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2월 26일부터 열흘 간 개최된 유교법회에 동참한 대중들.
1941년 2월 26일부터 열흘 간 개최된 유교법회에 동참한 대중들.

유교법회는 일제강점기 왜색불교에 대한 한국불교의 저항이었고,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청정 비구승을 중심으로 한 불교도들의 민족불교 실현을 위한 의지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해방 이후 한국불교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지대하다.

1. 유교법회의 배경

1941년 3월은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한창 서두르고 있었던 시점이다. 한국은 일제 말기를 맞이하였으며, 일제는 이 시기에 최후의 발악으로 창씨개명, 국어 및 국사 교육금지, 강제 징용 및 징병, 위안부 및 정신대 징집 등으로 다양한 식민지 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우리나라 불교계에 총본산 건설운동, 불교계 통일운동으로 당시 불교계를 통제하고 궁극적으로는 내선일체를 통한 황국신민화를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로서의 태고사가 일제의 승인을 받아 출범하기 직전이었다. 한국불교계는 사찰령을 근간으로 한 일본의 식민지 불교 정책이 전개되고 있었고, 일본불교의 유입으로 대처식육(帶妻食肉)의 풍조는 더 이상 새로운 관심사가 아니었다. 때문에 산중공의제(山中公議制)나 원융(圓融) 살림 등 전통불교의 양법미제(良法美制)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전통 불교의 명맥은 거센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유교법회는 이와 같은 삭막하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 불교계의 고승(高僧)을 초청하자는 자리였다. 시작은 애매하였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독자적이었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고승을 한자리에 모아보자는 법회가 만들어지는 배경에는 석연치 않은 점도 있었다. 예컨대 총독부 학무국장 도미나가(富永)가 춘원 이광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불교가 이같이 무질서하고 지리멸렬해서는 안 되겠다. 교단을 맡아서 잘 해나갈 사람이 없겠는가. 지금까지는 교종에 교단을 맡겨왔는데 선종에 그런 인물이 없겠는가. 선종의 고승들을 만나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1)

이 말을 들은 춘원(春園)이 사촌형인 운허(耘虛) 스님에게 전하였고, 운허 스님으로부터 내용을 전해 들은 보산(寶山) 스님은 학무국장의 본심을 알고 난 이후에 개최해도 늦지 않다는 뜻을 밝혔다. 급기야 두 스님은 도미나가 총독부 학무국장을 만났다. 그러나 학무국장은 정작 두 스님에게는 고승법회(高僧法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춘원에게는 비용까지 전담하겠다면서 이 법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겠다고 했지만, 정작 두 스님에게는 금시초문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상황이 학무국장의 의도와는 달리 전개되고 있었음을 눈치 챈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발단은 총독부 학무국장에서 시작되었지만, 불교계의 노골적인 저항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그 명분과 의미가 남다른 것이어서 두 스님은 총독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고승법회를 개최하고자 뜻을 모았다. 기록에 의하면 운허 스님은 직지사로 청담(淸潭) 스님을 찾아갔고, 청담 스님은 만공 스님을 만나 고승법회를 개최하는 문제를 상의하였으며, 운허 스님도 박한영·효봉 스님을 만나 상의하였다. 그러나 준비는 쉽지 않았다. 당시 선학원과 대립상태에 있었던 교무원(敎務院) 측 인사와 31본산 주지들이 크게 반대하고 일어선 것이다. 우선 운허 스님과 청담 스님이 종로경찰서에 여러 차례 불려가 법회를 열지 말라고 갖은 협박과 회유를 받고 있었다. 또한 법회를 화계사(華溪寺)나 봉선사(奉先寺)에서 개최하고자 집회신청서를 제출하면 무조건 각하를 당했다. 그러나 법회 개최를 반대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개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조선의 종교(宗敎) 통제 문제는 다년간의 현안으로서 총독부 사회 교육과에서는 이미 착착 실시하야 오는 중인데 우선 조선인 관게의 불교(佛敎)를 일원적으로 통제하야 불교의 내선 제휴를 강화한 다음 국제본의투철을 중심으로 하는 황민화(皇民化)의 힘찬 심전개발(心田開發)운동을 이르킬 터이며 이것을 게기로 하야 기독교(基督敎) 신도(神道) 등의 포교법(布敎法)에 의한 종교를 철저히 통제하고 여기서 전 종교게를 총망라하는 황국신민화운동을 전면적으로 전개하기로 되엿다. 여기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조선인 측의 불교엿다. 전선 각처에 잇는 사찰(寺刹) 총수 실로 이천수백에 그 교도는 삼십만 명이나 된다. 그러나 몃해 전만 해도 이가튼 사찰과 각 종파(宗派)를 일원적으로 통제지도할 중심적인 기관이 업섯다. 즉 중앙불교원(中央佛敎院)과 중앙선리참구원(中央禪理參究院)의 두 가지가 중앙에 잇서 가지고 제각기 지도적 역할을 해 왓든 것이다. 중앙교무원은 전 선불교 관게의 연락과 부내 혜화전문(惠化專門)의 경영을 마터 보앗고 중앙선리참구원에서는 ‘선(禪)’을 하는 사람과의 연락연구기관으로 각기 존재햇지만 두 기관이 다가치 전선 각 사찰에 대하야 관게를 가지고 잇섯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작년 4(四)월 사찰령의 개정과 동시에 조선불교도의 총의에 라 ‘선’과 ‘교(敎)’를 일원적으로 통제하고 태고사(太古寺)를 맨들고 전선 31(三十一)본산(本山)의 총본산으로 하야 전 선불교의 중앙지도기관으로 햇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교무원과 선리참구원은 존재하야 만흔 페해가 잇섯슴으로 금년 3(三)월에 총독부에서는 이 두 가지 단체를 통제하고저 결심하고 그 제일 착수로 금년 3(三)월에는 중앙교무원을 조계학원(曹溪學院)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총본산 태고사의 통제하에 두게 되엿다. 이와 동시에 혜화전문학교를 경영하는 재단의 역원도 태고사의 간부로 하야금 겸임케 하야 실질적 통제를 완성식힌 것이다. 여기서 남은 문제는 존립할 아모런 이유가 업는 중앙선리참구원을 어케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통제가 완성되여 가는 현재 과정에 잇서서 이것은 당연히 발전적 해소를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 선리참구원이라는 것은 법령상 사찰도 아니요 포교상 아모런 존재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정당한 불교를 포교하는 데 암(癌)으로서의 존재밧게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지금 그 내용과 구성 인원 등 자세한 상황을 조사하는 중이다. 조사가 나는 대로 이것도 그 통제될 단게에 이른 것만으로 명확한 일이다. 여기서 조선의 종교 통제 문제는 불교의 일원적 통제로부터 시작하야 기독교 등에도 미치게 될 터이다.2)

