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학원 중앙선원 안거 방함록.
선학원 중앙선원 안거 방함록.

한편 백용성을 위시한 비구승들은 “승(僧)된 자의 지계수도(持戒修道)함은 당연한 본분사인데 어찌 사법(寺法)을 개정하여 대처자로서 주지되기를 당국에 희망하리오……”라는 내용으로 ‘파계생활 금지’에 관한 건백서를 제출하였다.71)

현금現今 조선의 승려는 처대식육을 감행하여 청정사원을 오염시키고 더럽히는 마굴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니 승체僧體를 바로 보면 실로 통탄할 뿐입니다. 부처님이 승려에게 처대妻帶할 것을 허락했다면 재가이부중在家二部衆을 둘 필요가 없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각하는 승규僧規를 명찰明察하여 출가자의 처대육식을 엄금하십시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파계승의 비구계比丘戒를 취소하여 청신사녀淸信士女의 지위에 처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습니다. 처대승려가 날로 증가하여 전 조선 사찰이 부패되어 가는 점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습니다. 현금現今에는 처대승려가 조선 사찰의 권리를 장악한 까닭에 진실한 승려로 공익을 우선시하고 검소하거나, 계율을 준수하거나, 승속의 모범이 되는 연고납승年高衲僧과 수행납자들은 자연히 쫓겨나 눈물을 흘리고 방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금후 이 사천대중이 어느 곳에서 편안히 지내겠으며, 또 불교의 잔명殘命은 어떻게 되겠습니까.72)

위의 글은 백용성과 127명의 비구승들이 조선 총독에게 보낸 탄원서의 내용이다. 1926년 5월 건백서를 제출하였지만, 조선 총독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2차 건백서를 보낸 것이다. 5월에 보낸 1차 건백서와 그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2차 건백서에서는 그 요구 사항이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컨대 불교계가 대처식육의 풍조가 만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승려의 대처행위를 금지하고자 하였다.73) 그 구체적인 조치로 대처승의 비구계를 취소하여 재가불자인 청신사녀의 지위에 있게 할 것을 원하였다. 또한 “지계(持戒) 승려에게는 몇 곳의 본산 사찰을 할당해 주어 안심하고 도를 닦게 할 것이며, 대처 승려 역시 몇 곳의 사찰을 지정해 주어 파계승과 지계승의 구별을 명확하게 해줄 것”74)을 탄원하였다. 그러나 청정 비구승의 건백서에도 불구하고 조선 총독부는 승려들에게 대처식육을 허용하였으며, 대처승도 본사 주지가 될 수 있도록 사법개정을 신청하도록 각 본사에 지시하였다.75) 이것은 1926년 사법(寺法) 가운데 ‘주지 자격 규정’에 관한 항목에서 ‘비구계를 구족해야 한다’는 조항을 삭제할 것을 종용하면서부터 비롯되었으며, 대부분의 사찰이 1929년까지 이 조항을 삭제했다는 것이다.76)

이와 같이 1926년 두 차례의 건백서 사건은 한국 전통 불교에 대한 호법과 항일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건백서에서 제시한 구체적인 요구 사항이 10여 년 후 선학원에서 동일한 형태로 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취처담육(娶妻噉肉)하는 승려들이 사원을 장악케 됨으로 말미암아 수행납자와 연고납자(年高衲子)에게 몇 개 본산을 할급(割給)하여 청정사원의 전통을 유지케 하라.”는 부분이다.

선학원은 1931년 중흥을 계기로 한국불교 선종의 중심기관임을 내세우면서 그 위상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3차례에 걸쳐 개최된 조선불교수좌대회는 청정 비구승의 수행 환경을 향상시키는 것이 기본적인 목적이었다. 특히 1935년 제3차 수좌대회에서는 당시 불교계 통일기관이었던 교무원 종회(敎務院 宗會)에 수좌들을 위해 청정사찰 몇 곳을 할애해 달라는 건의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77) 그러나 대처풍조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닌 일반적 현상으로 정착한 이상 선학원의 요구 조건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 맥락은 역시 1926년 백용성을 위시한 127명의 비구승이 제출한 건백서의 성격과 동일하였고, 그 결과 역시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때문에 선학원은 자력 구제 방안으로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이른바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으로 인가를 받았는데, 1935년 자본금은 여러 곳에서 답지한 기부금으로 설립 당시 9만 원에서 14만 원이 되었고, 재단법인에서 운영하는 선원이 5개나 된다고 하였다.78) 재단법인 설립 당시 만공, 혜월(慧月), 한암(漢岩), 성월(惺月)과 같은 대표적 인물들은 선학원 설립 이전부터 진행해 온 호법과 항일운동을 선학원의 재단법인 설립을 통해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다. 수좌들을 위한 청정사찰 할애에 대한 요청은 1939년 조선불교선종정기선회(朝鮮佛敎禪宗定期禪會)에서도 거듭되었다. 당시 선학원은 경상, 구하, 종헌 3인을 교섭위원으로 정하여 모범 총림(叢林) 건설을 위해 지리, 가야, 오대, 금강, 묘향 등 5대 산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요구하였다.79)

