틀에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런 탓에 기독교나 이슬람 같은 유일신 종교처럼 폭력이나 전쟁을 겪지 않고 불교를 아시아 곳곳에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인류지식의 보물창고 ‘대장경’

세계최초로 금속활자 불경을 인쇄한 고려. 고려대장경은 우리의 앞선 문화적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유산이기도 합니다. 인류가 처음 문자라는 기록 매체를 가지기 시작한 후 초기는 모두 손으로 베껴 쓰는 형식으로 전래 됐겠죠. 원시적이지만 원초적인 방식에서 점차 많은 양의 지식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는 방법으로 인쇄술이 발전됐습니다. 불교는 동아시아 문화와 문명의 최첨단에 서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불교경전이 고급문화 전파의 핵심이 된 겁니다.

대장경은 경율론(經律論) 삼장을 총 망라해 불교의 진리를 담은 방대한 교리서입니다. 앞서 말 한대로 ‘경’은 부처님의 말씀, ‘율’은 경에 주석을 단 것이고, ‘론’은 뛰어난 스님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재해석하고 풀어 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티베트대장경

이런 대장경은 아시아에서도 지역별로도 그 형식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크게는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 남방 불교권의 팔리어대장경과 한국 중국 일본 등 북방불교권의 한역대장경, 티베트대장경 등이 대표적입니다.

한역대장경과 티베트대장경은 내용이 화려하면서 감성적인 반면, 팔리어대장경은 서술이 소박하고 간명해 비교적 사실적인 서술을 담은 경전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금의 불교 경전이 만들어진 건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얼마 뒤 교단이 혼란에 빠지자 500명 장로들이 칠엽굴이라는 곳에 모여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해 함께 외우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 뒤에도 이런 모임이 두 번 더 열려서 교단의 기강을 바로 잡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오래 지속되게 했습니다. 이걸 ‘결집’이라고 부릅니다.

아직도 티베트나 남방불교 사원을 가면 ‘패엽경(貝葉經)’이라는 긴 갈댓잎 같은 것으로 만든 경전을 읽고 있는 스님을 볼 수 있는데요, 한문의 ‘경(經)’이라는 글자도 이렇게 겹겹이 접어 뭉쳐놓은 나뭇잎을 실로 꽁꽁 묶어 놓은 모습을 형상화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교를 믿던 중국 한자문화권으로 전해진 불교는 장황하고 화려하면서 감성적인 요소가 추가된 것이 특징입니다. 오묘하고 거룩한 가르침이라는 걸 강조하고 사상적으로 우월한 종교라는 점을 자랑하고 싶었나 봅니다. 민족적 편견일 수도 있지만 뭐든지 크게 부풀리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은 요즘도 ‘뻥’이 좀 심한 편입니다.

경전은 훌륭한 수행의 방편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의지하고 부처님의 법에 의지하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깁니다. 흔히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하는 구절인데요, 부처님이라는 스승의 형상에 집착하지 말고 스스로를 등불로 밝히고, 진리의 가르침을 등불로 밝혀 어두운 사바세상을 헤쳐 나가라는 가르침입니다.

2500년 전 이런 가르침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건 <유교경>이라는 경전이 수많은 세월을 거쳐 전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도 불교는 티베트를 넘어 중국과 한국, 일본, 아래로는 태국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까지 전파됩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거나 바다를 건너 천축국이라 불리던 인도까지 경전을 전하는 일은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물론 현지에서 인도로 경전을 구하러 가는 구법승들의 행렬도 수백 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이들은 주로 손으로 경전을 베껴왔는데 요즘처럼 교통수단이 많거나 항해술이 뛰어나지 않은 시절에 이런 일을 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신라 사람으로 인도에 간 혜초스님이나 현장법사 같은 구법승들이 남긴 기록과 그들이 가져온 경전은 수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신라나 백제, 고구려도 그랬고 고려는 중국으로 수많은 구법승이 유학길에 올라 우리 문화를 더 살찌웠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옮겨 적거나 부처님의 모양을 그리는 행위는 ‘사경(寫經)’ 또는 ‘사불(寫佛)’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경과 사불은 공덕을 짓는 일로 많은 이들의 수행방편으로 이용됐습니다. 신라시대 경덕왕 13년에 제작된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회화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국보 제196호지만 아쉽게 삼성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닥종이에 금가루를 물감으로 그렸는데 종이는 바스러져도 그 속에 비로자나부처님과 보현보살이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경전을 붓으로 써서 남기는 일은 훌륭한 수행의 방편으로 환영받고 있습니다. 요즘엔 금강경이나 법화경을 손으로 적는 사경수행반 모임이 꽤 활발한 모양입니다. 가장 많은 사경의 소재로 ‘공’사상을 설명하는 <반야심경>은 한자 270자로 된 짧은 경전인데 티베트나 남방, 한중일 모두 같은 내용이라 인종을 초월해 가장 친숙한 경전이기도 합니다.

