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저마다 만물의 척도다.” 그리스 소피스트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의 말처럼, 나도 자기중심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늘 체한 듯한 기운이 뭉쳐있어서 개운치가 않았다. 주변의 교양 있고 젊잖아 보이는 분들도 막상 사귀어보면, 안심 속에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와 명예 등 개인의 사회적인 성취도 이런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석학들을 찾아다니며 인문학 고전들을 공부해보았지만, 책과 강의에서 배운 지식 역시 안심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나는 자연스런 결론에 도달했다. 이 문제는 직접 몸으로 부닥쳐서 터득하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구나!
나는 마음공부법을 찾았다. 여러 종교가 있고, 또 여러 마음수행법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효과가 있다고 믿어지는 참선수행을 선택했다. 막상 참선을 배워보고자 했으나, 초보자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정말 막막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이런저런 선지식을 찾아보았고, 여러 시민선방을 전전하였다. 결론적으로, 마음공부는 선지식과의 만남에서 결판난다. 비유하자면 선지식은 의사와 같은데, 그분의 지도 아래 실제로 마음병이 나은 사람이 나왔느냐가 중요하다. 냉혹한 말 같지만, 시민선방을 선택할 때 명성이 아니라 사람 길러낸 실적을 판단기준으로 삼으면 허송세월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시민선방에 열심히 나가 앉았고, 또 선지식의 법문을 많이 들었다. 이렇게 정견을 세우고 선리를 터득하면서 알게 된 것은,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주체인 에고도 강해진다는 사실이었다. 교리에 밝고 선문답을 잘할수록, 아집은 오히려 더 센 사람도 주변에서 더러 보았다. 따라서 나로서는 아상에서 놓여나기 위하여, 하심하고 방하착하는 것을 공부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곧 이것도 무명업식의 귀신굴 속에서 그러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아무리 하심해도 마음속의 찜찜한 기운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나는 어떤 벽에 부닥쳤다. 열심히 해도 안 되고, 안 해도 안 되니 어찌해야 하는가?
이때 내린 결론은 ‘화두에 올인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둘러보니 주변의 시민선방 그 어디도 화두가 실제로 들리는 ‘활구’를 지도해주는 곳은 없었다. 변죽만 울리고, 알아서 화두를 들라고 하지, 어떻게 해야 실제로 화두가 들리는지를 자세히 지도해주는 선지식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십여 년을 마냥 ‘사구’만 들고 앉아있는 선배들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조바심을 낸 것이 아니라, 한국의 간화선 상황을 냉정하게 지켜볼 때 사실이 그러했다. ‘실제로 화두가 들리는 활구참선법’은 모두가 쉬쉬 하고 덮어두는 금기 사항이었다. 하지만 내가 마음공부를 시작한 것은 실제로 안심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 이러저런 지식이나 어떤 타협적인 소속감에 안주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선지식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한동안의 기도 후에 정말 우연히도, 어느 시민선방의 간화선 집중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도해주시는 스님은 처음부터 혹독하게 몰아쳤다. ‘이뭣고’ 화두를 제시했는데, 전통적인 방식으로 준 게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 답을 찾게 만들었다. 지시대로 하니, 문제는 너무나 빤했는데 실제로 답을 찾아보면 이게 오리무중이었다. 소위 말하는 화두 의심이 절로 커져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갈수록 첩첩산중이요, 망망대해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간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천길 구덩이 속에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빠져나올 수가 없으니, 이러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심정이 들 정도였다. 찾고 찾아도 답은 없고, 전후좌우 모든 길은 끊어졌고, 큰칼 차고 감옥에 갇힌 것 마냥 옴짝달싹 못하고 그저 답답한 가운데 한없이 타들어갔다. 급기야 화두조차 사라지고 그냥 갑갑해서 죽을 지경이랄까.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부지불식간에 문득 온몸이 편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선원장 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그저 좋은 인연 맺었다고만 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가랑비에 옷 젖듯이 매사 조심해서 정진하라고 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워낙 무의식적으로 갑작스럽게 경험하여, 의식화하여 스스로 납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어쨌든 그 후로 안심 속에서 매일매일 마음이 열려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선수행을 실감나게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나는 이제 이해한다. 과거에 마음 한구석이 늘 찜찜해있었던 것은 내 마음 안에 무명업식의 먹구름이 짙게 껴있어서 그랬다. 결국 수행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그 핵심 원리는 무명 속으로 뚫고 들어가 마음속 광명의 스위치를 켜는 것이다. 무명의 어둠은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빛만 켜지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간화선은 일단 화두가 들려지기만 하면, 공부인으로 하여금 바로 무명의 한복판에 떨어지게끔 만들어진 장치다. 마음의 원리를 꿰뚫어본 명안종사가 누구라도 마음공부를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시설해 놓은 것이다. 원래 간화선은 프로 수행자가 아닌 일반 사대부들을 위해 개발한 수행법이다. 일단 화두가 들려서 무명 속으로만 들어가면, 어쨌든 거기서 살아 나와야 하기 때문에, 단 기간에 승부가 나게 되어 있다. 참으로 탄복할만한 마음공부 장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고, 죽을 때 귀신이 잡으러 온다는데 어찌 팔짱 끼고 태연히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귀신은 죽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와있다. 누구라도 마음속에 무명의 먹구름이 끼어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속의 청정한 보리자성의 스위치만 찾으면, 순식간에 물통의 밑창이 터지듯 무명이 밝아진다. 마치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들어 용궁의 수정궁을 밝히고 다시 연꽃에 싸여 떠올라 마침내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였듯이, 우리도 이런 과정을 통해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 각자 눈뜨는 게 가장 시급한 일대사다. 내면의 부처를 깨어나게 하는 것 이상의 실질적인 불사는 없다.
앞에서 나는, ‘열심히 해도 안 되고 안 해도 안 될 때 어찌해야 하나?’ 하고 되물은 적이 있다. 이제는 대답할 수 있다. 단도직입으로, ‘마음속의 인당수에 뛰어들라!’고. 어떻게? 화두를 들면 된다. 어떻게 화두를 드나? 화두는 내가 드는 것이 아니다. 눈 밝은 선지식이 공부인으로 하여금 들리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 놓은 장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속에선 반드시 활구가 일어난다. 그런 선지식이 있는가? 필자도 그런 선지식이 없다고 포기했었는데, 뜻밖에도 가장 가까운 곳에 계셨다. 간화선의 장치를 시설해서 쓸 수 있는 선지식의 존재야말로 우리의 보배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조계 문중의 간화선과 인연 맺은 것이 더 없이 고맙다.

김홍근/문학박사·성천문화재단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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