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수륙재. 진관사는 태조가 수륙재를 베푼 이래 조선왕조의 탄신과 기신재를 지내는 중요한 사찰이 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진관사 수륙재. 진관사는 태조가 수륙재를 베푼 이래 조선왕조의 탄신과 기신재를 지내는 중요한 사찰이 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이 건국되면서 관리들은 고려조에서 행해졌던 불교 상례(常例)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태조 1년 8월 2일 도당(都堂)에서 대장도감(大藏都監)의 폐지를 청하였다. 이 기관은 몽골 침략 때 재조대장경 조성을 위해 설치되었다. 그 후 대장경을 조성한 예는 없으나 폐지되지 않고 조선 때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8월 5일에는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를 폐지하기를 청하였다. 두 불교 의례는 태조 왕건 이후 고려의 국가적 행사였으나 배척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8월 11일 예조전서(禮曹典書) 조박(趙璞) 등이 봄, 가을에 장경(藏經) 백고좌(百高座) 법석과 친히 행차하는 도량(道場) 7곳의 폐지를 상서하였다. 이를 들은 태조는 도당에 봄, 가을의 장경 백고좌 법석과 도량 7곳의 처음 설치한 근원을 상고하여 아뢰도록 교지를 내렸다. 그렇게 연원을 살펴봄으로써 폐지되는 화를 면하였으나 불교 상례는 점점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2년 1월에는 화주승들이 임금이 수결(手決)한 발원문을 가졌다고 핑계하고서 양반과 백성을 속이는 일은 모두 금지하도록 도평의사사에 교지를 내리었다.

이처럼 건국 초 배불 기조가 심해진 상황이었지만 태조는 민심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불교 신행은 이어 나갔다.

기복양재(祈福禳災)의 법석

태조의 신앙관은 불교를 통한 개인과 국가의 안녕이었다. 자연히 기복양재 신앙이 많았다. 그 내용을 분석하면 조선왕조의 안녕을 위한 것과 자연적 변화에 대한 대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조선왕조의 안녕을 위한 것을 보면 태조 2년 2월 27일 숙위하는 사병들에게 《신중경(神衆經)》에 있는 주문을 외우게 하였다. 재앙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4월 30일은 황고(皇考) 환왕(桓王)의 기신(忌晨)에는 임금이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승려들을 시켜 대궐 안에서 경을 외게 하였다.

3년 4월 29일 환왕의 기신을 맞아 태조는 중궁(中宮)과 더불어 경천사(敬天寺)에 거둥하여 환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재를 베풀었다. 그리고 화엄삼매참(華嚴三昧懺)을 강설하도록 하였다.

5년 1월 24일 태조는 화공에게 분부하여 부처를 그려서 새 궁궐에 안치하는 불사를 하였다. 2월 9일에는 현비(顯妃)와 함께 관음굴(觀音窟)에 거둥하여 재를 올리고 이튿날 돌아왔다. 4월 29일 승려 800명을 근정전에 모아 《금강경》을 외우게 하였으며, 7월 1일에는 현비가 병환이 나자 승려 50명을 내전으로 불러 부처에게 빌도록 하였다. 7월 7일 현비의 병환을 위하여 승려들이 내전에 모여서 부처에게 빌고, 사신을 회암사(檜巖寺)에 보내어 그와 같이 하였다. 또 소격전(昭格殿)에 초제(醮祭; 별에 지내는 제사)를 거행하고 중외(中外)의 이죄(二罪; 사형을 제외한 유형 이하의 죄)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였다.

6년 3월 4일 경천사에 거둥하여 화엄법석(華嚴法席)을 베풀어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영가를 위로하였다.

국보 ‘조선 태조 어진’. 문화재청 제공.
국보 ‘조선 태조 어진’. 문화재청 제공.

두 번째는 자연의 변화에 대비한 것으로 태조 2년 10월 29일 하늘의 별이 심상치 않은 모습으로 바뀌는 변괴(變怪)가 자주 일어나자 승려들을 시좌소(時坐所)에 모아 재앙을 소멸시키는 도량을 베풀게 하였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 중궁(中宮)과 더불어 예불행향(禮佛行香) 하였다.

4년 4월 25일 사신을 총지사(摠持寺)와 현성사(賢聖寺) 등에 보내서 부처님께 재를 올려 천변(天變)을 제거하게 하였다. 6월 1일에는 사신을 사천왕사(四天王寺) 등에 보내어 사천왕 도량을 베풀었다. 8월 28일 태학사(太學士) 유구(柳玽)를 회암사에 보내어 소재법석(消災法席)을 베풀게 하였다. 10월 17일에는 천둥과 샘물이 끓어올랐으므로 금경법석(金經法席)을 내전에서 베풀고 사람을 여러 절에 나누어 보내어 법석을 베풀게 하였다.

