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예(茶藝)에 대한 대만과 중국의 여러 주장과 견해

십 수 년 동안,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의 여러 대학과 차문화 단체들을 돌아다니면서 차학(茶學)을 강의하다보면, 초심자들로부터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바로 ‘다도(茶道)’와 ‘다예(茶藝)’가 어떻게 다르냐? 라는 질문이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필자 본인은 20여년이 넘게 고민해왔다.

반면에 또 필자 나름대로 그 개념을 정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설명을 했었지만, 실제로 한 번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구분하여 명쾌하게 정의를 내려 준적은 없었다. 예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으면서도 개념을 정리하지 못해서 늘 안타까워하다가, 지금에 이르러 ‘다예’와 ‘다도’ 대한 대만과 중국의 몇몇 차학 전문가들의 견해와 각각의 주장을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 육우의 품다도

(1) 대만의 지이예[季野]씨는 “다예는 차(茶)를 주체로 하여 예술을 생활에 용해(溶解)시킴으로써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일종의 인문(人文)임을 주장하며, 그 목적은 생활에 있지 차에 있지 않다.”고 했다. 즉, 차를 주체로 하는 행다의 예술적 행위가 일상의 생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생활의 윤택함과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 윤활유적 역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차가 주체가 되어 행해지는 다예이지만 그 모든 활동이 인간생활에 활력소가 되는 부수적 역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차(茶)를 주체로 하는 다예행위 그 자체가 주목적이 되어 인간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거나, 또는 사람이 자신의 일상을 제쳐놓고 다예의 행위에 속박되거나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대만의 판쩡핑[范增平]씨는 “다예는 과학과 인문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괄한다.” 여기서 그가 말한 다예의 과학이란 ‘기예(技藝)’이며, 이는 차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잘 우려내야한다는 뜻이다. 다예의 인문학적 측면은 ‘예술(藝術)’적 측면을 뜻하며 과학적으로 잘 우려낸 한 잔의 차를 미묘(美妙)하게 음미하며 마시는 예술적 경지의 음차행위를 뜻한다.

대만의 다예의 아름다움은 심령학적(心靈學的) 미(美)를 추구함에 있기 때문에 다예를 감상하고 즐긴다는 것은 바로 행다(行茶)의 전체 과정의 매 절차가 행해질 때 마다 자아(自我)를 완전 몰입하여 그 속에 순간적으로 머무르며 심신이 일체되어 그 아름다움을 관조하며 무아지경에서 차를 음미하며 마신다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판찡찡이 주장하는 전자의 과학적 부분은 ‘다예(茶藝)’이고, 후자의 인문학적 측면은 바로 다예를 통한 ‘다도(茶道)’를 의미한다고 본다.

(3) 대만의 차이룽짱[蔡榮章]씨는 “‘다예’란 음차의 예술적 측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단순히 해갈을 목적으로 차를 마시는 것을 ‘음차(飮茶=喝茶)’라고 하며, 섬세하게 차의 맛을 음미하며 마시는 행위를 ‘품명(品茗)’이라고 한다. 만약에 찻잎의 품질, 포다(泡茶)의 기예, 다구를 감상하고 즐기는 것, 차를 음미하고 마시기에 적절한 환경 및 인간관계 등에 이르기까지 심도 있고 체계적으로 연구된다면, 보다 폭 넓고 깊이 있는 다예(多藝)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차를 우리는 과정이 찻잎의 품질만을 완전히 발휘하는 데 그 목적이 있을 뿐 아니라, 차를 우리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바로 개성 있는 행다(行茶) 예술의 발전적 결과라고 여기고 있다.

▲ 工夫茶器

차를 우리고, 음미하며 마시는 과정은 반드시 전심(專心)으로 정성을 기울여야 비로소 좋은 차를 우려 낼 수가 있고, 차의 색과 향기와 맛이 제대로 잘 우러났을 때 비로소 차의 진정한 경계를 느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를 우려내는 정확한 단계와 과정이 필요하며, 이러한 과정이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차(茶)가 인간의 미적(美的) 감각을 만족시킬 수 있으며, 차와 인간의 아름다운 주객의 관계를 표출해 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립된 차와 인간과의 관계는 더 나아가 인간의 수신(修身)과 양성(養性) 은 물론 인륜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사교적 공능의 역할도 하게 된다.

