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를 요구하기 위해 조선에 온 명 사신 황엄은 태상왕 태조가 왕실 주요 사찰인 천보산 회암사에 자주 머무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가 며칠 간 머물렀다. 사진은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진.
사리를 요구하기 위해 조선에 온 명 사신 황엄은 태상왕 태조가 왕실 주요 사찰인 천보산 회암사에 자주 머무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가 며칠 간 머물렀다. 사진은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진.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모든 몽골 풍속을 금지하고 당·송 시대의 중화 전통과 관습을 부활시켰다. 성리학 규범을 규율로 정해 국시로 삼는 한편, 각지에 서원을 세우는 정책을 펼쳤다. 그렇게 성리학적 토대를 세우면서도 불교에 대해서는 배척하지 않았다. 10대 시절 승려 생활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조가 이어지면서 주원장 사후 명나라는 조선에 불교와 관련된 것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태종 때 사리를 요구한 일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태종 7년(1407) 5월 14일 중국에서 사리를 요구하는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신하를 전국에 보내서 사리를 구하게 하였다. 이때 충청도에는 사재소감(司宰少監) 한유문(韓有紋), 경상도에는 전 좌랑(佐郞) 하지혼(河之混), 전라도에는 전 정언(正言) 김위민(金爲民), 강원도에는 종부부령(宗簿副令) 이당(李堂)을 보냈다. 이에 한유문은 45매를 구하고, 하지혼은 164매를 구하고, 김위민은 155매를 구하고, 그리고 이당은 90매를 구해서 돌아왔다.

5월 18일 사신 황엄(黃儼)과 기원(奇原)이 칙서를 받들고 왔다. 칙서에 이르기를, “들으니 왕의 아버지가 전에 사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천보산(天寶山) 등에 있다고 하므로 지금 황엄 등을 시켜 그것을 맞아오게 하는 바이니, 하나하나 보내 줄 수 있겠는가? 아울러 채단(綵段)을 왕과 왕비에게 보내니 사신들이 도착하거든 받기 바란다. 왕과 왕비에게 각각 채단 30필을 준다.” 하였다.

임금이 칙사(勅賜)를 받은 뒤 황엄이 중궁(中宮)에 들어가서 친히 왕비에게 주고 나왔다. 황엄 등이 또 칙서를 가지고 덕수궁(德壽宮)에 갔으나 태상왕(太上王)이 병이 있어 출영(出迎)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황엄이 말하기를, “황제께서 주시는 것은 전내(殿內)에서 받을 수 없으니 마땅히 백 보밖에 출영(出迎)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전문(殿門) 밖 백 보쯤 나와서 명령을 맞았다. 황엄 등이 태평관(太平館)으로 돌아가니, 임금이 그곳에 가서 잔치를 베풀었다.

5월 20일 태상왕이 황엄과 기원을 청하여 덕수궁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태상왕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던 사리 303매를 황엄에게 주었다. 황엄이 매우 기뻐하여 머리를 조아려 받고, 단자(段子) 2필과 마른 오매(烏梅)·야표(椰瓢) 등 두어 종류를 드렸다.

황엄은 조선의 내정에도 밝았다. 태상왕이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 많이 머물고, 왕실의 주요 사찰인 것을 알고 그곳에 가보고자 하였다. 5월 24일 그가 회암사에 가면서 경기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반승(飯僧)을 준비하게 하였다. 회암사에서 며칠을 지낸 황엄은 29일 도성으로 돌아왔다.

중국의 사신이 머무는 동안 임금은 자주 잔치를 베풀었다. 6월 1일 태종은 광연루(廣延樓)에서 황엄과 기원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지켜보는 정승과 대신들은 임금의 처사가 못마땅하였다. 그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고 형조 판서 김희선(金希善), 사헌부 대사헌 성석인(成石因), 사간원 우사간 대부(司諫院右司諫大夫) 오승(吳陞) 등이 상소하였다.

“사신 황엄이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전하께서 사대(事大)하는 정성은 지극하나, 대신이 봉행함이 조심스럽지 못하다.’ 하니, 이 말이 반드시 황제께 들릴 것입니다. 황제의 마음속에 우리나라가 임금의 명령이 행해지지 않고 권세가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황엄의 말을 캐어 보면 비록 탐구(貪求)하는 데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전하께서 사대하는 데 마음을 다하실 때 황엄 등이 이런 말을 하였으니, 이것 또한 작은 일은 아닙니다. 하윤이 재상이 되어서 어떻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근년 이래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서로 겹치고, 재변이 여러 번 나타났으니, 한나라 고사(故事)로는 삼공(三公)을 마땅히 파면해야 합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재가하여 시행하소서.”

임금은 중국 사신 황엄과 친분이 있던 대신들에게 별도의 잔치를 베풀도록 하였다. 6월 2일 여성군(驪城君) 민무질(閔無疾)에게 명하여 그 집에서 황엄과 기원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민무질은 일찍이 중국에 갈 때 황엄과 함께 갔었기 때문에 그가 오자 특별히 청하여 위로하고 많은 노비(路費)를 주었다.

