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황제가 사신을 보내 요구한 원나라 때 불상이 봉안돼 있던 제주 법화사지 전경. 법화사는 제주 3대 사찰 중 하나였으나 18세기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도 내 사찰을 폐사시킬 때 완전히 불탔다. 지금 건물은 198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명 황제가 사신을 보내 요구한 원나라 때 불상이 봉안돼 있던 제주 법화사지 전경. 법화사는 제주 3대 사찰 중 하나였으나 18세기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도 내 사찰을 폐사시킬 때 완전히 불탔다. 지금 건물은 198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시대 중국 사신의 과도한 요구로 왕실이 불편할 때가 많았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으로 빈번하게 온 자가 황엄(黃儼)이다. 태종 3년 4월 8일 명나라 황제의 고명·인장·칙서를 가지고 온 사신이었으니 조선 왕조로서는 귀한 손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치에 있음을 알고 황엄은 중국 황실의 요구와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조선 왕실을 번거롭게 하였다. 4월 10일 황엄을 비롯한 중국 사신을 위해 임금이 태평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황엄(黃儼) 등의 행동거지가 무례하므로, 임금이 뜻에 맞지 아니하여 잔치를 재촉해 파할 정도였다.

그런 중국 사신 황엄이 태종을 불편하게 한 일이 있었다. 태종 6년 4월 19일 제주도에 있는 불상을 가져가기 위해 명나라 내사(內使) 황엄·양영(楊寧)·한첩목아(韓帖木兒)·상보사상보(尙寶司尙寶)․기원(奇原) 등이 조선에 왔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반송정(盤松亭)에 나가 백희(百戲)를 베푼 후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그가 가지고 온 칙서는 탐라(耽羅)에 가서 동불상(銅佛像) 몇 좌를 구하려고 하니 잘 성사시켜 짐의 뜻에 부응하라는 내용이었다.

4월 20일 임금이 태평관에 가서 연회를 베풀었다. 황엄이 술에 취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한첩목아가 말하였다. “제주 법화사(法華寺)의 미타삼존(彌陀三尊)은 원나라 때 양공(良工)이 만든 것입니다. 저희들이 가서 가져오는 것이 마땅합니다.”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정말 마땅하고 말고. 다만 부처의 귀에 물이 들어갈까 두렵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한첩목아 등이 모두 크게 웃었다.

이때 다른 신하가 말하기를, “황엄 등이 친히 제주에 가서 동불상을 가져오려 하는 것은 황제가 탐라의 형세를 엿보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였다. 그 말에 임금이 걱정하여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였다. 그리고 급히 선차(宣差) 김도생(金道生)과 사직(司直) 박모(朴模)를 급히 제주로 보내어 법화사의 동불상을 가져오게 하였다. 만약 불상이 먼저 나주에 이르면 황엄 등이 제주에 들어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4월 25일 황엄 등이 전라도에 가고 기원이 홀로 머물렀다.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석명(朴錫命)을 전라도제주도체찰사(全羅道濟州都體察使)로 삼아 동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지신사 황희(黃喜)에게 명하여 의정부와 더불어 한강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그런데 황엄이 새벽에 일어나서 급히 말을 몰아 출발하였다. 황희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황엄이 일찍 출발한 것은 임금이 직접 전송하지 않은 것을 노여워한 것이었다.

제주에서 돌아오는 길도 순탄하지 않았다. 5월 9일 황엄이 남원에 이르러 승련사(勝蓮寺)에 유람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왼쪽 팔을 다쳤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신극례(辛克禮)에게 궁온(宮醞)을 가지고 가서 병을 위문하게 하였다. 이어 5월 12일에는 우대언(右代言) 윤사수(尹思修), 검교 한성윤(檢校漢城尹), 양홍달(楊弘達)에게 약이(藥餌)와 궁온을 가지고 병을 위문하게 하였다.

5월 25일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광(李匡)을 전라도로 보냈다. 이때 예조 판서 이문화(李文和)가 아뢰기를, “전자에 서역의 한 승려가 명나라 서울에 이르렀는데, 황제가 생불이라고 하여 천관(千官)을 거느리고 관대(冠帶)를 하고 교외까지 마중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흠차관(欽差官) 등이 탐라의 동불상을 받들고 서울로 들어오는 날 전하도 또한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朝服)을 갖추고 교외까지 마중하여 천자를 위해 존경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대언 윤사수(尹思修)가 말하기를, “어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이 생각하건대 전하가 흠차관(欽差官)을 도성문 밖까지 마중하는 것은 가하나 만약 동불상을 맞이하기 위해서라면 불가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황제가 부모를 뵈러 오는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우연히 부처를 구하게 하는 것도 이미 도리가 아닌데, 하물며 전사(專使)를 보내어 칙서(勅書)를 가지고 이를 구하는 것이겠는가! 이는 진실로 부처에게 아부하는 짓이다.” 하였다.

예조 판서 이문화가 다시 말하기를, “전하가 짐짓 이 부처를 높이는 체하며 사람을 보내어 치향(致香)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윤사수가 말하기를, “저 황태감(黃太監)이 진실로 전하가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아니 비록 치향하지 아니하더라도 가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도리에 해로울 것이 없다.” 하며 판내시부사 이광(李匡)과 함께 향(香)을 보냈다.

