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전의 유래와 진위

흔히 불교 전통에서는 붓다가 태어난 인도에서 성립된 경전을 ‘진경’(眞經)이라 하고 그 이외 지역에서 생성된 경전을 위경(僞經)이라 한다. 그리고 성립과 유통이 분명하지 않은 경전을 ‘의경’(疑經)이라 한다. 대장경에는 ‘붓다의 직설’ 또는 ‘붓다의 진설’이라 하여 경명 앞에 ‘불설’(佛說)을 붙인 경전들도 적지 않다. ‘불설’을 붙였기 때문에 ‘붓다의 진설’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붓다의 진설’이 아니라고 의심할까 보아 ‘불설’을 붙여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때문에 ‘불설’을 붙인 경전과 그렇지 않은 것을 근거로 진위의 잣대를 들이대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불교가 지향하는 보편적 진리와 보편적 가치를 이해하게 되면 인도에서 성립된 것만을 진경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딘가 석연하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인도 이외의 티베트나 중국과 한국과 일본 등에서 성립된 경전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분황 원효의 저술 103(87+16)종 240(180+60)여권 중 『금강삼매경론』은 가장 만년작으로 알려져 있다.아직 『금강삼매경』의 성립 연대에 대한 이설이 많아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경론의 주제나 내용으로 볼 때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주석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경전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중국 양나라 승우(僧祐, 445~518)의 『출삼장기집』이다. 여기에 따르면 도안(道安, 312~385)의 『신집안공량토이경록』(新集安公凉土異經錄) 제3집 중에 『금강삼매경』 1권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서 승우는 『금강삼매경』이 “양대에 번역되었으며 역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梁代失譯]고 적었다. 또 수대에 편집된 『법경록』(法經錄), 『언종록』(彦琮錄),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와 당대에 편집된 『정태록』(靜泰錄), 『내전록』(內典錄), 『대주간정록』(大周刊定錄)에는 “현존하지 않는 경전”이라고 적고 있다. 이후 중당(中唐)시대의 지승(智昇)은 개원 19년(730)에 이 경전에 대해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권4의 북량 실역부(北涼失譯部)와 권12의 현존록(現存錄)에 2권 혹은 1권이라 기록하였다.

이것은 지승이 이전 경록에서 없어진 『금강삼매경』을 새롭게 발견하고 경록에다 습유경(拾遺經)으로서 이 경전이 현존하고 있음을 알리는 대목이다. 이후 『금강삼매경』에 대한 연구는 모두 여기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현재 해인사 장경각에 보존된 『고려대장경』 판본과 이것을 저본으로 한 『대정신수대장경』 제9책에 수록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경전의 성립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논의가 있어 왔다. 그 결과에 의하면 중국 양나라 때 출현했다가 이후 사라진 경전과 분황 원효시대에 등장한 경전은 다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분황 역시 『금강삼매경론』에서 진제(眞諦?~569) 삼장의 구식설은 『금강삼매경』「본각리품」의 ‘암마라’(唵摩羅)에 의한 것이라 하였고, 『대승기신론』의 “득견심성(得見心性), 심즉상주(心卽常住)”라는 구절은 곧 『금강삼매경』의 ‘심상안태’(心常安泰)라는 구절을 풀이한 것이라고 하여 『금강삼매경』이 『대승기신론』에 앞선 진경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미조노 고오겐(水野弘元)은 자신의 논문 「보리달마의 이입사행설과 금강삼매경」에서 이 경전이 진경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그는 ① 이 경전에는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에 나오는 네 가지 주문인 ‘대신주’(大神呪)와 ‘대명주’(大明呪), ‘무상명주’(無上明呪)와 ‘무등등주’(無等等呪)가 있으며, ② 이 경전에는 현장이 번역한 『유식삼십송』에 나오는 제칠식의 표기처럼 ‘말나’(末那)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금강삼매경』의 성립을 현장이 번역한 648년 이후여야 하며, 분황이 이것을 주석한 시기는 665년 전후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 경전에 담겨있는 여러 교학적 내용들이 남북조에서 수대에 걸쳐 중국 불교에서 문제로 삼았던 것들이며 그 가운데 달마대사의 이입사행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 뒤 김영태(金瑛泰)는 『송고승전』에 실린 연기설화는 『금강삼매경』이 신라에서 처음 출현한 것을 의미하고 신라에서 유포된 사실을 설화화한 것이며, 이 경전은 신라불교가 불교의 진수를 재결집한 진경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작자는 신라 10성 중 대안·사복·혜공 등 복수의 인물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특히 대안은 현행 경전의 서품 제1에서 「총지품」 제8에 이르기까지 제목과 차례를 정하였다고 하였다. 반면 로버트 버스웰(R.E. Buswell)은 이 경전의 찬술자를 최치원 비문에 근거하여 신라의 법랑(法朗)이라 비정하고 그가 선덕여왕 치세(632~646)에 도신(道信)의 문하에서 선을 수행한 적이 있으며 중국에서 신라에 처음 선을 전한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경전의 찬술 시기를 676~685년이라고 비정하였다. 한편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은 현장과 자은(규기)의 유식 법상종에 대항하는 한 갈래였던 여래장계의 중심에 있었던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하고 대안이 이것을 8품으로 구성하여 이 경전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주장들은 그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지만 아직 이 경전의 성립 공간과 주체 및 배경에 대해서는 좀 더 해명해야할 할 부분이 남아 있다고 판단된다.

