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9일 금강산 신계사에서 봉행된 ‘만해 스님 열반 70돌 남북불교도 법회’ 참석자들.
2014년 6월 29일 금강산 신계사에서 봉행된 ‘만해 스님 열반 70돌 남북불교도 법회’ 참석자들.

“만해 선사를 다시 부르다”

북측은 역대 고승에 대해 혁명성·투쟁성·사상성을 통해 평가한다. 휴정·유정·처영 대사의 투쟁과 사상성을 높이 평가하고, 묘향산 보현사 수충사에 진영을 모시고 추모한다. 근세기 고승 중에는 만해 한용운 선사를 높이 평가했다.

김일성은 육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불교인들 가운데 한용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3·1 인민봉기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나섰던 사람입니다. 그는 불교 승(僧)이었는데, 조선 독립은 청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행동파였습니다. 적들에게 체포당했을 때도 변호사도, 사식도, 보석도 다 거절했습니다. 대부분의 민족대표가 겁에 질려 동요하는 기미를 보이자 감방의 변기통을 들어 내동댕이치며, 이 더러운 것들아, 너희들이 민족과 나라를 위한다는 놈들이냐고 고함을 쳤습니다.”라고 만해 스님의 투쟁과 사상, 그리고 혁명성을 크게 평가했다. 이 글은 만해 한용운 선사의 막내 손녀 한명심이 《통일신보》(2001. 12. 29.)에 기고한 〈추억의 붓을 들고〉란 글을 통해 다시 알려졌다.

최승희·리쾌대·박태원 등 문학·예술인에 대해서도 조명했다. 조선중앙TV(2003. 2. 10.)는 문학가 한설야·시인 박세영 등과 함께 무용가 최승희를 소개하면서 “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인민배우 최승희 녀사가 애국렬사릉으로 이장됐다.”라고 보도해 복권되었음을 알렸다. 《통일신보》(2020. 7. 26.)도 ‘공화국의 품에 안겨: 삶을 꽃 피운 재능 있는 민족 무용가’라는 제목으로 그녀를 조명했다. 이보다 앞서 1995년 5월 중국 심양의 노산미술학교가 처음 개최한 ‘조선현대미술작품전’을 시작으로, 월북작가들에 대한 재평가도 이어졌다. 그중 화가 리쾌대는 가장 붐을 탄 인물이다. 월북한 소설가 박태원도 재조명했다. 《통일신보》(2020. 2. 29.)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쓴 재능 있는 작가’라는 제목으로 그의 삶과 문학을 소개했다.

북측이 2000년대에 들어와 고승과 문학·예술인들을 소환한 것은 관례와 전례에 따른 것이다. 전통적 규범의 측면인 관례와 달리 전례는 이전의 관련 사례를 말한다. 남북교류를 통해 드러난 공동 행사는 전례적 결론이었지만, 그 속에는 역사적 과정을 담고 있다. 60년 만에 남북공동 행사로 치러진 만해축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때 남북불교 교류의 주요한 내용 등 그 패러다임을 다시 살펴본다.

만해 선사의 북녘 후손들

해방 후, 북녘에서 만해 한용운 선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한 이는 고 홍동근 목사의 부인이자 조국통일북미주협회 민족문화위원장인 재미교포 작가 홍정자(2016. 7. 1. 별세) 여사이다. 그녀는 평양에 들어가 만해 한용운의 후손을 수소문했다. 취재한 내용은 월간 《말》(1996년 1월호)에 실렸고, 만해 선사의 후손에 대해서는 43년 만에 알려졌다. 그간 남측에서는 한국전쟁 후, 만해 선사의 아들 한보국 선생의 생사를 몰랐었다. 홍정자 여사는 1994년 10월 평양에서 취재하고, 한보국 선생의 딸들과 처음 만난 계기는 남측 신법타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 회장의 부탁과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04년 만해 한용운의 아들로 태어난 한보국 선생에 대해 홍정자 여사는 “1950년 3월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가족과 함께 의용군을 따라 월북했다. 이후 1953년 전쟁 때 자강도 강계로 갔다가 평안도 영원 읍내로 자리를 옮겨 4개월 동안 지내다가 가족과 소식이 단절됐다. 그 후 황해도 영예 전사자병원에서 3년 동안 중환자로 입원 치료 중 깨어나서 가족 상봉을 노동당에 건의함으로써 평안남도 덕천군 제사공장에 근무하는 맏딸 한명숙과 연결돼 1956년 상봉했다. 노동당은 몸을 심하게 다친 한보국 선생에게 평양시 피복관리소 명예 부지배인 직함과 대동강변에 아파트를 한 채 주어 소일하게 했다. 김일성 주석은 1964년 환갑상을 차려주고, 《로동신문》에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기사를 쓰게 해 존재를 알렸다. 다섯 딸은 평양 공산대학 혹은 제사공장 공장대학, 고등전문피복과 학교 등을 졸업하고, 모두 김일성종합대학 출신들과 결혼해 약 30여 명의 자손이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한보국 선생의 큰딸 명숙이 충남 홍성을 떠날 때 그녀의 나이는 13세였다. 그녀는 홍정자 여사와 인터뷰에서 홍성에 대해 몇 가지를 기억하며, 아버지가 남긴 “통일 후, 조상 묘에 성묘하라.”는 유언을 전했다고 한다.

