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26일 순례 23일째를 맞은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가 17번 국도를 따라 오체투지를 실시하고 있다. 사진=불교신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25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출발한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오체투지 순례가 20일을 넘어섰다.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진행되고 있는 이번 오체투지는 종교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오체투지는 지리산을 출발해 계룡산 중악대까지 이어지며, 향후에는 북녘 땅의 묘향산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는 이보다 앞서 지난 2003년 전북 부안 해창바다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310㎞를 삼보일배하면서 새만금 갯벌 살리기의 필요성과 절박함을 세상에 알린바 있다. 또한 지난 2월부터는 환경재앙을 불러오는 한반도대운하에 반대하는 도보순례를 100일간 하기도 했다.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오체투지와 삼보일배는 해방이후 급격하게 서구자본주의에 오염되어 이분법적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사회에 경종을 울린 ‘작지만 강력한 메시지’이다. 또한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아름다운 동행’은 모든 것을 내편과 네편으로 나누고, 또 남의 잘못으로만 돌리는 우리들에게 조용하지만 강력한 경책을 하고 있다. 또한 ‘내면’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호소이다.
지난 2003년 새만금 갯벌 살리기 삼보일배 이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봇물처럼 ‘삼보일배 열풍’이 불었던 배경도 여기에 있다. 정치ㆍ경제ㆍ사회ㆍ노동 등 각 분야에서 이슈가 생겼을 때 대립 일변도의 투쟁보다는 삼보일배가 대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선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를 낮춤으로써 오히려 나를 높이는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나’는 ‘나만의 나’가 아닌 ‘너 그리고 우리를 포함한 나’라는 사실을 삼보일배와 오체투지를 하는 의미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지난 2005년 12월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린 홍콩에서 한국 농민 800여명이 삼보일배를 통해 농산물시장 개방 반대의 주장을 널리 알렸다. 당초 과격폭력시위를 염려했던 홍콩당국과 시민들은 한국 농민들의 삼보일배를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연합뉴스는 “이날 삼보일배를 지켜본 한 홍콩 시민은 ‘한 번도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없다’며 ‘한국 농민들의 주장의 절실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당시 삼보일배를 주도한 전국농민총연맹 정광훈 한국 민중투쟁단장도 “WTO 체제가 지구촌의 모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기에 모든 생명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평화시위의 일환으로 삼보일배를 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국 농민들의 삼보일배는 홍콩은 물론 전 세계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으며 농민들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알렸다. ‘과격한 투쟁’보다는 ‘조용한 정진’이 더욱 호소력 짙게 다가설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다.
그렇다면 오체투지와 삼보일배 등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을 통한 호소에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같은 방법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첫째, 특정 현안이 발생했을 때 문제의 원인을 유리하면 내 탓이고, 불리하면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이분법적이고 이기적인 방식이 이제는 더 이상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 물리적 충돌 보다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 보다 긍정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그동안 이분법적 서구자본주의 논리에 익숙해졌던 사람들이 이제는 불이적(不二的) 동양사상(특히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실, 해방이후 한국사회는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을 겪었다. 물론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변화에 끼친 긍정적인 면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빚어진 단점과 폐해를 이제는 점검하고 진단할 시기가 됐다. 갈등과 투쟁의 역사는 ‘나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개인과 조직에 대해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을 갖게 했다. 또한 ‘다른 쪽’의 주장은 수용할 수도 없고, 수용해서도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 같은 논리에 기반을 둔 논리는 결국 주장을 표현하고 관철하는 과정에서 폭력적인 형태를 수반하고 말았다. 지난 1980년대 한국 사회는 최루탄과 돌멩이가 난무했다. 도덕성이 취약한 군사정권은 최루탄과 경찰을 앞세워 민초들의 정당한 요구를 짓밟았다. 여기에 맞선 민주세력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만) 물리력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 사회는 그 같은 방법보다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주장을 펴고 관철하며, 또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어 가고 있다.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오체투지와 삼보일배는 그동안 한국사회를 철저하게 지배해온 서구 중심 자본주의 논리의 생명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역사적 몸짓이다. 또한 사회 일각에 남아있는 이분법적 논리를 혁파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이기도 하다.
결국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발견한 부처님 가르침이 극심한 대립구도가 형성되어 있는 인류문명과 우리 사회의 나침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우주에서 나 홀로 존귀하다”는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나에게서 비롯되고 있으며, 나는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나’인 너와 우리도 똑같이 존귀하다는 가르침을 현대인들은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사회뿐 아니라 인류는 더 이상 투쟁과 갈등의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투쟁과 갈등은 파괴와 소멸만을 초래할 뿐이다. 오랜 기간 우리 사회와 세계를 지배해온 이분법적 서구논리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세계의 모든 존재가 각자 지닌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고, 직면한 크고 작은 문제들을 푸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삼보일배와 오체투지는 작지만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우리 사회와 세계에 조금씩 메아리치고 있다. 지난 8월25일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가 오체투지 순례 첫날 낭독한 기도문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외침이다. “우리는 생명과 평화, 그리고 진리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자 합니다. 현 상황에서 누구의 잘못을 탓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오지 진리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듯이, 구중궁궐의 성벽으로 사라진 절대 권력을 우리의 마음에서 지우려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자연과 국민, 그리고 미래세대와 북녘의 동포를 향해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작은 연대의 몸짓을 시작하며 우리의 희망을 찾고자 합니다.”

이성수/불교신문 편집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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