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변 석왕사 전경. 정종은 승려를 금강산과 안변 석왕사에 보내 보살재를 베풀고 승려 200명에게 음식을 공양하였다.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 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건판 16565).
안변 석왕사 전경. 정종은 승려를 금강산과 안변 석왕사에 보내 보살재를 베풀고 승려 200명에게 음식을 공양하였다.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 사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건판 16565).

조선의 2대 임금인 정종은 1398년 8월 26일 일어난 ‘왕자의 난’으로 폐위된 이복동생 의안대군의 뒤를 이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9월 5일 태조의 선위(禪位)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왕위에 관심이 없던 정종은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1400년 11월 13일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2년 남짓 재위 기간에 보여준 그의 불교 신행은 흥불(興佛)도 배불(排佛)도 아닌 모습이었다.

정종의 불교에 대한 인식

정종은 신하들과 불교에 대해 여러 번 토론하였다. 2년 1월 10일 경연에서 한나라의 삼로(三老)·오경(五更)의 일을 물었다. 시강관(侍講官) 배중륜(裵仲倫)이 대답하기를, “옛적에 명제(明帝)가 삼로·오경을 높였는데, 마치 우리 국조에서 국사(國師), 왕사(王師)를 높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였다. 이어 지경연사(知經筵事) 하륜(河崙)이 말하기를, “전하가 점점 부처에게 혹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정종은 “과인이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미혹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불씨(佛氏)의 도가 사람에게 화복(禍福)으로 보이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하륜이 다시 말하기를, “불씨가 모두 미견(未見)과 미래(未來)를 가지고 인심을 현혹시켰기 때문에 감히 평탄한 사응(事應)을 가지고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성인이 그 옳은 것 같으면서도 그른 것을 미워한 것입니다. 만일 화복을 가지고 말한다면 옛적에 석씨(釋氏)가 세상에 있을 때 도적이 그 일족을 심히 많이 죽이었는데 석씨가 어찌하여 미리 말해서 그 화를 면하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화복의 말이 그른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 정종은 대신들에게 “사리(舍利)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물었다. 하륜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정기(精氣)가 뭉친 것입니다. 사람이 정신을 수련하면 모두 사리가 있는 것입니다. 바다 가운데 큰 조개에 보주(寶珠)가 있고 뱀에는 명월주(明月珠)가 있습니다. 뱀과 조개가 어찌 착한 존재여서 이것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정기가 뭉친 것뿐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이 웃었다.

정종 2년 2월 25일 경연에 나아가 촬요(撮要)를 읽다가 양해(襄楷)가 표(表)를 올려 한나라 환제(桓帝)가 부처를 좋아함이 심하였던 것을 말한 데에 이르렀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전백영(全伯英)에게 이르기를, “경들은 무슨 까닭으로 부처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가?” 물었다.

전백영이 대답하였다. “공자는 이단을 깊이 연구하면 해만 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의 도는 인의(仁義)를 중하게 여기는데, 석씨는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것으로 종지를 삼기 때문에 신 등은 불씨의 도는 인군이 좋아할 바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부처를 좋아한 인군 가운데 망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다. 탐하고 욕심내는 데는 승려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사람들이 주면 좋아하고 주지 않으면 원망한다.” 하였다.

10월 3일 경연에 나아가서 동지사(同知事) 이첨(李詹)에게 물었다. “노자(老子)와 신선의 도를 말하여 줄 수 있겠는가?” 물었다.

이첨이 말하였다. “신이 옛날에는 노자와 신선의 도가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통감강목(通鑑綱目)을 보니 노자의 도는 허무로 종지를 삼아서 말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난 것은 집을 떠나서 나다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사의 더디고 빠른 것을 구애받지 말고 빨리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생사를 맡겨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신선은 오래 살고 늙지 않는 것을 귀히 여겨 약을 먹고 살기를 구하고 죽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석씨의 도는 천당과 지옥의 설이 있는데, 착한 일을 한 자는 천당에서 살고, 악한 일을 한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천당에 살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유도(儒道)에서는 사람이 음양 두 기운을 받아서 났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선도·노자·석씨의 말과 유가의 말은 어떤 것이 옳은가?” 물었다.

이첨이 말하기를, “유가의 도는 묘명(杳冥)하고 혼묵(昏默)한 데에 있지 않고 사물 위에 있으니, 옛날 성현들이 대개 일찍이 논한 것입니다. 사람이 천지의 음양을 받아서 나는데 음양이 곧 귀신입니다. 사는 것은 신(神)이고 죽는 것은 귀(鬼)입니다. 사람의 움직임과 조용함, 호흡하는 것과 일월이 차고 이즈러지는 것과 초목이 피고 떨어지고 하는 것은 귀신의 이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귀신의 이치가 곧 천지의 이치로구나! 사람이 죽으면 정신이 있는가? 또 속담에 귀신이 화복을 내리고, 책(責)하고 취(取)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러한가?”

