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 근엄한 그림[탱화]들 차지였던 사찰 법당. 이곳에 현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담은 그림이 들어섰다. 한국화가 문봉선(홍익대 교수·사진) 화백이 구랍 7일 경북 칠곡군 팔공산 자락의 묘향사 법당에 ‘신(新)화엄만다라’를 봉안한 것. 테레사 수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선재동자, 노트북을 하는 부처님 등을 담고 있는 불화에 대해, 문 화백은 “만물에 불성이 있음을 형상화 하고자 한 의도.”라고 밝혔다.>

문 화백이 묘향사에 봉안한 불화는 돈황 벽화의 색감과 질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시간의 노도에 함몰된 듯 뭉그러진 채색과 선묘는 보는 이에게 경외감과 신비감을 심어준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하며 달마도를 자주 그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대작 불화의 그린 것은 처음.”이라는 문 화백은 “돈황 벽화를 원형으로 삼아 도상을 연구하고, 옻칠한 한지와 먹 그리고 천연안료를 사용해 묘향산 불화를 그렸다.”고 설명했다.

홍익대학교 동양학과 교수로서 현대적인 감각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는 문봉선(46) 화가. 언뜻 평범해 보이는 사군자지만 중국이나 일본과 다르게 한국 정서에 맞는 ‘우리 사군자’를 그리기로 유명하다. 머릿속에서 상상한 관념적 그림이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직접 보고 관찰한 사실화를 화폭에 옮긴다. 그래서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한국과 일본은 매화도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순이 길게 뻗은 것이 우리 것이다. 또한 난초도 중국과 다르다. 잎이 길쭉하고 예리한 것이 한국적이다.
그는 특히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 중에서 매화와 국화를 그리는 일에 정성을 많이 기울인다. 난초와 대나무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매화와 국화는 짧게 피다 져버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까다롭고 예민하다. 그래서 꽃이 피는 곳을 찾아 떠나는 수고를 마다 않는다. 특히 봄마다 매화를 보기 위해 전남 순천과 광양을 방문하고, 국화를 살피기 위해 영종도에 들르는 일을 게으르지 않게 실천한다. 수없이 반복한 사생연습의 결과로 문봉선 화가는 섬진강 그림에 이어 ‘문봉선표 매란국죽’을 그리는 대가가 되었다.
1961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문봉선 화가는 1984년 홍익대학교 동양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도시 풍경을 통해 현대적인 수묵풍경화를 그리다가 1987년 ‘자전거’와 ‘지하철역 중장비’를 그려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과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받았다. 그 후 산을 그리기 시작해 북한산과 설악산, 금강산을 화선지에 담아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맥을 이었다는 화단의 평을 받았다.
이어 한층 확대된 소재와 정감으로 ‘물’과 ‘바람’을 그리는 작업을 시도했으며, 고향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닷바람 부는 들판 풍경이나 해질녘 산책길에 만나게 되는 전경을 주로 그렸다. 그의 그림 ‘유수(流水)연작’에서는 먹의 농담으로 유연히 흘러가는 강물을 담아냈고, ‘해풍(海風)연작’에서는 거친 갈필로 바닷바람에 시달리는 소나무를 그렸다.
문봉선 화가의 그림 작업 방식은 기존 사군자의 정통 기법에서 더 나아가 작가만의 독창성을 가미한다. 닥지 위에 매화꽃을 그리는 방법은 문봉선 화가만의 독특한 기법이다. 그러나 난초는 사생한 난을 바탕으로 하고, 국화는 잎 부분을 농담으로 처리한다. 또한 꽃 부분은 담채로 표현하는 등 정통 기법 또한 섬세하게 사용한다.