황엄은 태종의 즉위 때도 고명(誥命)을 받들고 온 사신이었다. 자주 오다 보니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생겨났다. 사리를 가지러 왔을 때 세자와 중국 황녀와의 혼인 문제가 다시 거론되어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처음 황엄이 고명을 받들고 왔을 때 대신들은, “황엄은 총애 받는 환관이니 그를 통하여 황제에게 청해서 세자와 황제의 딸이 혼인하면 우리나라의 다행입니다.” 하였다. 이를 태종도 좋게 여기었다. 이를 황엄에게 전하니 그도 “얼마나 좋은 일인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였다. 그런데 황엄이 다시 조선에 왔을 때 한마디 말도 비치지 않았다. 임금이 후회하고 김한로(金漢老)의 집과 정혼(定婚)하였다.

황엄이 사리를 요구하러 왔을 때 태종은 이현(李玄)을 시켜 자신이 중국에 조회(朝會)하고자 하나 감히 국사를 버리고 갈 수 없으므로 장성한 세자를 보내고 싶다고 하였다. 이 말에 황엄도 좋다고 응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공부(孔俯)가 이현에게 말하기를, “세자가 장차 조현(朝見)하려 하는데, 만일 먼저 길례(吉禮)를 행하면 모든 것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 황제의 딸로서 아직 출가하지 않은 자가 두셋이나 되니, 만일 제실(帝室)과 연혼(連婚)하게 되면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을 내었다.

이 일로 대신 간에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을 듣게 된 태종은 크게 화를 내며 이조 판서 남재(南在)에게 판순금사사(判巡禁司事) 이숙번(李叔蕃), 형조 판서 김희선, 대사헌 성석인, 좌사간(左司諫) 최함(崔咸) 등과 함께 이 논의를 주도한 인물들을 심문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치죄에 관여된 인물은 대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조박(趙璞),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정구(鄭矩),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이현, 평강군(平江君) 조희민(趙希閔), 검교 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 공부, 형조 참의 안노생(安魯生) 등이었다.

세자와 중국 황녀와 정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중국을 대하는 조선 고위층 대신들의 인식을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5월 18일 한양에 도착한 황엄은 6월 6일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하였다. 이때 가지고 간 사리는 모두 800개에 이른다. 이들이 돌아갈 때 태종이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 “삼가 신의 아비가 옛날에 간직하고 있던 사리 300과(顆)와 신이 간직하고 있던 100과, 그리고 현재 관원을 보내어 전국 여러 산에 있는 각 절을 두루 돌아다니게 하여 가져온 사리 400과, 모두 800과의 사리를 도금한 은합(銀盒)과 내옥합(內玉盒)을 갖추고 밖은 은으로 싼 소함(小函)을 써서 담고, 소금황라복(銷金黃羅袱)와 채단(綵段)으로 만든 수놓은 겹보(裌袱)로 싸서 배신(陪臣) 이귀령(李貴齡)에게 받들고 가게 하였으며, 흠차관(欽差官)과 함께 가서 봉진(奉進)케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황엄 등을 반송정(盤松亭)에서 전송하였다. 황엄이 요구한 강아지〔狗子〕와 석등잔(石燈盞) 몇 개를 주었다. 황엄이 취기가 오르자 임금께 고하기를, “세자께서 비록 장성하지 못하셨으나, 덕이 있는 늙은 정승으로 하여금 좌우에서 보익(輔翼)하게 하고 입조하면 후히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답하기를, “만일 다른 연고가 없다면 어찌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소?” 하였다.

잔치를 끝내고 임금이 황엄에게 이르기를, “내가 조그마한 공도 없는데 여러 번 특별히 물건을 내려 주셨으니, 감동하는 마음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소. 대인께서 나의 마음을 아시니, 내 어찌 감히 말이 있겠소?” 하였다.

황엄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은 황제에게 모든 사실을 아뢰어 전달하지 못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돌아가면 황제를 면대하여 전하의 정성을 하나하나 남김없이 전달하겠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예조 판서 이문화(李文和)로 접반사(接伴使)를 삼았다. 그런데 황엄의 성품이 본래 무상하므로 이문화가 오래 접대하기를 꺼렸다. 임금이 이를 알고 이문화를 대신하여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이간(李衎)으로 반송사(伴送使)를 삼았다.

황엄이 작별할 때 임하여 이문화와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간(李衎)이 나이 젊고 일을 경험하지 못하였으나 천자의 사신을 따라가게 한 것은 예를 배우게 하려는 것이오.” 하였다. 황엄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두 재상과 함께 가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할 수 없이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이귀령(李龜齡),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 이지실(李之實)로 하여금 명나라 수도에 가도록 하였다.

6일 사리를 가지고 한양을 떠난 황엄은 16일에 개성(開城) 광리사(廣利寺)를 지나다가 금동으로 된 각수관음(各手觀音)을 가지고 갔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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