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없지 않고 있는가?

많은 철학자들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고대의 파르메니데스부터 근대의 라이프니츠, 그리고 현대의 하이데거까지. 같은 질문이 되풀이 된다는 것은 여전히 그 답을 찾지 못해서일까요?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기 직전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모두들 슬픔에 겨워 누구는 흐느끼고, 누구는 벽에 머리를 박고 있고, 누구는 그저 멍하니 앉아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정작 죽음을 목전에 둔 소크라테스는 당당하기만 합니다. 무엇이 그를 저토록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요?

▲ J.L.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다비드는 프랑스대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선동자였다. 이 작품은 영원한 가치를 위한 고결한 희생을 찬양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공자가 광(匡)이란 지방에 머물렀을 때의 일입니다. 이 곳 사람들이 공자 일행을 잡아두고 핍박을 가했습니다. 공자를 양호란 사람으로 오인하고 위협을 가한 것이지요.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공자가 말합니다.

“문왕이 돌아가셨으니 그 문화가 나에게 있지 않느냐? 하늘이 장차 이 문화를 없애려하지 않는다면 저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느냐?”

공자의 말에는 중국 문화의 수호자라는 자부심이 가득합니다. 그런 자부심에는 하늘이라고 하는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자리하고 있고요. 《논어》에는 공자가 하늘을 언급한 일이 자주 나옵니다. 이들 공자의 말을 종합해 보면 하늘은 인간의 운명과 길흉화복, 나아가 역사와 문화를 주재하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이런 하늘이 자신에게 주나라 이래의 중국 인문주의 문화를 지키라는 사명을 내렸다는 것이 공자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강렬한 믿음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태연할 수 있었던 힘이지요.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안 예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기도문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신까지 영광이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당당하게 빌라도 앞에서 십자가를 매는 것입니다. 마지막 숨이 멈추는 순간에도 예수는 “다 이루었다.”라고 하며 머리를 숙입니다. 십자가는 예수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이었던 것이지요.

소크라테스는 법정에 서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자신은 신의 신탁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시종일관 신의 이름으로 자신이 한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소크라테스에게는 주어진 마지막 사명이며, 신의 섭리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하늘을 가리키며 기꺼이 독배를 마시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예수, 공자. 이들은 결코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때와 장소를 달리해서 다른 역사와 문화 속에서 살았지만, 죽음 앞에서 똑같이 태연했고 다 같이 당당했습니다. 이들이 그토록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존재가 있고, 자신은 그 존재의 수호자, 내지는 그로부터 모종의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진리는 바로 이런 보편적 절대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절대적인 진리가 있음을 모르고 있다고 통탄하며 이런 무지의 자각을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역설하였던 것이지요. 공자 또한 15살에 학문에 뜻을 두고 평생을 통해 나아간 그 길은 지천명(知天命), 곧 하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신(神), 혹은 하나님, 혹은 하늘(天)로 그 명칭은 달리할지언정 유일하며 절대적이고 영원히 변치 않는 보편적 존재가 실재한다는 믿음에는 조금도 물러섬이 없습니다.

이들은 지역과 역사와 문화의 차이에 따라 얼마간 성격과 내용을 달리 하지만 대체적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만물을 초월하여 만물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권능을 갖고 있거나, 만물 속에 보편적으로 실재하면서 만물의 본질을 형성하는 실체라는 특성을 나누어 갖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이를 영원불변한 고정된 실체라고 이름지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실체는 초월성, 보편성, 절대성 등의 특성을 갖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 혹은 하느님, 유교의 천(天), 서양 철학에서의 근원자, 혹은 실체(實體) 등과 같은 단어들이 이런 특성을 지니는 개념들입니다. 인도의 브라흐마나(Brahman)도 이런 자리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개념인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동서고금에 어찌하여 이런 공통의 개념이 나타는 것일까요?