그는 독일로 가는 한국화의 새 흐름전(1988), 한중 현대수묵전(1988), 동방의 빛전(1989), 현대한국회화전(1992), 화랑미술제(1990)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가했고 2001년에는 선미술상을 수상했다. 서울시립미술관, 호암미술관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문봉선 화가는 “30년간 사군자를 공부하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해 온 것은 15년 정도다. 생생한 작업 스케치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화첩에 남긴 그림이 내 키 분량정도 된다”며 “사군자는 우리 한국인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소재다. 결코 어려운 소재나 주제가 아니다. 그림을 통해 일상 속에 매화 향이 느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문봉선 화가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수묵화를 접했다. 서예를 잘 한다는 얘기를 듣고 자라며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제주도 촌놈이 출세한 거다(웃음). 중학교 시절 미술선생님이 일본인 부친에게 받은 <사군자_산전옥운(山田玉雲) 지음> 책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수묵화 한 번 해 보지 않을래’라고 권했다. 그때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70년대 일본 경제는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그 책은 고급 판이었다. 나는 그 책을 보면서 독학으로 사군자의 기본을 터득했다”고 동양화에 얽힌 인연을 술회한다.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한국판 사군자 서적인 <계자원화전>을 구입해서 더욱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신동아에서 신간서적이 실린 기사를 보고 책을 사기로 결심한 그는 방학을 이용해 제주도에서 서울로 과외 하러 가는 친구에게 구입을 요청했다. 한 달이 지난 뒤에 그 책을 받았을 때 두껍고 큰 번역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보면서 독학하고, 이런저런 수묵화의 기법과 훌륭한 작품을 접하면서 찬사를 금치 못한 그다.
그러한 그는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묵의 속성’에 동양화의 매력을 느낀다. 한지 위에 선을 긋는 묵은 원래 탄소로 만들어졌는데 갈수록 더욱 까매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보통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지거나 퇴색하는 것이 일반인데 묵만큼은 변치 않는 흑색을 유지한다. 회화의 많은 작품이 아무리 관리를 잘 해도 색깔이 변하는 반면 묵으로 그린 작품은 그대로 색을 유지한다.
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수묵화는 5천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과 닮아 있다. 그래서인지 누구나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고, 한 번 수묵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점점 빠져들어 그만 둘 수 없다.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수묵화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수묵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잠재력을 보유한 채 오래토록 생명력을 유지한다.
문봉선 화가는 당시 소암 현중암 선생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서예도 배웠다.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는 이름이 꽤나 알려진 유명한 서예가다. 환갑의 나이에 백발성성한 모습은 신선 같고, 그 용모가 오히려 서예의 대가다운 면모를 느끼게 했다.
특히 현중암 선생은 바른 자세로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서 글씨를 쓰라고 교육했는데, 일본식 방법으로 도를 가르친 것이다. 현 선생은 글씨 쓰기에 앞서 먼저 자세를 갖추기를 요구했다. 또한 글씨 쓴 뒤에는 붓을 깨끗이 빨고, 연습장으로 쓰는 신문지일지라도 반듯하게 접어 두도록 교육했다. 바른 자세로 글씨를 쓰는 법을 통해 예인으로서 기본자세를 익히게 한 것이다.
조소, 판화, 수채화, 서양화, 유화 등 다른 미술 분야를 모두 섭렵한 문봉선 화가는 수묵화에 남다른 매력을 느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은 대학에 들어와서 더 많은 공부를 하는데, 문봉선 화가는 대학교에서 공부할 내용을 이미 고등학교 때 스스로 터득하고 왔기에 경쟁상대가 없었다. 그러나 더욱 수묵화에 뜻을 굳히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때 우연한 깨달음을 통해서다.