5년 1월 17일 승려 27명을 내전에 모으고 소재대반야도량(消災大般若道場)을 베풀었다.

6년 4월 25일 판삼사사(判三司事) 이거인(李居仁)을 회암사에, 우복사(右僕射) 유구를 광암사(光巖寺)에 보내 성변(星變)에 대한 기도와 재앙을 없애는 법석을 베풀었다. 그리고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융(崔融)을 소격전(昭格殿)에 보내어 화성독초(火星獨醮)를 베풀게 하였다. 5월 15일에는 어떤 별이 왕량성(王良星)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지천사(支天寺)에서 재앙을 없애는 법석을 베풀었다. 9월 19일에는 사람을 각도 사사(寺社)에 보내어 진병(鎭兵) 법석을 베풀게 하였다.

7년 1월 22일 성변을 기양하는 법석을 지천사에서 베풀었다. 2월 14일에는 천변(天變)을 기양하는 법석을 지천사에 베풀고, 또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오사충(吳思忠)을 장의사(藏義寺)에 보내어 십이인연(十二因緣) 법석을 베풀었다.

태조의 반승(飯僧)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불교를 숭상했던 태조는 틈나는 대로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반승을 행하였다. 그 사례를 보면, 1년 11월 15일 내탕고(內帑庫)를 내어 관음굴(觀音窟)에서 승려들을 공양하였다.

2년 2월 24일은 의비(懿妃)의 기신(忌晨)이므로 직접 회암사에 거둥하여 승려들을 공양하였다. 10월 11일 자신의 생일에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고, 광명사(廣明寺)에서 승려 1500명에게 공양하였다. 이어 17일에는 연복사 5층 탑이 완성되자 대장경을 넣고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렸다. 이때 대장경 독송도 함께 거행되었다.

3년 10월 21일은 국사(國師) 봉숭례(封崇禮)가 있는 날이었다. 태조는 9월 8일 천태종 조구(祖丘)를 국사로 임명하였다. 이날 국사가 취임하는 의식을 거행한 후 내전에서 108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올렸다.

4년 7월 12일 현비(顯妃)가 평안하지 못하자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부처에게 기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중외(中外)의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는 석방하게 하였다.

5년 10월 11일 태조 탄일에 승려 108명을 궁정에서 반승하고 《금강경》을 읽게 하였다. 중외의 이죄(二罪) 이하의 죄수는 모두 석방하였다.

태조의 문수법회(文殊法會) 참여

태조의 신행에는 불교의 진리를 알고자 하는 모습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문수법회의 참여였다. 이 법회는 고려조부터 중요하게 여기던 불교 행사였다. 문수보살의 명칭답게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려는 모습이 많았다.

2년 3월 28일 연복사(演福寺) 5층 탑이 완성되자 문수법회를 베풀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자초(自超)에게 선법(禪法) 강설(講說)을 들었다. 4월 2일에는 태조가 중궁(中宮)과 더불어 연복사에 거둥하여 문수법회를 구경하였다.

3년 2월 11일 태조가 연복사에 거둥하여 문수법회를 구경한 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정희계(鄭熙啓)의 사제(私第)로 갔다가 수창궁으로 거둥하였다. 2월 14일 태조가 중궁과 더불어 연복사에 거둥하여 문수법회를 구경하였다. 2월 17일 태조가 연복사에 거둥하여 문수법회를 구경하였다. 이때 왕사 자초가 죄수를 사면하기를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태조의 문수법회 참여는 모두 연복사에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고려왕족과 서민을 위한 수륙재(水陸齋)

태조는 고려 왕족들을 위한 불사를 거행하였다.

3년 7월 17일 전 예의판서(禮儀判書) 한이(韓理), 전 우윤(右尹) 정구(鄭矩), 봉상경(奉常卿) 조서(曺庶), 전 헌납(獻納) 권홍(權弘), 전 사복주부(司僕注簿) 변혼(卞渾) 등에게 명하여 금으로 《법화경》 4부를 써서 각 절에 나누어 두고 때때로 읽도록 하였다. 변혼은 죄를 범하고 도망해 있었는데 그가 글씨를 잘 쓰므로 같이 쓰게 하였다.

4년 2월 24일 고려왕조의 왕 씨들을 위해 관음굴(觀音堀), 현암사(見巖寺), 삼화사(三和寺)에서 수륙재를 베풀고 매년 봄과 가을에 항상 거행하게 하였다.

7년 1월 6일 진관사(津寬寺)에서 수륙재를 베풀었다. 이후 진관사는 조선왕조의 탄신과 기신재를 지내는 중요한 사찰이 되었다.

이와 같은 수륙재는 왕 씨만이 아니라 일반 서민을 위해서도 설행되었다. 태조 5년 2월 27일 성문 밖 세 곳에서 역부(役夫)로서 죽은 자의 혼령을 위로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서도 3년 동안 지내도록 명하였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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