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śraddhā, P:saddhā, T:dad pa, E:faith; trust; to believe in, Cs:捨攞馱.※

‘信’은 우리말 ‘믿음’에 해당한다. 흔히 ‘그 사람은 신뢰감을 준다’, ‘그 보살은 신심이 아주 깊어’, ‘은행 거래하려면 신용이 높아야 유리해’라는 등의 표현을 보더라도 이 ‘신(信)’은 우리의 생활 속에 녹아있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또 중국 한(漢)나라 때 동중서(董仲舒)가 5상(五常)의 한 덕목으로 정립한 이래,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믿음’이란 말이 종교적 측면에서 사용될 때, 가끔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부 종교의 일부 신도들에 의해 안하무인격의 맹목적인 믿음이 전부인양 정당한양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태는 분명 그 종교의 본의와는 다른 후대의 손때가 묻은 해석과 적용이겠지만, 그대로 방관하는 것도 바른 태도는 아닐 것이다.

믿음(信, śraddhā), 불교적 시각?

그렇다면 믿음(信, śraddhā)에 대한 불교적 시각은 어떠할까? 불교 경론에 의거해서 믿음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또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믿음은 마음이 작용하는 많은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설일체유부는 46가지 심리작용 가운데 하나로, 유식학파는 51가지 심리작용 가운데 하나로 규정했다. 게다가 믿음을 각각 대선지법(大善地法)과 선심소법(善心所法) 범주에 포함시킨 것을 보면, 믿음 자체는 분명 유익한 것이고, 얻어야 할 것이며, 권장해야 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성유식론》6권(T31-29b22)에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믿음을 설명한다. 곧 모든 법의 현상과 이치에 대해 확신하고[信忍], 3보(三寶)의 참되고 청정한 성질에 대해 기뻐하며[信樂],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유익한 것에 대해 능력이 있음을 믿어 신장시키려는[善法欲] 마음의 청정함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석마하연론》1권(T32-597a08)에서는 보다 상세하게 10가지 의미로 정리한다. 곧 ①맑게 함[澄淨], ②결정함[決定], ③환희함[歡喜], ④싫어함이 없음[無厭], ⑤따라서 환희함[隨喜], ⑥존중함[尊重], ⑦순응함[隨順], ⑧찬탄함[讚歎], ⑨부서지지 않음[不壞], ⑩기뻐함[愛樂]이다.

믿음,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곧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입아비달마론》에서 ‘믿음이라는 구슬을 마음이라는 연못에 두면 마음의 더러움들이 모두 제거되는 것과 같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마음의 정화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정화제가 아니라, 모든 법의 실성을 제대로 꿰뚫고 세간 성현들의 덕을 칭송해 믿으며 세간과 출세간의 재능이나 각종 학문을 닦아 자리리타(自利利他)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맹목적이거나 몰이해적인 성질은 찾아볼 수 없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이며 일체개고(一切皆苦)임을 통찰하고 확신할 때 비로소 믿음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제,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경론에서 말하는 믿음의 대상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잡아함》에서는 불(佛), 법(法), 승(僧), 계(戒), ②《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3보(三寶), 4제(四諦), 인과(因果)의 이치, ③《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眞如), 3보(三寶), ④《입아비달마론》에서는 붓다가 깨달음[菩提]을 증득했다는 것, 붓다의 가르침이 유익한 말씀이라는 것, 승가는 묘행(妙行)을 갖춘다는 것, 연기(緣起)의 법성(法性), ⑤《섭대승론》에서는 자신에게 불성(佛性)이 머무르고 있다는 것, 그것을 증득(證得)할 수 있다는 것, 그것에 무궁한 공덕(功德)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앞의 4가지는 불․법․승을 중심으로 엮을 수 있는 대상들이다. 이러한 3보는 재론의 여지없이 공경하고 믿어야 하는 것이지만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 특히 아상가[無著]는 《섭대승론》을 통해 다른 관점에서 믿어야 할 것을 설명하고 있다. 곧 어떤 특정인만의 독점이 아닌 나 자신에게도 불성이 있음을 믿어야 하고, 또 그 불성을 발현해 각자(覺者)가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하며, 또 그것에는 무궁무진한 공덕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성(聖)은 성으로만, 속(俗)은 속으로만 존속한다는 것을 거부하는 말이다. 속(俗)에서 성(聖)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고, 나아가 그렇게 할 수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믿음과 관련시킨 아상가의 의중을 불교도들은 깊이 헤아릴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자신이 닮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공경과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조될 뿐, 숭배해야 할 우상도 없고 나 아닌 누군가에 의탁해 무언가를 이루고자 함도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믿음, 수행과 밀접한 술어

또한 불교 자체가 종교나 철학적 성격보다 수행지향의 가르침이듯이, 믿음도 수행과 밀접하게 연관된 술어다. 수행함에 있어서 믿음은 그 초입에서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37보리분법 가운데 5근(五根: 信根, 精進根, 念根, 定根, 慧根)이나 5력(五力: 信力, 精進力, 念力, 定力, 慧力)에서 신근과 신력이 가장 앞에 있고, 대승에서 말하는 보살의 52계위에서도 10신(十信: 信心, 念心, 精進心, 定心, 慧心, 戒心, 迴向心, 護法心, 捨心, 願心)을 가장 앞에 배치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信’은 ‘人+言’의 회의글자이다. 人(인)은 본래 하늘에 제사지낼 때 꿇어앉은 사람의 모습이기에 그냥 사람이 아닌 ‘사람다운 사람’을 의미하며, 言(언)에서 口(구)는 ‘성인이 하늘의 뜻을 말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信(신)은 ‘사람다운 사람이 전하는 하늘의 말씀’이 되며, 그러한 말은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부차적으로 ‘믿음’이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본의(本意)가 있는 한자 ‘信(신)’은 불교에서 말하는 ‘śraddhā(믿음)’와 의미상 합치되는가? 그 합치여부는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우리는 ‘śraddhā’를 ‘信’으로, 또 ‘믿음’으로 받아들여 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불교 내에서 말하는 ‘믿음’에는 무언가에 대한 맹목적 지향성도 없고, 타자(他者)에 기대어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김영석/불교저널 기자

※S:산스끄리뜨 / P:빨리어 / T:티벳역어 / E:영역어 / Cs:한자음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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