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정진치 않고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때로는 좋지 않은 정진까지도 그 의미성을 부여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의미는 역시 자기를 발전시키면서 아울러 주위도 희망차게 하는 그러한 정진만을 일컫는 것이다.
l2연기에서 무명(無明)이 있기 때문에 행(行)이 있고, 행에 연해서 식(識)인 분별심이 생겨나며, 이어서 유(有)인 업(業)이 있어서 남[生]이 있게 된다고 하는데, 생이 있으면서부터 인생의 고난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응당히 받아야만 하는 멸(滅)의 고통을 자기가 달게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남의 일과 같이 생각하며, 때로는 전가(轉嫁)시키기에 급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고생은 사서라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 고생은 사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고생은 주어진 것이며, 이를 극복하는 데만 그 의미가 있다. 그리고 고생을 하는 사람이 자기가 지금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정이기 때문에 더 이상 견딘다는 것은 힘에 겨운 일이다.
이러한 고생을 무엇 때문에 일부러 사서 하겠는가. 고생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야 그것을 경험해 보기 위해서 인생수업 삼아 고생을 한번 해 본다고 하지만 삶 자체에 이미 내재(內在)해 있는 고생을 더 사서 어쩌자는 것인가. 그래서 고생을 말할 때에 ‘고생은 사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이 말은 우리가 고생이라고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주관적으로는 낙일 수도 있고 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고통스럽다고 자인하면 비참한 사람만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이것은 고가 아니라 낙일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불고불락(不苦不樂)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생은 그냥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에 자기도 모르게 극복이 되는 것이며, 튼튼한 반석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육조 혜능 대사가 지적한 “좋은 것도 생각하지 말고 나쁜 것도 생각하지 말아야[不思善 不思惡] 진짜로 생각한다.”는 것과 같은 내용이라 하겠다.
또한 우리가 쓰는 말 중에 ‘미쳤다’든지 ‘미친 사람’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말은 물론 정신 분열이 일어나서 행동이 광적인 사람을 일컬어 하는 말이지만, 다른 뜻에서는 정반대로 쓰이고 있다. 즉 어느 정한 목표에 이르는 것을 ‘미쳤다’는 등의 표현으로 쓰고 있으며, 이에 이른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만약에 이러한 상태를 인식했다면 그는 이미 미친 사람이 아니라 인식한 사람일 뿐이며, 다시 또 그러한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가 이러한 의미에서 미친 사람이어야 한다. 아직 덜 미치고, 미치지 않으려고 하니까 주장이 많고 남의 장단점이 자주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치는 것은 정진을 말한다. 고생을 못 느끼는 것도 정진력이다. 정진이 없는 생활이란 무의미하며, 이러한 의미에서는 차라리 실패를 무릅쓴 정진이라도 안하는 것보다도 낫다는 것이다. 정진은 삶 그 자체이다. 정진함으로써 멸이나 병(病)이나 노(老)까지도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어둠이 사라지면 밝음은 저절로 오게 되어 있다.
어둠과 밝음은 둘이 아니라 이면을 가진 한 물건이다. 어둠이 두려운 사람은 어두움 때문에 밤길을 못가는 것과 같이 죽음을 싫어하는 사람은 죽음 때문에 사는 것도 현재 큰 짐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시시각각으로 싫어하는 죽음이 점점 다가옴을 스스로가 느끼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조차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말만 사람이지 사람이 아닐 것이며, 생각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언설(言說)은 훌륭할지 모르나 신용키 어려운 사람이다. 잘 아는 것(解)도 중요하지만 실천 측 정진함(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해행일치(解行一致)를 향상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기원전 4세기경에 알렉산더 왕이 인도를 침범한 때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 당시의 사문들과 논쟁이 벌어졌는데, 정복자로서의 오만함과 문화적인 우월성 때문에 편견을 가지고 왕은 사문들을 대하였던 것이다. 마침 자기를 보필하는 대철학자가 함께 있어서 알렉산더는 이 철학자에게 명령하기를 저 사문들을 골탕 먹일 수 있는 방법을 궁구해 보라고 하니까, 그 철학자는 어려운 질문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질문인즉 묘안을 짜서 문제를 생각해 놓고, 만약에 정확히 잘 대답을 하면 살려 주지만 조금이라도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닐 때는 가차 없이 죽인다는 조건을 붙여서 사문들에게 물었던 것이다.
질문은 대강 이러했다. “언제까지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냐?”라고 철학자가 물으니, 사문들은 서슴없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못할 때까지 산다.”고 했을 때, 철학자인 자신도 예기치 못했던 명답이었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니까 여러 가지 이유를 대어 결국은 나무더미 위에 올려놓고 사문들을 태워 죽였던 것이다. 이때에 사문들은 자기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항하거나 생떼를 쓰지 않고 초연히 죽어갔다고 한다. 이를 지켜 본 수많은 병사들은 죽음에 대해서 초연하게 임하는 사문들을 보고는 감탄해서 자기들의 본국인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삭발하고 사문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확신(確信)이라고 할까 신념(信念)같은 것을 배우게 되는데, 이 확신이나 신념은 모든 행동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것이 없는 정진이나 결제는 무가치하다고 본다. 끝없이 정진할 때에 확신은 저절로 굳어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집착하지 않는 정진만이 최상의 수행이다. 가치에 대한 의미성을 너무나 부연(敷演)해도 본래의 뜻을 상실할 수가 있다. 그냥 정진할 때에 차차로 정립이 되어서 확신도 생겨나는 것이다. 정진은 중선(衆善)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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