한보국 선생은 슬하에 아들(이름 미상)과 딸 다섯(홍성 태생의 명숙·명계·명자·명세, 평양 태생의 명심)을 두었다. 그의 막내딸 한명심이 2001년 12월 《통일신보》에 기고한 글에서 “할아버지는 아들의 이름도,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거부하고 나라를 한 몸 바쳐 보위하라는 뜻에서 ‘보국’이라고 지었다고 아버지는 이야기해 주었다. … 남쪽에서 여러 차례의 감옥살이에서 받은 고문의 후과로 몸이 허약해 북에 들어와서 장기간의 입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아버지가 생의 말년까지 여러 기관의 책임 일꾼의 직책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정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1964년 12월 21일. 이날은 아버지의 일생에서 가장 뜻깊은 날이었다. 생일 60돐을 맞는 아버지에게 생일상을 보내 주신 것이었다.”고 적었다. 평양직할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살고 있는 딸 한명심의 기록에서 한보국 선생은 1977년 6월 30일 73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임종 때 자녀들에게 “나는 이렇게 떠나지만 … 남북통일이 되면, 내 대신에 너희들이 조상님들께 성묘하라.”고 전했다. 이를 통해 한보국 선생의 출생일과 기일을 짐작할 수 있다.

한보국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후손이 살고 있는 북측에서 만해 한용운 선사에 관한 평가는 지속적으로 호평됐다. 1985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용운의 작품을 널리 발굴하라.”는 특별지침을 하달한 후, 1992년 2월 ‘제2의 문학예술혁명’ 총노선을 통해 대중성을 표방함에 따라 한용운을 소개하라는 지침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선불교도련맹(이하 조불련) 중앙위원회도 1996년 6월 〈애국렬사 한보국에 관하여〉란 별도의 보고서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만해 한용운에 관한 북측의 평가는 한보국 선생과 그의 딸, 사위 등의 존재와도 무관치 않은 일이라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만해 선사 자료와 행적만큼이나 한보국 선생에 대한 재해석과 다양한 자료도 함께 수집·정리돼야 할 부문이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우리 사회와 불교 운동사에 역사의 복원과 화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보국 선생의 삶에 관한 객관적 연구와 복권작업을 선행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2014년 12월 유엔 안보리에서 행한 즉흥 연설로 널리 알려진 오준 UN주재 한국대표부 대사는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주민들은 그냥 아무나(anybodies)가 아니다. 비록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겨우 수백 km 떨어진 곳에 우리의 동포가 있다는 걸 안다. … 먼 훗날 오늘 우리가 한 일을 돌아볼 때, 우리와 똑같이 인간다운 삶을 살 자격이 있는 북한 주민을 위해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라고 말해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이보다도 더 민족적이고 불교적인 관계망을 가졌던 만해 한용운 선사와 그 후손을 재조명하는 일은 이제, 남은 후손들의 과제이다.

남북이 만해축전을 열다

남북은 사후 70년 만에 만해 한용운 선사를 소환했다. 2014년 6월 29일 오후 2시 금강산 신계사에서 ‘만해 스님 열반 70돐 북남불교도 법회’가 열렸다.

북측 조불련과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이하 민추본)가 공동 주관한 그날의 합동 다례재(제사 형식)는 만해 선사 열반일을 기해 열렸다. 지홍 민추본 본부장을 비롯해 정문 조계종 사회부장, 범각 해남 대흥사 주지, 전준호 대한불교청년회장 등 남측 대표단 30명과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 차금철 조불련서기장, 리영호 조부련 책임부원, 진각 신계사 주지, 청학 표훈사 주지, 리현숙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 전영희 평양시 신도회 지도위원 등 사부대중 50여 명이 참가했다.

혜안 리영호 조불련 책임부원의 사회로 진행된 신계사 남북합동 다례재는 삼귀의, 반야심경 봉독에 이어 대웅전 서쪽에 마련한 제단을 향해 다 같이 추모 묵념을 하고, 헌향과 헌화, 그리고 차(茶)를 올리는 다례를 가졌다.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은 개회사에서 “만해 스님이 염원한 것은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와 독립이었습니다. 북남불교도들이 만해 스님의 민족자주정신을 계승해 민족통일에 앞장서 나가자.”고 말했다. 지홍 민추본 본부장은 봉행사에서 “다례재를 계기로 만해 스님이 활발히 왕래한 금강산과 설악산을 오가는 길이 다시 이어져 통일의 길, 평화의 길이 복원될 수 있도록 우리 남북불교도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 나가자.”고 당부했다.

전준호 대불청 회장과 리현숙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은 공동 발원문에서 “일제 식민지 통치의 암담한 시기 만해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등으로 법등으로 삼고, 중생구제의 실천행에 정진한 애국 선승이었습니다. 스님이 한 생 간직하고, 실천한 조국애와 민족자주정신은 오늘 우리 모두를 민족 분열의 비극을 하루빨리 가시고,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조국통일 성업에로 부르고 있습니다. … 우리 민족끼리 이념과 불심 화합으로 우리 겨레, 우리 남과 북의 불교도들이 굳게 손잡고 나아가는 걸음걸음, 행하는 불사 하나하나가 조국통일을 앞당기는 선업이 되도록 무량한 가호와 가피를 내려주십시오.”라고 낭독하며 법회를 마쳤다.