그는 110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큰 강의실에서 조소를 배우고 난 후 중간고사로 조소작품을 평가받았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에 문득 작품을 바라보니 흙 색깔이 모두 다른 것을 발견했다. 그때 비로소 먹색도 그렇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검다고 해서 다 같이 검은 것이 아니라 먹색도 사람의 기와 호흡에 따라 검푸르게, 검붉게, 희검게, 짙검게 달라지겠구나’ 하는 느낌이 그를 스쳐지나갔다. 그때부터 동양화에 더욱 매력을 느끼고 다른 미술 영역에서 배운 터치 법을 적용해 보았다. 그러한 문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대담하게 접근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조소의 경우 사람의 대략적인 얼굴의 윤곽을 먼저 잡고 그 다음에 자세한 부분을 표현하는데, 처음부터 완성된 작품을 염두에 두고 뼈대를 세우며 세밀한 부분을 터치해 들어간다.
또한 매화를 그릴 때는 계획적으로 채색의 정도를 다르게 해서 그리지 않고, 특별한 채색의 법칙 없이 자연스럽게 농담(濃淡) 효과를 자아낸다. 또한 흐리고 진하게 손의 강약을 써서 매화꽃이 자연스럽게 피어나도록 한다. 여백의 미를 살릴 때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비법보다는 사물을 자연스럽게 흑백으로 분할해 본다. 그것이 화선지 위에 그대로 표현되도록 한다.
처음 사물을 대할 때 수묵화 기법의 흑백 현상으로 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색채가 하얗고 검은 부분이 보이는 것, 카메라가 사물을 렌즈에 담을 때 모든 색깔을 담듯이 사물을 볼 때 하얀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나뉘어 보인다는 것을 인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잘 그리는 비법이 있는 게 아니라 화면을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놓을 것인가 생각하면서 직관이 발달하게 됐다.
문봉선 화가는 여러 가지로 중국과 인연이 깊다. 인천대학교에서 연수를 보내주는 기회가 생겨서 중국에 다녀왔다. 그는 중국연수를 위하여 아침반 중국어회화반을 6~7개월 다니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1985년 대학원 논문을 집필 당시, 중국에서는 양주팔괘 중 한 사람으로 사군자의 대가 정판교라는 화가가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1993년에 중국의 항주에 유학 중인 문봉선 화가의 제자와 만나 양주를 가는 도중 남경에서 하룻밤 묵을 때 중국의 가난한 유학생들이 목판을 배우러 남경에 공부하러 왔다는 말을 듣고 호텔에 가서 밥을 사주었다. 태어나서 호텔에 처음 가 볼 정도로 가난한 학생들이었는데, 그 중 표인부 학생이 양주에서 유명한 미술사학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고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학생의 소개로 그 집에 찾아갔고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미술사학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은퇴한 의사 출신의 부인과 검소하고 오붓하게 살고 있었는데 선뜻 집에 가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처음 만난 사람을 집으로 초대해 밥을 주는 것은 중국 사람의 정서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고마운 마음에 한국에 돌아와서 편지를 썼고 연이어 답장을 받은 게 인연이 돼서 그 후로 계속 연락을 했다.
중국에 가서 다시 상봉했고 편지로 소개서를 써 주어서 남경에 가서 유학할 것을 권했다. 남경의 유학생 담당 교수와 나눴던 문봉선 화가의 필답을 들고 있던 교수는 흔쾌히 제자로 받아주었다. 그때 유학생으로 받아 준 사람이 85년도 논문 양주팔괘의 한 사람인 정판교 화가였다. 그는 전 세계 화교들이 남경에 모여서 학술과 예술을 교류하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중국이 대국임을 실감했다.
또한 양주시에 있는 화가들은 필회(筆會)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교류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문봉선 화가는 그때는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가서 학문과 예술에 대한 갈증을 채우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어느 날 지도교수 앞에서 대나무를 그리게 되었는데 중국의 대나무와 다른 붓 선의 섬세함과 농담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리고는 그가 그린 모란꽃을 그려 달라며 줄을 서는 바람에 중국 화가들에게 그림을 주기 위해 새벽 2시까지 어깨가 빠질 정도로 그림을 그리며 환담을 즐겼다.
