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다라>를 보고 밖으로 나왔을 때 날은 어둑어둑하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오후 서너 시밖에 안됐지만 두껍고 낮게 내려앉은 회색 구름 때문에 저녁이 다 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내 마음도 하늘을 덮고 있는 짙고 무거운 구름처럼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에 사로잡혔던 이유는 영화 때문이었습니다. 좀 전에 봤던 영화 <만다라>의 주인공에게 완전히 감정이입이 돼 너무나 강렬한 절망감과 슬픔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그날의 그 강렬했던 느낌 때문에 20여년이 지난 영화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다라>는 참 어두운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지탱하는 또 다른 주인공인 지산스님(전무송 분)의 처지가 신산하고 또 그가 느끼는 감정이 어두워서, 그리고 마지막 자살을 통해 마감하는 그의 삶이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보는 내내 안타깝고 괴로운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법운스님(안성기 분)이라는 여법하게 수행을 잘하는 수좌가 지산이라는 파계승을 통해 삶의 이면을 경험하면서 깨달음을 얻고, 그래서 마침내 자신의 삶의 자양분으로 삶는 게 기본 골격입니다.

대승불교의 두 축인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에서 지금까지 법운은 ‘상구보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산을 통해 ‘하화중생’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방에서 깨달음을 찾던 승려가 세속의 나락에 떨어져서 추악한 현실에서 오히려 깨달음을 체험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영화의 시작은 법운 수좌가 안거를 끝내고 만행 길에 올랐다가 버스에서 지산스님을 만나면서 시작합니다. 당시는 군부정권 때라 버스에서 불심검문을 받게 됩니다. 승려증도 주민등록증도 없는 지산스님은 검문소에 끌려가게 되고 같은 승려로서 일종의 책임감을 느낀 법운이 그를 변호해주러 따라가면서 인연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지산과의 만남에서 법운은 묘한 끌림을 느낍니다.

줄담배를 피우고, 사찰이고 법당이고 가리지 않고 술을 퍼마시는 등 일찌감치 계율 같은 건 지킬 생각도 안하는 지산이지만 그에게서 법운은 순수한 절망을 봅니다. 적당하게 계를 지키고 적당하게 살아가는 다른 승려에게서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극한의 절망입니다. 지산의 순수한 고통이 법운에게 묘한 매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법운은 모두들 “땡초‘라고 비웃는 지산과 어울려 다니면서 그의 내력을 듣게 됩니다.




지산은 원래 올곧은 수행자였습니다. 고시공부를 하다가 불교에 심취해서 홀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산으로 들어온 지산은 정말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결재가 끝나고 모두를 만행을 떠났을 때도 그는 수행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심층의식에 자리 잡은 욕망은 수행이 깊어질수록 더 강렬해졌고, 결국 그는 이 치열한 싸움에서 욕망에게 백기를 들게 됩니다.

지산이 머물던 사찰에 요양하러 왔던 여대생과의 사이에 염문이 생겨나고,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는 승적을 박탈당합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원효대사는 요석공주와의 하룻밤에서 설총이라는 아들까지 얻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 하심하고 수행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고승이 되었는데 지산은 이런 큰 스님의 그릇이 못됐던 것입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처럼 고승대덕의 씨도 따로 있다는 자조 섞인 말을 하면서 지산은 자신을 더욱 학대하였습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여자를 탐하고,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이렇게 막 살면서도 지산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는 심한 고통을 느끼며 자신의 나약함을 혐오했습니다. 그의 이상은 언제나 더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큰 삶일수록 고통이 따르게 되는 것이지요. 적당하게 속물적인 자신에게 별 불만이 없다면 그냥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지만 순수한 지산은 자신의 타락을 조금도 용서하지 못했고, 허무와 고독을 십자가처럼 지고 사는 존재였습니다.




지산은 이런 자신의 처지를 인간의 한계로 여겼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런 극단의 허무와 고통에서 결코 헤어날 능력이 못 된다고 본 것이지요. 깨달음을 얻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부처님과 같은 선택받은 소수에 해당하고 이는 헛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극을 끝낼 방법은 자살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어느 눈 오는 날 들판에서 현생과 작별했습니다.

지산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제 지산의 고통은 끝났을까, 하는 의문요. 그러나 불교의 윤회관에 입각해서 보면 현생은 미래세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숙제는 다음 생으로 미뤄진 것이니 그는 다시 그 고통과 비극이라는 숙제를 안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지산은 그렇게 쉽게 죽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자신이 천형으로 부여받은 고통과 허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한편 지산의 시신을 데려와 다비식을 치러준 법운은 어머니를 만날 결심을 합니다. 법운의 어머니는 어린 법운을 버리고 재가를 한 여인입니다. 그래서 법운의 가슴 한 쪽에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그리움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산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법운은 어떤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엄마에 대한 증오와 그리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의 존재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고통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의미합니다.




법운은 왜 심경의 변화를 경험하게 됐을까요? 아마도 지산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사는 것은 다 고통이고, 그 누구의 삶도 예외가 없다는 보편적 진리를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통찰은 오랜 시간 생채기로 남아있던 엄마에 대한 감정까지 녹여냈던 것 같습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홀로 고고한 학처럼 선방을 지킬 때는 극복하지 못했던 감정을 오히려 질펀한 인생사 속에서 극복해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상구보리’ 보다는 ‘하화중생’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법운스님이 길고 먼 만행 길에 오르면서 끝납니다. 삶은 여전히 고달프고 깨달음은 요원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면서 슬프고 무거웠던 영화는 막을 내렸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75번째 작품인 <만다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그간 많은 영화를 찍었지만 임 감독은 <만다라>를 통해 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게 됐으며, 이 작품을 시작으로 영화의 예술성에 눈 뜨기 시작했으니 이 영화는 임 감독에게는 특별한 영화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임 권택 감독 특별전을 개최할 때 <만다라>가 오프닝을 장식했던 것입니다.

또한 <만다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불교영화입니다. 실재 승려였던 작가 김성동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작가의 특별한 경험이 녹아있어 그 어떤 불교영화 보다도 진정성과 함께 구도의 열정을 엿볼 수 있기에 최고의 불교영화인 것입니다. 그래서 <만다라>는 외국에서도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수작으로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 김은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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