(4) 북경의 차문화 전문가인 왕령(王玲)교수는 “다예와 다도 정신은 중국차문화의 핵심이다. 우리들이 여기서 말한 ‘예(藝)’란 것은 ‘제다(製茶)’, ‘팽다(烹茶)’, 품다(品茶) 등의 차의 예술적 기교[藝茶之術]이다. 우리들이 여기서 말한 ‘도(道)’란 예다(藝茶)의 과정 중에서 관철된 정신을 가리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즉, 여기서 그가 말하는 ‘다예(茶藝)’란 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반인들이 마시는 보편적 차의 품질을 뛰어 넘어 좀 더 정밀하고 섬세하게 만들어내는 기술, 차를 우려내는[烹茶] 일련의 절차와 그 과정을 좀 더 심미학적 차원에서 감상할 수 있는 우아하고 미적 감각을 발휘한 행다(行茶)의 기술, 그리고 차를 음미하며 마시는 품다(品茶) 과정에서 표출되는 일상의 차를 마시는 행위와 동작들을 한층 더 우아하고 아름답게 표출해내는 기교적 행위나 방법 등이 모두 예술적 경지로까지 승화되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렇게 예술적 행위로 승화되어 완성된 ‘다예(茶藝)’의 각각의 모든 과정을 통해 심신을 수양하거나, 혹은 자신 품성을 배양함은 물론 양생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법 등,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정신으로 추구되고 관철될 때, 이것이 바로 ‘다도(茶道)’라는 것이다.

▲ 각종의 다기진열

(5) 섬서(陝西)의 작가 정문(丁文)씨는 “다예(茶藝)는 제다(製茶), 팽다(烹茶), 음차(飮茶)의 기술을 가리키며, 그 기술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바로 한 분야의 예술을 이루게 된다. 다예(茶藝)는 바로 ‘다도(茶道)’를 완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조직 성분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북경의 왕령(王玲)교수의 주장과 크게 다를 바 없이 거의 같은 견해로 보인다.

(6) 절강성 호주(湖州)의 차문화 전문가인 구단(寇丹)씨는 《농업고고(農業考古)》란 학술지에 발표한 <다예초론(茶藝初論)>이란 논고에서 각 가(家)의 학설을 종합해 “다예도 광의적 의미와 협의적 의미로 분류하여 볼 수가 있다. 광의적(廣義的) 다예란 차엽의 생산, 제조, 경영, 음용의 방법과 차엽의 원리, 원칙을 탐구함으로써 물질과 정신이 모두 만족하도록 하는 학문이다. 협의적(狹義的) 의미의 다예는 어떻게 하면 차를 잘 우려 낼 수 있을까와 어떻게 하면 차를 잘 음미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예술적 행위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구단씨의 주장은 이제까지 위에서 언급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와 별 차이가 없이 보이는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좀 색다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즉, 구씨가 주장하는 ‘광의적 다예’란 차의 산업을 의미하며, ‘협의적 다예’는 위에서 줄곧 언급되어 온 ‘다예(茶藝)’의 범위 중에서 오직 ‘품명(品茗)’에만 국한 된 다예(茶藝)를 의미한다. 그리고 오히려 ‘광의적 다예’에서 산업적 측면을 거론한 마지막 끝 부분에서 ‘물질과 정신’을 모두 충족 시켜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가 언급한 ‘물질’은 차의 산업에 해당하고, ‘정신’은 바로 ‘다도’의 개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위에서 언급한 여섯 분의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약간의 견해와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귀결해 볼 수가 있다.

▲ 자사호
‘다예(茶藝)’란 차의 채다, 제다에서부터 팽다, 품음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전체과정이 섬세하고도 정교한 기술,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품다의 행위적 기교 등이 총망라되어 일상의 편리한 음차의 수준을 넘어서 과학적, 심미적, 예술적 경지로 승화 된 일체의 차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다도(茶道)’란 다예의 일체 모든 절차와 행위가 바탕이 되어 그 속에서 심신의 수양과 양생의 도를 추구하는 정신이 하나로 집중되고,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위에서 제일 처음 거론된 ‘지이예’씨의 주장이다. 즉, 다예는 비록 차(茶)가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 예술적 행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의 일상을 뛰어 넘어서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차를 주체로 한 ‘다예’가 인간의 일상생활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미게 하여 인간이 다예를 객체로 활용하여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영환 / 중국사천대학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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