한국불교의 위대한 유산 고려대장경

▲ 해인사 장경각에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다.

해인사를 가본 친구는 꼭 들려 봤을 텐데요, ‘장경각’이라고 팔만대장경 경판을 보관하는 집을 가본 적이 있을 겁니다. 고려 때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을 모르는 친구는 없겠죠? 세계적인 문화교육단체인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고려 사람들이 부처님의 위대한 신통력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으려 그런 엄청난 불사를 벌였다고 합니다.

요즘 학자들은 또 다른 이유로 당시 선진 문명국가의 기준이 자기 나라의 대장경을 가졌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던 탓에 고려왕조에게 대장경이 꼭 필요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불사를 일으키는 바탕에도 백성의 지극한 불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 했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해인사 장경각의 과학적 구조와 경판의 온전한 보존방식을 보면 외국인들도 놀라워합니다. 어릴 때 장경각을 가봤다는 수아는 8만장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경판보다 마당에서 비를 맞고 있던 두꺼비 형제들만 기억하네요(ㅎㅎ).

고려대장경은 모두 세 번에 걸쳐 조성됩니다. 고려 현종부터 문종 때 대구 부인사에서 조성된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고 일부가 일본 교토 남례사에 남아있습니다. 그 뒤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흥왕사에서 1096년에 완성한 속장경은 전란으로 불에 타 없어졌고 일부가 송광사와 일본 동대사에 남아 있습니다.

▲ 해인사 장격각 대장경 내부

지금 우리가 해인사에서 볼 수 있는 대장경은 1236년에 완성된 팔만대장경입니다. 경판의 수는 8만1137장인데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부릅니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고려조정이 왜 이렇게 큰 불사에 집착했는지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경판의 목재를 조달하는 일이나 경전의 내용을 감수할 교학승, 판을 세길 각수를 동원 할 수 있었다는 점은 고려가 불교라는 이념 아래 하나로 똘똘 뭉친 이념공동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된 경전의 감동 언제쯤?

요즘은 한문경전 뿐 아니라 남방과 팔리어로 된 경전의 한글 번역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문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은 이미 조선 세종대왕 때 시작된 일입니다. 한글은 세종대왕의 업적이지만 실제 한글을 만드는 연구는 ‘신미대사’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게 거의 정설입니다. 뜻글자에 익숙한 유학자들이 소리글자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대신 소리글자인 산스크리트어에 능했던 신미대사는 한글 같은 소리글자들의 특성을 알고 개발하는데 적격이었겠죠. 어쨌든 강력한 유교적 이념의 조선이 한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불경의 번역은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불교를 박해하던 조선에서 ‘간경도감’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불경을 번역하고 간행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근대에는 남양주 봉선사 운허스님 이후 문도 스님들을 중심으로 우리말 역경이 활발하게 진행됐습니다. 70년대에 한글대장경이 완역돼 나왔지만 번역이 너무 투박하고 옛날 말투라 요즘 사람들이 읽기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다만 개별 사찰차원에서 이런 큰 불사를 이룬 건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근대 조계종도 종단이 시작될 때부터 역경과 승려교육, 포교를 종단의 가장 시급한 3대 과제로 삼은 걸 보면 경전의 번역이 얼마나 중요했나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요즘사람들에게 한국불교의 이런 노력은 더뎌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팔리어 경전의 번역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계종에서는 불자들이 가장 많이 독송하는 <금강경> <천수경> <반야심경> <예불문> 같은 경전을 우리말로 바꾸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요즘 사용하는 말과 글로 우리 친구들이 더 많은 경전을 읽고 감동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조용수 / 불교TV기자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