고승법회를 개최하자는 총독부 학무국장의 의도는 한국불교를 일원화시키는 것이었다. 조선을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시키는 것이 고승법회의 궁극적인 목적이었고, 심전개발(心田開發)은 구체적인 실천이었다. 완전한 복속을 기획한 것이었다. 총독부는 이 목적과 실천을 위해 불교를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실현을 위해서는 불교계를 통제하고 운영할 수 있는 중앙기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즉 선과 교뿐만 아니라 총독부의 말을 잘 듣는 꼭두각시가 필요했다. 당시 중앙불교교무원과 선학원의 ‘중앙선리참구원’은 불교계의 대표적인 통제와 운영기관이었다. 이 가운데 교무원은 총독부의 장악으로 실질적 통제가 가능하였지만, ‘선리참구원’은 일본불교화 뿐만 아니라 조선의 완전한 황민화를 위해서는 단순한 통제가 아닌 반드시 제거해야 될 걸림돌이었다. 때문에 총독부는 “선리참구원이라는 것은 법령상 사찰도 아니요 포교상 아모런 존재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정당한 불교를 포교하는 데 암(癌)으로서의 존재밧게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선학원의 선리참구원은 조선총독부가 원한 ‘교단을 맡아서 잘해나갈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면모는 교무원 측의 반응에서도 드러났다. ‘고승법회(高僧法會)’라는 명칭에 대해 교무원 측이 비난한 것이다. 비록 이광수와 총독부 학무국장 사이에서 나온 대화가 유교법회의 시발점이 되었지만, 선리참구원은 그 기회를 오히려 정법 수호, 계율수호, 그리고 선학원의 정체성 확립과 선양의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이 모임 중에 한두 사람의 고승은 있을 것이므로 고승법회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굳이 비난을 받아가면서 고승법회라 해서 말썽을 일으킬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부처님의 유지를 받들어 행하는 무리이므로 그 점을 따서 유교법회(遺敎法會)라 함이 좋겠다.

당시 법회 명칭에 대한 서응(瑞應) 스님의 해법이다. ‘고승법회’로 명칭을 정해 총독부와 교무원의 표적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는 수행자이니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 보자’는 보다 더 큰 의미로 법회의 명칭이 ‘유교법회’로 정립되는 순간이었다. 유교법회(遺敎法會)는 이렇게 해서 1941년 2월 26일부터 10일간 선학원에서 개최되었다. 정법 수호·계율 수호가 법회 개최의 대의명분이었다.

[주] -----

1) 강석주·박경훈 공저(2002), 《불교근세백년》, 민족사, 145쪽.

2) <佛敎서도 內鮮一體로 宗敎報國에 新機軸>, 《每日申報》 1942. 08. 06. 2쪽.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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