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은 폐지된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관에 귀속 시키고, 사찰의 수와 토지, 노비의 수를 제한한 ‘배불(排佛)의 군주’였다. 하지만 회암사, 표훈사, 유점사는 불교에 뜻이 있어 승도들이 모이는 곳이라며 토지와 노비를 줄이지 않았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금강산 표훈사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태종은 폐지된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관에 귀속 시키고, 사찰의 수와 토지, 노비의 수를 제한한 ‘배불(排佛)의 군주’였다. 하지만 회암사, 표훈사, 유점사는 불교에 뜻이 있어 승도들이 모이는 곳이라며 토지와 노비를 줄이지 않았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금강산 표훈사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태종의 즉위와 불교 배척의 조짐

태종은 배불의 군주였다. 즉위한 후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많이 실시하였다. 다만 이성계가 태상왕(太上王)으로 있는 까닭에 배불의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사실이 태종 1년 윤3월 23일 경연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헌부(憲府)에서 오교(五敎)·양종(兩宗) 가운데 명리를 쫓는 승려를 파하고, 사사(寺社)의 토전(土田)은 모두 공가(公家)에 붙인 후 산문(山門)은 오직 도승(道僧)에게 맡겨두기를 청”하였다. 이에 태종은 “나도 그 제안을 따르려고 하나 태상왕께서 불사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차마 혁파하지를 못한다.” 하였다.

이어 “예전에 불씨(佛氏)가 어느 시대에 처음으로 일어났으며, 부처를 좋아한 것은 어느 시대이며, 부처를 배척한 것은 어느 시대인가?” 물었다. 시독(侍讀) 김과(金科)가 《통감(通鑑)》에 실려 있는 것을 들어 역대 부처를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패망하고, 부처를 배척하였어도 마침내 잘 다스린 것을 명확히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헌부의 소장(疏狀) 가운데에도 또한 이 말을 썼는데, 반드시 유관(柳觀)의 말일 것이다.” 하였다. 유창(劉敞)이 말하기를, “불씨의 화복의 설은 허탄(虛誕)하여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태종 역시 “그렇다.”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태종은 서서히 배불의 심기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5년 8월 29일 충청도 관찰사가 전국에 있는 폐지된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속공(屬公)시키자고 건의하였다. 충청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국가에서 사사(寺社)를 두고 전민(田民)을 예속시킨 것은 다만 산수를 지키고 방가(邦家)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충청도 내에 안파사(安波寺)란 절이 있는데 왜적으로 인하여 폐지되었습니다. 지금 그곳 기지에서 60리나 떨어진 곳에 초가 암자(草家菴子)를 짓고 사는 승려는 두세 명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노비를 부리고 전조(田租)를 거두고 있어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본래의 기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토지와 백성을 일체 속공시켜 국용(國用)에 보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각도의 폐지된 사사와 전민도 이 예에 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물론 태종의 이런 정책에 반대하는 승려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태종 6년 2월 26일 절의 수와 노비 그리고 전지를 줄이는 것에 반대하는 승려 수백 명이 신문고(申聞鼓)를 치며 항의한 것이다. 승도들이 사찰의 수를 줄이고 노비와 전지를 삭감하는 까닭에 날마다 정부에 호소하여 예전대로 회복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런 항의에 정승 하륜(河崙)이 답하지 아니하자 이에 조계종(曹溪宗) 승려 성민(省敏)이 수백 명의 승려를 거느리고 신문고를 쳐서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서울 헌릉. 조선 3대 국왕 태종과 비 원경왕후 민 씨의 능이다.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태종,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능침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진.
서울 헌릉. 조선 3대 국왕 태종과 비 원경왕후 민 씨의 능이다.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태종,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능침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진.

불교 종단의 통합 상항

조선조 불교의 교세가 급격하게 쇠퇴한 것은 태종 때 불교 종단의 통합과 그에 따른 사원경제의 축소 때부터이다.

태종은 6년 3월 27일 선교 양종의 사찰 수와 토지 그리고 노비의 수를 제한하는 명을 내렸다. 그 전말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의정부에서 선교 각 종파에서 남겨 둘 사사(寺社)를 정하도록 청하였다. “본부(本府)에서 일찍이 수교(受敎)하기를, ‘고려 밀기(密記)에 붙은 비보 사사(裨補寺社) 및 외방 각 고을 답산기(踏山記)에 붙은 사사 가운데 신도(新都)와 구도(舊都)는 오교양종(五敎兩宗)을 각각 1사(寺)씩, 외방의 목(牧)·부(府)는 선종·교종을 각각 1사(寺)씩, 군(郡)·현(縣)은 선종·교종 중에 1사(寺)를 양의(量宜)하여 남겨 두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의논된 것은 신도와 구도의 각사 가운데 선종·교종 각각 1사에는 속전(屬田)이 200결(結), 노비가 100구(口), 상양(常養)이 100명이며, 그 나머지 각 사찰에는 속전이 100결, 노비가 50구, 상양이 50명이며, 각도 계수관(界首官)의 선종·교종 가운데 1사에는 속전이 100결, 노비가 50구이고, 각 고을 읍 안의 자복사(資福寺)에는 급전(給田)이 20결, 노비가 10구, 상양이 10명이며, 읍 밖의 각 사찰에는 급전이 60결, 노비가 30구, 상양이 30명입니다. 만약 고려의 밀기에 붙은 사찰이라면 그 명목이 구도의 명당을 비보(裨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도의 명당에는 실로 손해와 이익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그곳에 소속한 전지와 노비를 신도의 오교양종 가운데 전지와 노비가 없는 각 사찰에 옮겨서 급여하고, 또 정한 숫자 외 사사의 전지와 노비를 정한 숫자 내(內)의 각 사찰에 옮겨서 급여하며, 그 나머지는 속공(屬公)할 것입니다.

