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열전(東師列傳)》은 범해 각안(梵海 覺岸, 1820~1894) 스님이 찬술한 승전(僧傳)이다. 각안 스님은 신라 최치원의 후예로 완도사람이다. 14세 때 해남 대흥사 호의 시오(縞衣 始悟, 1778~1868) 선사에게 출가하여 입적할 때까지 대흥사에서 주석하였다. 스님은 초의(草衣)·호의·하의(荷衣)·응화(應化) 스님 등 대흥사의 6대종사에게 교와 선을 수학하였고, 이병원(李炳元)에게서 유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또한 태호(太湖)·자행(慈行) 두 스님에게서 재의(齋儀)를 배우기도 했다. 여섯 번이나 《화엄경》을 강의하였고, 12번이나 《범망경》을 강의하는 등 교학에 조예가 있어 대흥사의 13번째 대강사가 되었다.

내외전을 두루 섭렵한 스님은 저술도 적지 않다. 《경훈기(警訓記)》·《유교경기(遺敎經記)》·《사십이장경기(四十二章經記)》 등의 불교관계 저술과 《사략기(史略記)》·《통감기(通鑑記)》 등의 역사서 그리고 《박의기(博議記)》, 최치원이 찬한 사산비명(四山碑銘)에 주석을 첨부한 《사비기(四碑記)》·《명수집(名數集)》등이 있다. 현재 《동사열전》과 《시고(詩稿)》 2편·《문고(文稿)》 2편이 동국대학교에서 펴낸 한국불교전서 10책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전체 6권 198명 승려 전기 기록

각안 스님은 세 차례에 걸쳐 팔도를 유람하였다. 스님이 발로 디딘 경상도와 전라남북도(25세), 제주도(54세), 한양·함경도·충청도·전라도(56세)는 단순한 만행과 여행지가 아니었다. 수행자인 자신의 본분을 돌아보고 조선의 오랜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던 성찰의 땅이었다. 유적지에서는 역사의 흔적을 되새기고, 그 감흥을 시로 읊었으며, 이끼 낀 비문의 글을 옮겨 적기도 하였다. 수로왕릉에서는 옛 가야의 영고성쇠를 읽었고, 제주도에서는 학자들과 교유하며 차를 마시기도 하였다. 또한 용주사(龍珠寺)·표훈사(表訓寺)·마곡사(麻谷寺) 등 옛 사찰을 둘러보며 불교계의 현실을 살피기도 하였다.

《동사열전》은 전체 6권으로 구성되어 198인의 스님들의 전기기록을 수록하고 있다. 그 시간적 범위는 불교가 전래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부터 조선 고종 31년(1894)까지 1500여 년의 한국불교사 전시기를 아우르고 있다. 각 권의 시기별 분포는 활동시기를 기준으로 살폈을 때 전체 198명에서 삼국·신라시대 9명, 고려시대 10명, 조선전기 9명을 수록했다. 그리고 170명은 조선후기와 말기, 즉 선조 이후부터 1894년까지의 인물들이다. 인물별 분포는 비구승(比丘僧)이 196명으로 여기에는 중국 명나라의 스님으로 임진왜란 때 원정군과 함께 와서 정착했던 신해(信海)·보정(普淨) 두 스님의 전기도 수록되었다. 그리고 속인(俗人)으로서 수록된 인물이 2명(김대성·이침산)이다.

법명·호·속성·본향·사승관계까지 수록

《동사열전》의 각 승전내용은 법명·호·속성·본향(本鄕)에서부터 생몰연대와 단편적인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사승관계(嗣承關係)까지도 수록하였다. 그리고 저술과 중심사상, 신앙 등을 찬술하여 조선후기 불교계의 동향이나 스님들의 사회적 위치와 생활 등 구체적인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승전에서 찾을 수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승전은 전혀 수록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수록된 신라의 승전조차도 고려와 조선의 승전과 비교했을 때 수적인 측면에서 지극히 부족한 실정이다.

《동사열전》은 각 권의 서두에 ‘두륜산인구계선집편차(頭輪山人九階選集編次)’라고 하였다. ‘두륜산인구계’는 해남 대흥사에 주석하고 있던 범해 각안을 지칭한 것으로, 각안이 두륜산 대흥사에 머물면서 동국(東國)의 승전기록을 선별(選別)하여 모아 차례대로 엮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사열전》은 승전기록을 단순히 선집(選集)한 것이기 보다는 찬술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각안 스님은 사지류(寺志類)와 개인문집 등에서 승전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을 수집하였다. 불교계의 기록뿐만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지를 비롯하여 《청야만집(靑野漫集)》, 의상 스님이 찬술했다는 《산수기(山水記)》, 《팔역지(八域志)》 등 다양한 기록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찰기문이나 고기(古記)·증언(證言)과 같은 단편적인 기록은 승려의 행적이나 사상 그리고 불교 홍통의 사실과 불교사에 대한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동향을 파악하기에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각안 스님은 소략한 기록들을 일차적으로 수집하여 독자적인 체재를 마련하여 재구성하였다.

한국불교 역사·문화 전승 중요 자료

《동사열전》은 찬술된 이후 널리 간행되지 못했고, 그 유통 또한 활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스님들의 행적을 통해 우리나라의 불교사상과 신앙, 그리고 불교홍통(弘通)의 사실 등 한국불교의 역사와 문화를 전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삼국유사(三國遺事)》 등과 같은 종래의 우리나라 승전류가 있었지만, 그 종류나 수록 인물 수에 있어서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볼 때 《동사열전》은 각 시대의 불교계의 동향을 고찰할 수 있는 종합적인 한국불교의 역사서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사암 채영(獅巖采永) 스님이 1784년(영조) 찬집(撰集)한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가 있긴 하지만, 인도·중국·조선불교의 사자상승관계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어 승전기록은 지극히 소략하고 그 내용 또한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동사열전》은 《삼국유사》이후 6세기 동안의 불교사적 공백을 메워주고 있는 것이다.

찬술자 각안 스님은 불교 전성기의 기록이 사라지고, 인도와 중국의 불교만을 강조하고 있는 세태에 대해 개탄했다. 때문에 《동사열전》의 찬술은 승전의 의미와 더불어 조선불교의 법맥을 정리한 가치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찬술경향은 한국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와 대등하게 그 시종(始終)이 전개되고 있음을 강조했던 조선후기 역사인식과도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두 차례의 전란 이후 조선이 지닌 주체성을 발견하고 우리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재인식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비록 불교가 쇠퇴한지 이미 오래되어 그 명맥조차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조선의 유구한 불교역사와 그 문화는 면면히 이어져야 했다.

《동사열전》의 국역(國譯)작업은 대장경의 한글화 사업의 일환으로 시도되었지만, 원문에 대한 충실한 번역이 아니다. 그 내용이 소략하고 번역자 임의대로 내용을 첨가시켜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필자는 이전의 번역에 노고를 위로하며 그 오류와 소략한 내용을 보완하고자 한다. 또한 번역과 주석 작업에 머물지 않고 조선시대 불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눈과 귀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잘못된 부분은 일러주기 바란다.

오경후/한국불교선리연구원 책임연구원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