7월 16일 황엄·한첩목아·양영·기원이 나주에서 돌아왔다. 황엄 등이 용구현(龍駒縣)으로 돌아올 때 이조 판서 이직(李稷)을 보내어 임금이 몸이 불편하여 출영하지 못한 연고를 알렸다. 이때 황엄이 바라보고 정승이 나오는 것으로 여겼으나 이조 판서 이직인 것을 알고서 안색이 좋지 아니하였다. 이직이 이것을 알고 핑계하여 말하였다. “오늘 두 정승은 모두 집안에 제사가 있어 오지 못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와서 맞이할 것입니다.”

이런 정황을 지켜본 이문화가 사람을 시켜 아뢰기를, “황엄이 전하께서 교외에 나와 맞이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심히 좋지 않은 빛을 띠었습니다. 또 황엄 등은 전하께서 동불상을 맞이할 때 오배 삼고두(五拜三叩頭)를 했으면 합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황엄이 나를 욕보임이 어찌 여기에 이르는가? 황엄은 탐욕이 많고 간험(姦險)하며, 또 황제의 명을 받아 불상을 수송한다는 명분에 치우쳐 사람을 때려 죽였으니 그 죄 또한 중하다. 내 이를 천자에게 상주(上奏)하고자 한다.”

대언(代言)들이 모두 말하였다. “황엄이 탐욕이 많고 간휼함은 천하에서 다 아는 바입니다. 그가 우리나라에 온 것은 고명(誥命)을 받들고 온 것이니 은의(恩義)가 또한 많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격노(激怒)하신다면 오히려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임금의 노기가 조금 풀려서, 의정부와 육조(六曹)로 하여금 친히 동불상에 대해 절할 것인지 가부(可否)를 의논하게 하였다. 지신사 황희를 보내어 양재역(良才驛)에서 맞이하도록 하고 자신은 병 때문에 나오지 못한다고 알리게 하였다. 정승 하윤(河崙)·조영무(趙英茂)에게 명하여 한강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그리고 백관에게 숭례문(崇禮門) 밖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황엄 등이 태평관에 이르자 백관이 예를 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황엄은 임금이 직접 나오지 아니한 데 노하여 말하기를, “지금 전하를 뵙지 못하였으니 예를 받을 수 없소.” 하였다.

정부에서 하마연(下馬宴)을 베풀고자 하여도 받지 아니하였다. 황엄 등은 동불상 3좌(座)를 이운하여 왔는데 감실〔龕〕 15개를 사용하여 불상(佛像)·화광(火光)·연대(蓮臺)·좌구(坐具)를 나누어 담았다. 또 모란(牧丹)·작약(芍藥)·황규(黃葵) 등의 특수한 꽃을 감실〔龕〕에다 흙을 담아 심고 궤(樻)를 만들었는데 판자(板子) 1000장〔葉〕, 철(鐵) 600근, 마(麻) 700근을 사용하였다. 그 불상과 화광의 감(龕)이 셋인데 높이와 너비가 각각 7척쯤이며, 안에는 막이로 백지(白紙) 2만 8000장과 면화(緜花) 200근을 사용하였다. 짐꾼이 수천 명이 넘었는데 매양 관사(館舍)에 이를 적마다 옛 청사는 좁고 더럽다 하여 새 청사를 관사 왼쪽에 따로 짓게 하였다. 지나는 곳마다 물자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조금이라도 여의치 못하면 문득 매질하여 수령을 욕보였다.

전라도 관찰사 박은(朴訔)은 매사에 재량으로 물자의 수요를 줄였으나, 충청도 관찰사 성석인(成石因)은 한결같이 황엄의 뜻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황엄이 박은에게는 화를 내고 성석인은 좋아하였다. 그러나 돌아와서 임금에게 말하기를, “감사(監司)로서 전하를 저버리지 아니한 사람은 오직 박은뿐이었습니다.” 하였다. 그 뒤 박은은 자신이 중국의 사신이 함부로 하는 것을 막지 못한 허물을 들어 사직을 청하였다.

7월 18일 임금이 태평관에 가자 황엄 등이 불상 앞에 나아가 예를 행하도록 요구하였다. 임금이 불가하게 여기어 말하기를, “내가 온 것은 천자의 사신을 위한 것이지, 불상을 위한 것이 아니오. 만약 동불상이 중국에서 왔다면 내가 마땅히 절하여 경근(敬謹)의 뜻을 표해야 옳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한데 어찌 절할 필요가 있겠소?” 하였다.

7월 22일 황엄 등이 동불상 3좌(座)를 받들고 경사(京師)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하였다. 임금도 이들을 따라 반송정(盤松亭)까지 가서 그들을 전송하였다. 이때 우군총제(右軍摠制) 조면(趙勉)으로 하여금 사신과 함께 경사로 가서 예부에 자문(咨文)을 전하고 동불상을 보내는 뜻을 알리게 하였다.

이렇게 화엄을 비롯한 중국 사신들이 돌아간 후 태종 6년 12월 22일 명나라 사신 한첩목아(韓帖木兒)·양영(楊寧) 등이 다시 와 임금에게 선물을 올렸다.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동불상을 바친 것을 기뻐하여 하사한 것이었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