분단 후, 금강산 신계사에서 처음 열린 다례재는 강수린 조불련 위원장이 남측에 새해 인사로 보낸 서신에 이어 조불련과 민추본이 2014년 3월 11~12일 중국 심양 칠보산호텔의 실무회담을 통해 구체화했다. △불기 2558년 부처님오신날 봉축 남북 합동 점등법회 △만해 스님 70주기 남북 공동 학술토론회 △서산 대사 국가제향 복원 △북녘 어린이 영양 개선 지원 등 현안과 불교교류에 대한 공동사업을 논의했다. 이때 보화 조계종 사회부장, 진효 민추본 사무총장 등 남측 대표단 4명은 북측 대표단의 차금철 조불련 서기장, 송춘일 조불련 책임부원, 한정철 조불련 전국신도회 부회장·김석철 조불련 전국신도회 신도위원 등 4명과 회동했다.

특히, 북측 조불련 중앙위원회는 2014년 8월 11~14일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에서 열린 제16회 ‘만해축전’에 축하 전문을 처음 보냈다. 이 전문은 민추본이 조불련에 요청해 이루어진 것이다. 강수린 조불련 위원장은 축하 전문에서 “만해 스님은 일제식민지 통치의 암담한 시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등으로 법등으로 삼고, 중생구제의 실천행에 정진한 애국 선승이었습니다. 스님은 일제 경찰에 체포돼 대부분의 민족대표들이 변절할 때에도 전향서나 반성문이 아닌 <조선독립 이유서>를 써 드리데, 일제를 아연실색케 했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만해축전을 축하하면서 통일의 상징 금강산과 잇닿은 설악산 자락에서 진행되는 이번 축전의 인연 공덕으로 우리 겨레 얼싸안고, 통일 만세 높이 부를 그날이 더욱 앞당겨지리라는 기대와 확신을 표명합니다.”라고 밝혔다. 11일자로 보내온 축하 전문은 그해 8월 12일 만해축전 입재식-만해대상 시상식에서 발표됐다.

8·15 광복절 남북 합동법회가 무산된 가운데, 그해 10월 13일 낮 12시 금강산 신계사에서는 ‘신계사 복원 7주년 조국통일기원 북남불교도 합동법회’가 개최됐다. 그해 6월 이후, 4개월여 만에 남북불교도가 재회했다. 이날 법회에는 지홍 민추본 본부장을 단장으로 정묵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정념 총무원장 종책특보단장, 원명 조계사 주지 등 남측 대표단 30명과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 차금철 조불련 서기장, 리영호 조불련 책임부원, 청학 표훈사 주지, 수덕 평양 광법사 주지, 룡산 평양 정릉사 주지, 정각 개성 영통사 부전, 리현숙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을 비롯한 북측 대표단 등 50여 명이 참가했다.

신계사 합동법회는 혜자 108산사순례회 회주와 진각 신계사 주지의 타종을 시작으로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전통식으로 봉독했다. 양측 헌화에 이어 정문 조계종 사회부장이 경과보고를, 리규룡 조불련 부위원장이 개회사를 했다. 연암 리규룡 부위원장은 “신계사는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마련한 통일의 도장입니다. 오늘날 북과 남 사이에는 불신과 대립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6·15와 10·4 북남 공동 선언에 따라 신계사를 민족화합, 통일의 도장으로 만들어 가자. 법회에 참석한 사부대중 모두가 통일보살로서 사명감을 갖고 남북통일에 선도적인 역할을 다하자.”고 말했다. 지홍 민추본 본부장의 봉행사에 어어 이진화 전 서울시의원과 리현숙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의 발원문 낭독과 사홍서원 순으로 진행됐다. 합동법회 후, 신계사 측에서 마련한 곽밥(도시락)으로 함께 점심을 하고, 외금강 옥류동 계곡과 구룡연 폭포를 찾아 관람했다.

한편, 남측 천태종은 2014년 11월 26일 개성 영통사 경선원에서 ‘령통사 복원 9돐 기념 조국통일 기원 및 의천 대각 국사 913주기 열반다례재 북남불교도 합동법회’를 개최했다. 이날 합동법회에 참가한 50여 명은 대각국사 다례를 봉행하고, 천마산 관음사와 박연폭포, 만월대, 선죽교 등 개성 유적지를 순례했다.

2014년 한 해 동안 북측은 반일투사·항일운동가로, 남측은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만해 한용운 선사는 오롯이 주인공이었다. 다시 소환한 만해 선사를 통해 남북이 하나됨을 이루었다. 이웃 종교계의 적극적인 전략 전술에서 보면, 조계종 등 불교종단에서의 독립운동사 재정립과 홍보를 위한 첫걸음이 필요한 때이다.

이지범 | 북한불교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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