2. 연기설화와 분황 원효

『송고승전』의 「원효전」은 한 고승의 전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경전의 연기설화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때문에 그의 전기는 성격이 괴팍하다고 ‘왕따’를 당해 백고좌법회에 참예하지 못한 당대의 석학인 분황의 명예회복을 꾀하는 것으로 읽힐 정도이다. 이후 『금강삼매경』하면 분황이 연상될 정도로 우리에게는 긴밀한 경전이 되었다. 전기에 실린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얼마 안 있어 왕의 부인이 머리에 악성의 종기가 생겼다. 의사와 무당들도 효험을 내지 못하였다. 왕자와 신하들이 산천의 신령한 사당에 기도를 드리려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떤 무당은 ‘만일 사람을 시켜 다른 나라에 가게 해서 약을 구하면 이 병이 곧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사신을 선발하여 바다 건너 당나라에 건너가 치료방법을 찾게 하였다. 그런데 남쪽 바다 가운데에서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서 파도에서 뛰쳐나와 배에 올라가서 사신을 맞이하여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궁전의 장엄함과 화려함을 보여주고 검해(鈐海) 용왕에게 알현시켰다.

용왕이 사신에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 왕비는 청제(靑帝)의 셋째딸이다. 우리 용궁에 예전부터 『금강삼매경』이 있었는데 곧 두 가지 깨달음[二覺]이 원만히 통하고[圓通] 보살행을 나타내었다. 이제 왕비의 병에 의탁하여 증상연(增上緣)을 삼아서 이 경전을 부쳐서 저 나라에 출현시켜 유포시키고자 할 따름이다’고 하였다. 이에 삼십 장쯤 되는 중첩된 흩어진 경전을 사신에게 주면서 다시 말하였다. ‘이 경전이 바다를 건너가는 도중에 마군의 장난에 걸릴지도 모른다.’ 용왕은 칼을 가지고 사신의 장단지를 찢어 그 속에 넣고서 밀납 종이로 봉하여 약을 바르니 장단지가 예전과 같았다.

용왕이 말하기를, ‘대안 성사로 하여금 차례를 매겨 엮게 하고, 원효 법사를 청하여 주석을 지어 강론하게 하면, 왕비의 병이 낫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을 것이다. 가령 설산의 아가타약[無去藥]의 효력도 이것보다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용왕이 사신을 전송하자 해면을 나와서 드디어 배에 올라 귀국하였다. 돌아온 사신에게 경위를 들은 왕은 기뻐하면서 곧 대안 성사를 불러 차례에 따라 엮게 하였다. 차림새가 특이하였던 대안은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늘 저자거리에서 동으로 만든 발우를 치며 ‘크게 편안하시오, 크게 편안하시오’라고 외쳤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웠던 것이다.

왕은 대안을 불러들이라고 명하였다. 대안은 ‘경전만 가져다 주십시오. 왕의 궁궐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고 말했다. 대안이 경전을 얻고서 배열하여 여덟 품을 만드니 모두 부처님의 뜻에 부합하였다. 대안이 말하였다. ‘빨리 원효에게 가져다주어 강론하게 하십시오.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분황은 본래 태어난 상주에 머물 때 이 경전을 받았다. 그가 사신에게 말하였다. ‘이 경전은 본각과 시각의 두 가지 깨달음을 종지로 삼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소가 끄는 수레를 준비하여 책상을 두 뿔 사이에 두고 붓과 벼루를 갖추어 주십시오.’ 시종 소가 끄는 수레 위에서 주석을 지어 다섯 권을 만들었다. 왕이 요청하여 날을 정하여 황룡사에서 설법하기로 하였다. 한데 당시에 경박한 종도가 새로 지은 주석을 훔쳐갔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사흘을 연기한 뒤 써서 세 권을 만들었다. 이것을 ‘약소’(略疏)라고 한다. 설화에 따르면 신라에는 광략(廣略)의 두 가지 소(疏)가 있었는데 모두 본토에 유행하였다고 전한다.

처음 분황이 광소(廣疏) 5권을 써서 올렸는데 누군가에게 도난당하였다. 다시 3일을 연장하여 약소(略疏) 3권을 써서 황룡사에서 강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광소는 없었고 약소만 있었는데 원효의 수승한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 구성하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결국 중국에는 약소 3권만이 전래되었고, 뒷날 인도에서 온 번경삼장(飜經三藏)이 그것을 고쳐 ‘논’(論)이라고 하였다고 찬녕은 『송고승전』에서 적고 있다. 여기서 ‘논’이라 붙인 것은 분황의 강한 자부심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짐작되며 그 의미는 ‘논소’(論疏), ‘논석’(論釋), ‘논해’(論解)의 의미로 사용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분황이 약소를 지어 황룡사 큰법당의 법상에 오르자 왕과 신하 및 승려와 불자들이 법당을 구름처럼 에워쌌다. 그의 설법은 “얽힌 것을 풀어 줌에 법칙으로 삼을 만하였으며, 칭찬하고 감탄하여 그 소리가 허공에 치솟았다”고 하였다. 『금강삼매경』 설법을 마무리한 분황은 소리 높여 말하였다. “지난 옛날 백 개의 서까래를 모을 때에는[昔日採百緣時] 비록 참예하지 못했지만[誰不豫會],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놓는 곳에서는[今朝橫一棟處] 나만이 할 수 있구나[唯我獨能].” 그러자 당시의 수많은 이름 높은 승려들이 얼굴을 숙여 부끄러워하고 잘못을 인정하여 참회하였다고 전한다.

분황은 석존의 탄생게인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삼계개고(三界皆苦), 아당안지(我當安之)’에서 ‘유아독존’을 ‘유아독능’으로 놀랍게 자리바꿈하여 되살려 내었다. 이 ‘유아독능게’는 바야흐로 분황 원효시대를 여는 사자후였다. 이후 한국사상사에서 분황은 그 이전과 그 이후를 가르는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고영섭 /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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