2. 문명의 탄생과 통합의 논리

그들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인간들은 누구든 다 유혹해요.
…(중략)…
그대는 얼른 그 옆을 지나가되, 꿀처럼 달콤한 밀랍을 이겨서
전우들의 귀에다 발라주세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말예요. 그러나 그대 자신은 원한다면 듣도록 하세요.
그대는 돛대를 고정하는 나무통에 똑바로 선 채 전우들로 하여금
날랜 배 안에 그대의 손발을 묶게 하되, 돛대에다 밧줄의
끄트머리들을 매게 하세요. 그러면 그대는 즐기면서 세이렌 자매의
목소리를 듣게 될 거예요.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 반인반조인 세이렌의 유혹을 이기는 오디세우스. 세이렌의 추락은 인간에 의해 자연이 극복되고 문명이 시작됨을 내포한다.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고 문명을 건설해 가는 과정의 알레고리(풍유)입니다. 오디세우스의 지혜 앞에서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도, 마녀 키르케도, 세이렌의 유혹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하지만 이 모험의 과정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분열, 노동하는 자와 노동하지 않는 자의 분업이었으며 사유와 경험의 분리였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적 자연(욕망)을 억압함으로써 외부 자연에 대한 지배를 가능하게 하였고, 사회라는 ‘제2의 자연’에 예속시킴으로써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M. 호르크하이머와 T.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증명하고자 했던 것은 이런 분열과 분업, 그리고 분리를 통해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고 문명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고대문명이 찬란했던 곳은 하나같이 통합의 논리를 내세우고 발달시킵니다. 중국문명에서의 유교, 서구문명의 이성주의와 기독교, 인도문명의 브라만교 등은 모두 강력한 통합의 논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 통합의 논리는 차별적 신분제도를 정당화하고, 개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며, 자유로운 영혼을 구속하였습니다.


3. 왜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색은 나[我]가 아니다. 만일 색이 나라면 색에서 병이나 괴로움이 생기지 않아야 하며,…(중략)… 수·상·행·식도 이와 같으니라.”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합니다. 법(法)은 존재를 가리키고, 인(印)은 도장을 찍는다는 말이니, 삼법인은 ‘존재는 이렇다’라고 인증샷을 날리는 것이지요. 제행무상은 일체 존재는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이고, 제법무아는 독립불변의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존재의 시간과 공간 측면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 김동화, 《불교학개론》

당시 인도의 브라만교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영원불변한 존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우주적 실체를 범(梵, brahman)이라 하고, 개개 사물에 내재해 있는 실체를 아(我, atman)라고 하여 양자는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을 제기하였지요. 석가는 이에 대해 그런 실체는 없다고 단언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없다’는 말은 인식할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를 무기(無記)라 하는 것입니다. ‘아가 없다[無我]’, 혹은 ‘아가 아니다[非我]’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독립불변의 고정된 실체는 없다’거나, ‘독립불변의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삼법인설이야말로 불교를 불교이게 만드는 최고의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제행무상은 어느 종교나 사상에서도 말하는 것이지만, 제법무아는 오직 불교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는 법문입니다. 실로 위대한 가르침인 것은 고래로 동양과 서양에서 구축한 인류문명의 사상적 근간을 뒤엎어 버리는 가장 강력한 각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살펴본 것처럼 인류문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영원불변의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인간은 욕망을 억압하고 사회적 차별을 감내해 왔던 것이지요. 특히 남성중심의 문명체제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진 억압과 차별은 더욱 극심하였습니다. 무아론은 이런 믿음의 허구성을 단번에 드러내어 엎어치기 한판으로 뒤집어 버리는 쾌거였던 것입니다.

뒤돌아보면 인류는 참으로 많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십자군 전쟁, 유대인 대학살, 난징 대학살, 캄보디아 킬링필드, 문화대혁명, 보스니아의 인종청소…등등,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한 그 아픔들은 통합의 논리를 내세운 이념의 희생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국가와 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저질러졌던 것입니다. 그 신앙이 굳세고, 그 확신이 강렬할수록, 비극은 더욱 더 확대되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그 비극의 상처는 현재진행형이기에 부처교설의 이 무아론이 더 새로워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 또 한사람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한 젊은이의 꿈을 다시 들어보며 5월에 부처님 오신 뜻을 되새겨 볼까 합니다.


▲ 존 레논과 그의 부인 오노 요코가 침대 위에서 장기간 내려오지 않으며 반전 평화 시위를 하는 사진
상상해 보세요, 천국이 없다고. 해보면 어렵지 않아요.
우리 밑에 지옥은 없고, 우리 위엔 하늘뿐이죠.
상상해 보세요, 모두들 오늘을 위해 산다고.
상상해 보세요, 국가가 없다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죠.
무엇을 위해 죽일 일도 죽을 것도 없어요. 또한 종교도 없구요.
상상해 보세요. 모두들 평화롭게 산다고.
상상해 보세요, 아무런 소유도 없다고. 당신은 그럴 수 있을까요.
욕심을 낼 필요도, 굶주릴 이유도 없어요. 형제애만 있을 뿐이죠.
상상해 보세요, 모두가 함께 온 세상을 산다고요.
당신은 나보고 몽상가라고 할지 몰라요. 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예요.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함께하길 바래요. 그렇게 하나가 되어 이 세상을 살아요.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Imagine no posse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존 레논, 〈imagine〉

- 김문갑 / 철학박사 · 충남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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