조계종(曹溪宗)과 총지종(摠持宗)은 합하여 70사(寺)를 남기고,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은 합하여 43사를 남기고, 화엄종(華嚴宗)·도문종(道文宗)은 합하여 43사를 남기고, 자은종(慈恩宗)은 36사를 남기고, 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은 합하여 30사를 남기고, 남산종(南山宗)·시흥종(始興宗)은 각각 10사를 남길 것입니다.” 하였다. 배불의 의지가 컸던 태종은 의정부의 건의를 그대로 따랐다.

또한 임금이 말하기를, “회암사(檜巖寺)는 불교에 뜻이 있어 승도들이 모이는 곳이니, 예외로 함이 가하다. 전지 100결과 노비 50구(口)를 더 급여하라. 표훈사(表訓寺)와 유점사(楡岾寺)도 또한 회암사의 예와 같이 하여 그 원속전(原屬田)과 노비는 예전 그대로 두고 감하지 말라. 정한 숫자 외의 사사도 또한 양의(量宜)하여 시지(柴地) 1, 2결을 주라.” 하였다.

종단 통합의 후속 조치

태종 6년 4월 1일 정해진 숫자 외에 절에 소속된 전지와 노비를 각 사찰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그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정한 숫자 외의 사사의 전지는 모두 군자(軍資)에 소속시켜 선군(船軍)의 양식으로 보충하고, 노비는 모두 전농시(典農寺)에 소속시켜 그 옛 거처에 그대로 살면서 둔전(屯田)하도록 하고, 군기감(軍器監)에 4000명을 소속시켜 매 1번(番)에 400구(口)씩 차례대로 입역(立役)하고,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에 각각 2000구(口)씩을 소속시키고, 예빈시(禮賓寺)·복흥고(福興庫)에 각각 300구(口)씩을 소속시키며 아울러 옛 거처에 그대로 두고 무육(撫育)하여 사역(使役)시킬 것입니다. 각도 관찰사의 수령관(首領官)은 매양 순행할 때마다 다니면서 그 노고를 위문하여 생업에 안정되도록 할 것입니다. 만약 수령과 향리들이 즐겨 마음을 다해 완휼(完恤)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으면 엄격하게 규리(糾理)를 행하고, 아울러 수령관에게 능히 깨우쳐 거행하지 못한 죄를 연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년 윤7월 1일 사간원(司諫院)에서 사찰 통폐합에서 나타난 시폐의 개선에 착수하였다. 의정부에 명하여 전함(前銜)의 기로(耆老)와 재추(宰樞)를 모아 폐단을 제거할 사의(事宜)를 의논하게 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각도 시위군(侍衛軍)은 별다른 일이 없을 때 봄·가을 두 번 점고(點考)하는 이외의 번상시위(番上侍衛)를 없앨지의 가부(可否), 무너져 없어진 사사 이외에 이제 혁거할 사사의 노비를 속공시킬지의 가부, 육조(六曹) 대간(臺諫)에서 진언(陳言)한 내사(內事)의 가부를 의논하여 신문하도록 하였다.

이때 사간원에서 상언하기를, “불씨(佛氏)의 가르침은 국가에 무익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미혹됨이 더욱 심합니다. 백성들이 제 마음대로 머리 깎는 것을 나라에서 엄금하지 아니하므로 그 무리가 번성하여 사찰이 산과 들에서 서로 바라보고, 더구나 근자에는 승려들이 그 스승의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고 불법을 자행합니다. 전하께서 그 폐단을 진려(軫慮)하여 비보(裨補) 사사 이외의 긴요하지 않은 사사는 태거(汰去)시키고, 곧 주·부·군·현(州府郡縣)에 모두 절의 액수(額數)를 정하였습니다. 절의 크고 작음과 승려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전민의 수효를 증감(增減)하였고, 그 무리로 하여금 여럿이 모여 살면서 각기 그 가르침을 바로 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역대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삼한 이래 대가람도 태거(汰去)한 예가 있는지라 그 폐망한 사찰에 주지를 임명한 일이 혹 있을 것이므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산수의 명승지를 택하여 대가람으로써 폐망한 사원을 대신하면 승려들이 살 곳을 얻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각도에서 세공재목(歲貢材木)의 어려움을 말하니 이에 의정부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산수의 명승지를 택하여 대가람을 세워 폐망한 사원을 대신하게 하자는 것은 아뢴 대로 따르고, 올해 세공재목은 면제하도록 하시고 다시 문서를 보내 조회할 때까지 기다린 뒤에 필요한 것을 조달하여 상납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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