이첨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어서 정기가 흩어지지 않는다면 책(責)하고 취(取)하는 이치가 있겠으나, 이것은 천지 귀신의 정기가 아니고 부정한 기운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정종의 기복양재(祈福禳災) 신앙

정종 1년 7월 10일 천재(天災)와 지괴(地怪)가 여러 번 보이므로 5일 동안 기양하는 도량을 베풀었다. 8월 6일에는 경상도 바닷물이 울주(蔚州)에서 동래(東萊)까지 길이 30리 너비 20리로 피같이 붉었다. 무릇 나흘 동안이나 그러하였다. 수족(水族)이 모두 죽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천구성(天狗星)이 바다 가운데에 떨어진 까닭이다.” 하였다. 정종은 기복양재의 도량을 통도사(通度寺)에서 베풀도록 명하였다. 8월 10일에는 불은사(佛恩寺)에서 기양하는 도량을 베풀었다.

10월 13일 흥국사(興國寺)의 금부처가 땀을 흘렸다. 이어 19일, 29일, 그리고 2년 1월 20일에도 흥국사의 금부처가 땀을 흘렸다. 그러자 이튿날 중추원사(中樞院使) 최유경(崔有慶)을 보내어 7일 동안 기복양재의 도량을 베풀었다.

정종이 보인 신불(信佛)과 배불(排佛) 유형

정종 역시 태조와 같이 자주 승려들에게 반승(飯僧)을 하였다. 1년 1월 3일 승려 설오(雪悟)를 금강산과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에 보내어 보살재(菩薩齋)를 베풀고 승려 200명에게 반승하였다.

1월 9일 경상도 감사에게 명하여 해인사에서 불경을 인쇄하는 승려들에게 반승하도록 하였다. 태상왕이 개인적인 재물로 대장경을 인쇄하고자 하여 동북면(東北面)에 저축한 콩과 조 540석을 단주(端州)·길주(吉州) 두 고을 창고에 납입한 후 해인사 근방 여러 고을의 미두(米豆)를 그 수량대로 바꾸게 하였다.

정종은 신하들이 건의하는 불교 상례(常例)의 폐지에도 소극적이었다. 1년 3월 13일 예조에서 “고려에서 불도를 숭신하여 마을에서 경행하는 제도를 설치하였다. 명령을 받든 감찰(監察)이 공복(公服)을 갖추고 승려들을 이끌고 마을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번(幡)을 달고 나각(螺角)을 불며 경문을 외우고 작법(作法)을 행하였습니다. 원하건대 봄·가을에 장경(藏經)하는 예에 의해 혁파하소서.”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2년 4월 6일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초파일에 연등 설치를 정지하도록 청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정종은 스스로 불사에 동참하는 일도 있었다. 2년 3월 8일 내탕(內帑)의 재물을 내어 석가와 오백나한상을 만들어서 화장사(華藏寺)에 두었다. 그런데 3월 19일 화장산(華藏山)의 큰 돌이 무너지는 일이 발생하자 그날 도류(道流)와 승도들로 하여금 내전에서 경을 읽게 하였다. 10월 6일에는 몰래 화장사에 가서 새로 만든 석가 삼존과 오백나한을 구경하는 일도 있었다.

정종은 사찰에 불편을 주는 일을 금지하였다. 2년 8월 21일 처음에 오부 학당(五部學堂)을 설치하였으나 횡사(黌舍)를 세우지 못하였다. 그러자 동부(東部)에서는 학생을 순천사(順天寺)에 모으고, 서부(西部)에서는 미륵사(彌勒寺)에 모았다. 두 사원의 승려들이 삼보를 파괴하고 더럽힌다고 하소연하자 학당을 없애도록 명하였다.

정종의 흥불 사례도 적었지만 배불 사례도 많지 않았다. 1년 3월 9일 대사헌 조박(趙璞)에게 이르기를, “지금 국가의 기강이 무너져서 승도가 권선(勸善)으로 인하여 여러 번 민가에 들어가서 부녀자를 간통하니 이제부터는 엄금하여 전의 폐단을 밟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왕위를 태종에게 선위한 후인 2년 12월에 예조의 상언에 따라 불사(佛事)를 혁파하는 일 정도였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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