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롭고 상상력이 무한했던 젊은 시절,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꿈을 꾸었다. 나이가 더 들고 현명해졌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그런데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 지금,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만약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내가 본보기가 되어 가족을 변화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그들의 힘으로 조국을 변화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세상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었을지 누가 알겠는가?”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묘소에 있는 한 성공회 주교의 묘비에 적혀 있는 유명한 글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자기 혁신(Innovation)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조직과 사회,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혁신이란 자기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변화 없이는 발전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라고 했다. 얼마 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시크릿』이란 책 역시 “우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우주의 운명을 만드는 창조자다.”는 주장으로 관심을 끌었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한 사람이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 사람의 마음이란 결론이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자기로부터의 혁신이 우리 삶 속에서 활짝 꽃 피울 때, 이 사회가 더욱 따뜻하고 성숙해질 것임은 자명하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도 세상을 바꾸는 영적 거인들이 우리 곁에서 세상의 빛이 되고 있다. 자기를 희생해 우리 사회와 지구촌의 환경과 생명, 인권을 지키고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수행자들이 그분들이다.
새만금 삼보일배를 진행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던 수경 스님, 생명평화탁발순례를 오랫동안 해온 도법 스님, 그리고 금정산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문제로 여러 차례 목숨을 건 단식을 했던 지율스님, 굶주리는 북한동포를 돕기 위해 70일간의 단식정진에 나선 법륜 스님 등이 그들이다.
수행자인 동시에 불교를 대표하는 환경·생명운동가인 이들은 한결같이 생명위기, 삶의 황폐화를 낳게 한 현대문명의 자기모순을 극복하고 넘어서기 위한 근원적 성찰과 모색으로 점철한 삶을 보여주었다. 21세기 절체절명의 화두인 생명위기, 공동체 해체의 문명사적 위기에 대한 바람직한 해답의 길을 온몸을 던져 찾고 있는 이들은 자기를 희생해 온 생명을 살리는 환경보살이자 대승보살임에 틀림없다.
도법·수경 스님과 김지하 시인 등이 생명평화사상에 주목하고 인간이 자연에 저지른 죄악을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는 순례와 삼보일배행(三步一拜行)에 나선 것은 전혀 다른 형태의 환경운동이었다. “16세기의 르네상스가 인간의 재발견으로 시작되었지만, 21세기 신르네상스는 자연의 재발견으로 일어날 것이다.”는 말 그대로 환경운동을 넘어선 생명평화운동의 서막을 연 것이다. 르네상스 때의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자연의 정복자였다면, 신르네상스에서의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협력자로 위치 지워질 것이란 예측이 실현가능함을 보여주었다고나 할까.
한편으론, 환경운동 외에도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는 세계 평화와 인권을 위해 한 몸의 안위를 잊은 스님들이 적지 않다. ‘세계 4대 생불(生佛)’로 불리는 한국의 숭산(1927~2004) 스님,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1929~2007) 스님,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이 바로 그러한 분들이다. 이들 네 분은 한결같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평화와 불법(佛法)을 위해 전 생애를 던진 ‘진리의 실천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치열한 삶 자체가 수행’이요, ‘전쟁터와 삶의 현장이 바로 법당’임을 일깨운 이들의 위대한 가르침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비행과 보살행, ‘지금 여기’에서의 깨달음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스님들의 치열한 수행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고통받는 모든 생명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 대승보살들의 정진은 삶과 진리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비폭력적이고 자비와 연민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는 무아(無我)의 실천에 매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우리 시대 대승보살의 삶과 수행은 폭력과 투쟁으로 점철된 혁명가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비폭력 무저항주의 종교인이었던 간디와 쿠바의 혁명가 체게바라를 비교한 도법 스님의 칼럼(2007년 1월 2일자 경향신문)은 이 점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체 게바라는 인간불행이 불의 때문이라고 보았고, 간디는 진리(생명의 실상)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보았다 … 체 게바라는 승리와 성공을 위해 필요한 수단을 다 사용했지만 간디는 진리와 사랑의 힘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았다. 체 게바라의 길은 분노와 증오와 원한을 끊임없이 재생산시켰지만 간디의 길에선 분노, 증오, 원한이 정화되어 갔다. 체 게바라는 목적을 위해 분노, 증오, 음모, 술수가 정당화되었지만 간디는 그 어떤 명분의 분노, 증오, 술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 글은 생명평화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우리 시대 선지식들의 수행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에 바탕한 자기 헌신과 원력을 통해 대승보살들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있는 셈이다.
불교는 자기로부터의 혁명(깨달음)을 말하고, 깨달은 바를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삶을 이상적으로 여긴다. 선사가 수행자나 일반인과 함께 생활하며 수행과 교화에 힘쓴다는 ‘이류중행(異類中行)’이란 말이 그것이다. ‘이류(異類)’란 인간과는 다른 생물, 즉 동물을 뜻하는 말이다. 이는 곧 세상의 시비와 사상으로부터 벗어나 중생의 불성이 본래 청정함을 깨닫고 모든 생명과 함께 깨달음의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 시대의 대승보살들은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의 고통에 휩싸인 불완전한 자기에서 벗어나 완전한 본래의 자기를 회복해, 나와 남이 함께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오늘도 길위에서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김성우/현대불교신문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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