그는 산에 올라가서 그림을 그리고 한가롭게 자연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한다. 요즘 들어 조깅하는 취미를 붙여서 즐겁게 아침을 맞고 있다. “체력이 필력이다. 마음과 정신이 건강함은 물론 몸이 건강해야 건강한 수묵화를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바쁜 일상 속에 자연을 둘러보지 못하다가 불현듯 핀 꽃을 보고 새삼 자연을 발견하듯 내 그림을 통해 일상 속에서 자연과 만나게 해 주고 싶다.”
그런 문봉선 화가의 30대에 그린 그림은 힘찬 기백이 살아있다. 중국 유학 시절에는 밥만 먹으면 그림을 그렸다는 그다.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시야를 넓히고 안정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그 나름대로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는 “중국 유학을 다녀와서 그림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한강을 보다가 중국의 양자강을 보면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깊고 넓고 크게 느껴졌다. 그만큼 내 마음의 폭도 넓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중국인이 아니다. 한국인이기에 한국의 정서가 깃든 수묵화를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나만의 사군자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 노력했다”고 마음을 내보인다.
“중국의 장계산을 처음 보았을 때 웅장하고 멋진 산의 위용에 놀랐다. 그러나 막상 장계산을 그려 놓고 보니 그저 그랬다. 미인 그림이 잘 그렸다는 평가를 받기 힘든 이치와 같다. 워낙 사물 자체가 미인이기에 그림이 아무리 훌륭하게 그려도 본전을 찾기 어렵다. 조금 부족한 사물에 혼을 넣어 생명력 있는 모습으로 완성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깨닫게 됐다.”
그렇게 독자적인 동양화의 세계를 추구한 문봉선 화가는 현재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림이 안 될 땐 서예를 공부한다. 그림에 서예를 응용해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연구를 자꾸 거듭하며 수묵화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그림의 발전을 위해 다른 분야의 공부도 필요하다 생각하여 늘 연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또한 대한민국 최고의 미술대인 홍익대에서 교수로 살아가는 그는 그저 몸소 실천하며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학생들에게 산 가르침이 되리라고 기대한다.
"불교와 다소 거리감을 느끼는 젊은층과 현대인들이 새로운 개념의 탱화를 보면서 종교의 참 의미를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팔공산 자락인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위치한 불교사찰 묘향사는 최근 대웅전 석가모니 부처 뒷벽에 165개의 '신세대' 부처님 탱화 165점을 봉안했다고 8일 밝혔다.
사찰 측은 2년 전 한국화가 문봉선 화백(홍익대 교수)에게 탱화 제작을 의뢰해 이번에 결실을 봤다.
그런데 이번에 봉안된 탱화들은 기존의 엄숙하고 점잖은 전통탱화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비스듬히 드러누운채 노트북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부처가 있는가 하면 학사모와 검은 가운을 입고 공부하는 부처, 산타클로스 모자를 쓴 부처, 술병을 든 부처, 의사가운 차림 등 현대적인 차림과 행동을 하고 있다.
한편에는 테레사 수녀의 초상이 눈에 띄고 '화엄경' 경전에 나오는 진리의 구도자 선재동자는 소 대신 인라인스케이트나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다.
묘향사 주지 혜민 스님은 "현대인들이 불교의 여러 장점에 대해 알면서도 선뜻 사찰을 찾지않아 이들을 이끌어 내는 한 방법으로 불교의 현대화를 계획했다"고 말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편안하게 자기 마음을 부처님 마음과 나누고 공감하게 하고 싶었다"며 "예를 들어 술병 든 부처님은 술먹지 않고는 시대 중심을 지나기 어려운 현대사회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는 2년 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문 화백의 작품을 본 뒤 탱화를 우리 시대에 맞는 새로운 형식의 탱화를 그려 달라고 의뢰했고 이후 수십차례 탱화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혜민 스님은 "이번에 모신 부처님들은 다양한 모델로 불교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며 "사람들이 탱화를 통해 좀더 마음을 열고 스트레스를 위로받기 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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