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사이버공간이라는 단어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인터넷이 대중화된 1999년 말에서 2000년 무렵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불과 5년 사이에 사이버공간은 물리적 환경에 비견할만한 제2의 환경으로 자리 잡았다. 사이버공간은 현대인의 종교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사이버공간’이라는 말은 1984년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를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이래 하루하루가 다르게 우리의 생활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소설 ‘뉴로맨서’에서 사이버공간은 육체를 벗어난 초월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소설속에서 현실의 공간은 ‘텔레비전 공채널 같은’ 잿빛이다. 육체는 거추장스럽고, 육체가 활보하는 현실 공간은 그래서 버겁다. 주인공인 케이스는 실제의 공간을 견디지 못하고 마약에 절어 살면서 탈육체의 정신(혹은 영혼)이 활개치는 사이버공간으로 돌아가기를 꿈꾼다. 깁슨이 소설에서 제기한 탈육체의 정신적 공간의 은유는 별다른 저항 없이 흡수되고 전파되었다.
사실 육체와 분리된 정신작용의 극대화는 낯설지 않다. 아니, 대단히 오래된 사유 패턴이다. 영육 이원론으로부터 데카르트의 이분법에 이르기까지 육체와 정신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하면서 전자보다 후자를 강조하는 사유 패턴이 그것이다. 서구에서 육체에 대한 관념은 육체를 비이성, 감정, 욕망의 공간으로 보았던 그리스 철학적 기독교에 의해서 형성되어 왔으며, 철학에서 정신과 육체의 대조는 기독교에서 영과 육의 대립으로 표상되어 왔다. 육은 세계질서를 위협하는 도덕적 부패의 상징이며 정복의 대상이었다.
기독교는 특히 육을 타락한 인간과 비합리적인 신성거부의 상징으로 보면서 그런 관점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사이먼 페니는 현대사회에 육체이탈의 욕망이 각종 영화나 사이버펑크 소설, 나아가 사이버공간을 둘러싼 각종 환상들을 통해 번성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육체 혐오적인 서구 기독교 교리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본다. 윌리엄 깁슨의 위치는 성 어거스틴의 위치와 대단히 유사하며, 사이버공간에 대한 깁슨의 상상력은 기독교 교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철학적 전제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페니는 이를 ‘육체를 육체의 이미지, 즉 정신의 피조물로 대체함으로써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강화’하려는 기획으로서 ‘탈육화된 정신에 대한 합리주의적 꿈의 명백한 연속이며 육체의 부정에 대한 오랜 서구적 전통의 부분’으로 본다. 한편, 데이비드 노블은 오늘날 테크놀로지에 대한 매혹은 종교적 신화와 오래된 상상에 기반한 것이라고 본다.
현대의 테크놀로지는 초자연적 구원에 대한 오래된 꿈, 영적 갈망에 붙들려 있으며,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추동한 힘은 다른 세계, 다른 현실에로의 초월과 구원에 대한 갈망이라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수세기동안 정보 미디어는 점점 더 탈물질화되어 왔고, 이동가능성과 편재성이 증대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인류의 오랜 꿈은 현대에 사이버펑크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형성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그러한 상상은 우리 문화의 갈망, 나아가 인간의 오랜 갈망을 가리키는 것이다.
종종 종교의 외양을 하고 있지 않아도 문학작품, 호러물, 영화, 만화 등이 다른 현실에 대한 욕망을 표출해 왔지만, 이제 사이버공간은 이 모든 것에 더해서 인간의 종교적 욕망을 발산시킬 수 있는 새로운 매체로 등장하고 있다. 사이버공간은 어떤 점에서 그렇게 현대의 ‘오래된 욕망’을 매혹시키는 것일까. 현대에는 과거와는 뚜렷이 대비되는 주목할 만한 중요한 변화가 있다. 그러한 오래된 탈육체의 욕망이 첨단 테크놀로지와 결합되고 있다는 점이다. 첨단기술 발달은 탈육체적 탈인간적 형식의 존재의 가능성을 지시한다.
첨단 테크놀로지는 그러한 준비된 욕망과 상상으로 인해 큰 마찰 없이 현실 속으로 매끄럽게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다. 또한 육체를 초월하고 거리를 초월할 수 있다는 유혹에 더해서 비동시성, 쌍방향성의 특징은 단말기를 통한 정보의 소통을 공간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또한 마치 내 정신의 일부를 쌓아놓은 듯 나의 정보를 시각화해서 옮겨놓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정보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은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컴퓨터 소통 기술이 발달하고 일상화되면서, 소위 사이버공간은 많은 사용자들에게 버거운 현실을 ‘초월’하게 해주는 탈육체·탈현실의 유토피아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현실이 암울할수록 온라인게임 등 사이버공간 중독자가 많아진다.
그들에게 사이버공간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게 ‘구원’해주며 안식처를 제공해준다. 지친 현대인들은 사이버공간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고, 주어진 ‘나’가 아닌 새로운 ‘나’를 창조한다. 이들은 마음이 허전할 때 자기도 모르게 사이버공간에 접속하여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또한 웹에 매달려있는 시간이 자꾸 길어지면서 컴퓨터를 끄고 빠져나오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작업 효율은 떨어지는 내성 현상을 보인다. 이들은 인터넷을 떠나 있으면 왠지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금단현상을 경험한다. 그 결과 강박경향, 충동성, 우울증, 저하된 자존감 등의 정신병리학적 특성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현실세계는 암울하지만, 이들은 현실공간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만족감과 재미와 흥분을 사이버공간에서 대신 얻고 있다. 이처럼 사이버공간이라는 용어의 탄생에서부터 인터넷을 둘러싼 유토피아 담론들, 그리고 현대사회의 사이버 중독현상들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현실을 향한 종교적 욕망은 컴퓨터 모니터를 통한 정보의 소통에서 육체적인 물리적 현실과 ‘분리된 공간’을 ‘발견’해내고 있다. 그러나 탈육체의 환상이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지만, 모니터 안의 깔끔하고 멋진 (재현된) 아바타와는 달리, 모니터 앞의 나는 몇 시간째의 인터넷 항해로 건조해진 빨간 눈과 벌린 입을 가지고 두통과 견비통을 느끼고 있는 육체를 지닌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사이버공간의 근거이자 한계이다. 결국 사이버공간의 초월은 현실세계를 완전히 대신하거나 벗어나는 초월이 아니며, ‘되돌아옴으로써 가능해지는 초월’인 것이다. 따라서 사이버공간은 어디까지나 인공적 환경으로 개념화되어야 한다. 환경은 ‘둘러싼다’는 의미이며, 반드시 둘러싸이는 어떠한 유기체를 필요로 한다. 처음에 도구적 장치로 고안된 사이버공간은 이제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기술환경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 환경은 변화를 야기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급작스러운 단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상의 물리적 공간에서 의미화를 향한 욕망이 구조화되는 방식과 연속적이다. 사람들은 낯선 사이버공간에서도 의미를 추구하고 낯익은 자리로 만들어간다.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고 표현하며, 카오스적 공간에서 의미 있는 장소를 만들어내고, 타자들과 소통한다는 일상 공간에서의 의미화의 기본적인 방식은 사이버공간에서도 발견된다. 사이버공간에서도 사람들은 익명으로 떠도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여 표현하려고 하며, 공허한 바다를 헤엄치기보다는 낯선 공간을 장소감을 느낄 수 있는 친밀한 자리로 만들어가며, 소통을 갈망하면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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