구참노덕舊參老德을 가볍고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어서 수십 년 선을 수행한 노덕老德 스님내를 특별대우는커녕 방부榜附까지 불허不許하는 일이 간혹 있으니 별도로 양로선원養老禪院을 창설하여 법랍法臘 10년 이상 연령 60세 이상의 노덕 스님들을 별도로 거처케 하자는 김덕산金悳山 씨 의견에 김홍경金弘經 씨 동의動意, 이올연李兀然 씨 재청再請으로 가결되다. 단 양로선원이 설치될 때까지는 각 선원에서 반드시 방부를 받아 입선방선入禪放禪 시간에도 자유로 하게 하여 특별대우할 것80)

선리참구원은 원로승려를 위한 양로선원(養老禪院) 창설 역시 가결하였다. 대처승이 중심이 된 당시 불교계에서 독신 비구승들은 “세속생활과 다름이 없는 재가사원에 드러가서는 발부칠 곳이 업스며”81) “일의일발(一衣一鉢)의 운수생애(雲水生涯)를 지지(支持)키 어려웠다.”82) 그래서 “춘풍춘우(春風春雨)에 회한(懷恨)을 품고 황량가로(荒凉街路)에 서서 좌왕우왕(左往右往)하다가 병이 들든지 하면 간호 한번 받지 못하고 행려사망(行旅死亡)이 되는 자가 비일비재하였다.” 이 때문에 수좌대회에서는 평생을 수행자로 살아 온 구참노덕(舊參老德)들을 위한 양로선원을 창설할 것을 발의하여 가결시켰던 것이다. 이 양로선원은 한국불교의 정통성과 독자성을 굳건히 유지하고자 했던 의도 외에 수행자 노후복지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선구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중앙선원은 왜색불교에 저항했고, 한국 선종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유지 발전시키는 실제적인 상징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중앙선원의 청규는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주] -----

71) 김태흡 편(1941), 《용성선사어록》 하, 대각회, 제26장.

72) 白龍城(1926), <僧侶肉喰妻帶問題に關する嘆願書>, 《朝鮮佛敎》 第27號, 33쪽.

73) 1925년 교무원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 비구·비구니는 7188명으로 집계되었는데, 결혼하지 않은 승려는 400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었다.〔具萬化(1926), <その罪三千大千世界に唾棄する處無し>, 《朝鮮佛敎》 第28輯, 조선불교사. 19쪽.)

74) 백용성(1926), 위의 글.

75) <寺刹住持의 選擧資格 改正>, 《매일신보》 1926. 11. 26.

76) 최금봉(1937), <三十一本山主持會同見聞記>, 《佛敎》 第2號, 불교사.

77) 정광호(2001), <한국 전통선맥의 계승 운동 - 선학원을중심으로>, 《일본 침략 시기의 한일불교 관계사》, 아름다운세상, 290쪽. 이러한 요구는 1926년 백용성의 건백서(建白書)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된 문제였다.

78) 선학원(1935), <우리 각 기관의 활동상황>, 《선원》 4호, 29~34쪽.

79) 정광호(2001), 앞의 글, 293~294쪽. 조선불교선종정기선회는 이전 조선불교수좌대회의 다른 이름이다. 당시 선회에서는 금강산 마하연을 모범선원으로 지정하여 초심납자들을 지도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일발무애(一鉢無碍)의 운수승(雲水僧)에게 정식으로 구료비(救療費)를 예산에 넣어서 질병구호를 시행하자고 하였다.

80) 禪宗中央宗務院, <其他事項>, 위의 자료, 19쪽.

81) 김태흡(1932), <호선론>, 《선원》 2호, 경성: 선학원, 6쪽.

82) 삼보학회, 위의 책, 9~16쪽.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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